소설리스트

16화 (17/35)

불퉁한 얼굴을 하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장석민이 차가 덜컹, 흔들리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괜찮으십니까?」

자하르가 물었지만 장석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묘하게 버릇이 없단 말이지.

살려 달라고 뭐든 하겠다고 울고불고 매달릴 때는 언제고, 가끔 제 처지를 망각하고 저렇게 눈치 없이 굴 때가 있다.

「왕자님이 물으시면 대답을 해야 합니다.」

옆에 앉아있던 라겔이 한마디 하자 그제야 장석민은 괜찮습니다.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어젯밤의 일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이라고 했던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장석민의 구음은 서툴기 짝이 없었다.아래를 빠는 것을 업으로 삼는 창부들의 솜씨와 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서툴게 아래를 빨아대던 모습이, 나름 괜찮았다.

자하르의 시선이 장석민의 불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에 닿았다. 저 입술이 한껏 벌어진 채로 아래를 빨아대던 감각이 문득, 떠올랐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울면서 빌던 목소리, 눈물로 가득 차서 자신을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던 까만 눈동자, 음모 사이로 보이던 모양 좋은 콧대

발갛게 상기된 뺨을 쥔 채로, 억지로 목구멍에 사정해서 삼키게 했더니 아침 내도록 저 모양인 것이다.

「……왜요.」

시선을 느꼈는지 장석민이 불안스레 눈동자를 돌리며 묻는다. 자하르가 아닙니다. 하고 웃었다.

겁은 많은데 정신은 단단하다. 눈치는 빠르면서, 둔하게 굴어올 때가 있다. 만지는 대로 반응하지만 잠시만 눈을 떼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지──.

「제가 드린 서류는 모두 읽어보셨습니까.」

「네, 다 외워뒀습니다.」

기본적인 총기는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끔 사람의 허를 찌르는 짓을 저질러서 지능이 의심되는 순간이 오지만, 그것만 잘 잡아준다면 장석민은 이용하기에 제법 괜찮은 말이었다.

「오늘은 얌전히 계셔도 됩니다.」

차에서 내릴 때 자하르는 장석민에게 낮게 속삭였다.

장석민은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다. 손만 대어도 겁을 먹은 어린아이처럼 흠칫,흠칫, 놀라면서 제 기분을 감추지 못한다. 이전에 얘기했던 대로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성격인 것이다.

 자하르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장석민은 뺨을 문지르며 뭐 묻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자하르가 앞으로 걸어갔다. 장석민은 한 발자국 물러선 채로 자하르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들을 알아본 사람들이 황송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저 등에 업혀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내딛는 발걸음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따분함이 몰려온 장석민은 하품을 하다가, 라겔과 눈이 마주쳤다.

체통을 지키세요.

라겔이 눈으로 무슨말을 하려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장석민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번엔 저만치서 자신을 바로보고 있는 사이프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네놈이 아니겠지.

장석민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사이프의 눈에 날카로운 분노가 스쳤다. 사이프는 장석민을 보는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저건 제 주인이나 잘 모시지 왜 자하르에게 집착을 하는 거냐, 자하르가 아이돌도 아니고, 정신 차려라. 사이프, 오매불망 자하르 찬양을 하는 사이프가 그의 실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싶었다.

사이프 다음으로 장석민의 등장을 꺼리는 것은 둘째와 넷째 왕자였다.자하르가 장석민을 데리고 나타나자 하일과 카힌은 노골적으로 낯을 찌푸렸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감사인사는 해야하고, 하기는 싫고, 애가 있으면 죽지는 않을 것 같고, 그런데 꼴 보기가 싫고, 배는 아프고,그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나타내며 하일과 카힌은 장석민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왕자들도 한 명씩 장석민에게 인사를 했다. 모두 이전과는 다르게 예의를 차리긴 했지만 대부분은 적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개중에는 장석민에게 은근한 호의를 보이며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할 테니 이야기를 하자는 왕자도 있었다.

물론 장석민이 대답할 것도 없이 자하르의 선에서 모두 차단이 되었다. 그 다음은 장관들이었다. 자하르에게 지시를 받은 대로 장석민은 그들 중 몇이 말을 건넸을 때, 불쑥 조언을 해주었다.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해하던 사람들이 뒤늦게 뭔가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석민의 손을 잡고 그 은혜로운 선견에 감사드린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한 이야기가 뭔지도 모르니 장석민은 감사인사를 받고도 떨떠름한 얼굴로 자하르만 바라보았다.

이거면 정말 되는 건가요.

장석민이 조용한 목소리로 묻자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장석민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분명히 뭔가 더 있을 터,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오가는 대화를 듣다 보니 어느새 꾸벅, 꾸벅 고개가 떨어졌다.

라겔이 몇번 더 주의를 시켰지만 몰려드는 잠은 어쩔 수가 없었다.꾸벅꾸벅 졸다 눈을 뜨자 어느새 회의는 끝이 나 있었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오늘도 해결책은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석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하르의 옆으로 다가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걸었다. 남자가 후궁의 법도를 지켜야 하는 것이 쪽팔리긴 했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비르마에게 배웠다. 기왕 자하르를 믿어주기로 한 거, 예의 바르게 팍팍 밀어주고 얼른 떠나자고 결심했다.

그 전에 그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지만, 어떻게든 오늘은 확답을 받아야 한다. 어제와 같은 끔찍한 횡액을 당하지 않으려면.

「몸이 안 좋으신가요?」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조금만 물끄러미 쳐다보거나 이상한 태도를 보이면 자하르는 이런 식으로 물었다. 신체 건강한 대한의 남아가 허약한 이미지로 굳어가는 게 썩 반갑지 않았지만, 여차하면 쓰러져야 하기에 토를 달지 못했다.

「회의는 잘 마무리 하셨나요?」

자하르가 대답 없이 웃었다. 개판이었다는 뜻이었다. 그의 기분이 좋아야 얘기를 꺼낼 텐데. 장석민은 초조해졌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자하르는 물었다. 귀신같은 놈.

장석민은 주변을 살폈다. 라겔은 한참 뒤에서 걸어오고 있고 다른 황자들도 다 흩어진 채였다. 밖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안에서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단둘이 있으면 자하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더러운 성질을 내보이는 것이다.

「그거,말입니다.」

「그거요?」

「……물리셔서 같은 상대와는, 잘 안 한다는, 그거 말입니다.」

자하르는 이놈 봐라, 하는 눈으로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일부러 밖에서,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범위에서 이야기를 꺼낸 것을 눈치챈 터다.

「이제 물리신 거 확실하시죠?」

「뭘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장석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억울해 죽으려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거,있잖아요. 그거.」

장석민은 다시 대명사를 사용해 가며 열심히 눈짓했다. 자하르는 글쎄요,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세 번은 안 하시는 거 맞습니까?」

확답을 받으려는 듯이 장석민은 끈질기게 물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두 번도 하지 않았다. 자하르는 같은 상대와 몸을 맞추는 것만큼 지루한 일도 없다고 여겼다. 넣고, 흔들고, 싸고, 빼면 그만인 과정에서 인간적인 관계가 엮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죠? 안 하시는 거 맞죠?」

장석민이 재차 대답을 요구했다. 아니라는 확답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자하르의 시선이 장석민의 몸에 닿았다. 남자의 성기를 뒤에 넣은 채로, 온몸이 발긋하게 물들어 요분질을 하던 주제에, 저렇게 정색을 하고 나오는 모습이 우스웠다.

「완전 싫증이 난……?」

장석민이 같은 질문을 한번 더 던지는 도중에 회색 칸두라를 입은 남자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회의가 있는 건물 주변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경계하고 있었던 터라 남자의 등장에도 그렇게 신경을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신을 대신하여 너를 처단하겠다.」

남자가 옷자락을 펼치며 몸을 두르고 있던 폭탄을 보이기 전까지.

주변에서 테러를 알리며 왕자들과 장관들을 피신시켰다. 장석민과 자하르만이 남자의 바로 앞에 서 있었던 터라, 피신할 여유가 없었다.

「왕자님!」

뒤에 서 있던 라겔과 경호원들이 달려왔다. 벌써 남자의 몸 여기저기에 붉은색 레이저 스팟이 두두두두, 나타났다. 처음엔 놀라서 얼어붙어 있던 장석민은 어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어쩐지 너무 쉽게 넘어간다 했더니.

장석민이 고개를 뒤로 도려 자하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잔뜩 굳은 표정이 일품이었다. 그래, 너 연기 잘한다. 장석민은 혀를 내차며 몸에 폭탄을 두르고 있는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쟝, 움직이지 마세요.」

자하르의 목소리가 뒤에서 나직하게 울린다.

그래, 너 혼자 연기 다 해 처먹어라.다른 사람들은 다 속아도 나는 안 속는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말을 무시하고 남자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네놈은 뭐야!」

기폭장치를 손에 쥔 채로 남자가 자신을 붙든 장석민에게 소리 질렀다.

「당장 손 놓지 않으면 눌러버린다.」

장석민은 신경쓰지 않고 남자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놈 역시 분명 자하르가 짜놓은 판에서 놀고 있는 장기말일 테지.

"이런 거 가지고 이러면 안 돼요."

장석민은 한국말로 테러범을 나무라며 그의 손에서 기폭장치를 빼앗으려 했다.

「쟝!」

자하르가 뒤에서 무서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미 자하르의 옆으로는 경호원들이 둘러싼 채였다.

장석민은 아, 하고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리 그래도 연기하는 시늉을 해야 하는데, 지금 자신이 너무 담담하게 테러범과 맞서고 있었다. 이래서야 자하르가 연기력으로 구박을 해도 할 말이 없다. 장석민은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이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장석민은 남자와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남자는 죽기 살기로 장석민에게 달려들었다. 적당히 맞춰주자고 생각은 했지만 남자가 눈이 뒤집혀서 장석민의 팔을 긁어대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쟝! 당장 그만두고 이리 오란 말입니다!」

자하르가 뒤에서 소리까지 지르자, 장석민은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남자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다리를 걸어 남자의 몸을 등 뒤로 넘겼다.

빡 소리를 내며 남자가 바닥에 던져졌다. 이번에도 깨끗한 한판이었다.

장석민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경호원들이 황급히 달려와 남자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무전기로 무전이 오가고 주변을 군인들이 둘러쌌다.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다 자하르와 눈이 마주쳤다.장석민은 어깨를 움츠렸다. 자하르의 눈빛이 무시무시하다. 꾸며낸 눈빛이 아님을 장석민은 본능으로 느꼈다.

「쟝.」

그가 장석민을 불렀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장석민은 무심결에 뒷걸음질을 쳤다. 온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한 번도, 맹세코 단 한 번도 자하르가 저런 식으로 부렀던 적이 없는 것이다. 자하르의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잡히면 죽을 것 같았다.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석민은 뒷걸음질쳤다.

「쟝, 이리 오세요.」

자하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자하르에게 가야 하는데 다리가 자꾸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

군인들이 남자의 몸에서 폭탄 조끼를 제거해 남자를 일으켜 세우던 참이었다. 갑자기 남자가 등을 지고 서 있던 장석민에게 달려든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네놈의 목을 따서 신에게 바치겠다.」

남자가 품에서 꺼낸 칼로 장석민의 목을 겨누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장석민은 칼을 한번 내려다보고, 시선을 자하르에게 돌렸다.

「……정말, 아닌 건가요?」

자하르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동자에 인 분노를 읽은 장석민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좆 됐다.

「기폭 장치를 눌러!」

남자의 눈에 장석민의 손에 들려있던 기폭장치가 들어온 것이다. 장석민은 바싹 얼어붙어 자하르만 바라보았다.

「뭐하는 거야. 목이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기폭장치를 눌러!」

경호원들이 자하르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장석민의 경호원이 자하르를 피신시키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장석민의 몸 위에도 빨간색 점이 빼곡히 들어찼다. 장석민은 이제 테러범과 함께 묶인 신세가 되었다.

「눌러! 당장!」

칼날이 목을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고통에 장석민은 신음을 삼켰다.

「당장 누르라고!」

남자가 뭐라고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석민은 손에 쥐고 있던 기폭 장치를 내려 보고는 다시 자하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왕자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라겔이 자하르에게 외쳤다. 자하르는 장석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견 담담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 눈에는 새파란 분노가 일렁였다.

"시발"

장석민은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기폭 장치를 눌러도 죽고,누르지 않아도 죽는다.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고 목이 잘려 죽을지 아니면 폭탄으로 몸이 산산조각이 나서 죽을지를, 자신이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

장석민은 눈을 떴다. 다른 왕자들도 모두 자리를 피했다. 남아있는 것은 자하르뿐이었다. 자하르의 수행원들과 경호원이 파리하게 질려서 얼른 자리를 떠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쟝.」

자하르가 장석민을 불렀다. 목에 파고든 칼날 때문에 장석민의 옷깃이 이미 피로 젖어 있었다. 기폭장치를 손에 든 장석민은 부들부들 떨면서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빨리, 가세요.」

어차피 죽을 거면 혼자 죽는 편이 낫다. 저런 놈이랑 황천길 동무했다가는 저 세상에서도 편치 않을 것이다.

「빨리,──가, 세요.」

장석민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칼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장석민은 다시 시발, 하고 욕을 중얼거렸다. 하일이나 자하르의 손에 죽을 줄 알았는데 이름도 모르는 테러범의 손에 죽게 되는구나.

「죽게 두지 않을 겁니다.」

담담한 자하르의 목소리에 장석민은 웃음이 났다. 저 미친놈은 이런 와중에도 성자 같은 말투라니,

죽기 전에 욕이나 실컷 해줄걸. 빌어먹을 이중인격자, 말자지, 성격파탄자,‥‥억울해. 이렇게 끝도 없이 욕이 생각나는데 한마디도 못하고 끝내야 한다니.

「당장 누르지 못해!」

남자가 소리 질렀다. 장석민은 기폭장치를 쥔 채로 눈을 감았다. 아버님,어머님, 안녕히 계세요. 형아들도 나중에 봅시다. ……여자들 이름은 너무 많아서 생각도 안 나는구나. 억울하다. 하필 죽기 전에 한 것이 남자와의 구강성교라니.

「쟝. 버튼을 누르세요.」

「──!」

장석민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부릅뜨고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드디어 미쳐서 환청을 들은 게 아니라면, 자하르가 미친 것이 분명하다.

「누르셔도 됩니다.」

저놈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이걸 누르면 나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군인들과 경호원들까지 다 날아가는데.

장석민이 희게 질린 얼굴로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자하르가 신선히 웃는 낯으로 다시 말했다.

「누르셔도 됩니다. 신께서 보호해주실 겁니다.」

장석민은 드디어 자하르가 본색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저도 피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지금 다 같이 죽어 버리자, 이거구나.

「누르세요.」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은 발끈해서 외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내가 지금 어떤 각오로, 이러고 있는데, 이걸 누르라니──!」

「괜찮습니다. 누르세요. 신께서 그대를 사랑하시기에, 모든 게 괜찮을 겁니다.」

지극히 평온한 말투에 장석민은 화가 끝까치 치밀었다. 그나마 인간적인 면모를 싹싹 끌어 모아 혼자 죽겠다고 버티고 있었는데, 자하르가 저따위로 나오자 눈앞이 회까닥 돌아버린 것이다.

「야, 이 엘시시 같은 놈아!」

자하르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는 것을 장석민은 느낄 수 있었다. 장석민은 쾌감을 느꼈다. 죽기 전까지 사람들 앞에서 가식을 떨며 신 타령을 하던 자하르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했다. 장석민은 손에 쥐고 있던 기폭장치를 흔들었다.

「누르라고? 신이 보호를 해줘? 끝까지 사람을, 뭐로 보고,──!」

자하르의 입매가 멈칫 굳었다.

「그렇게 신이 좋으면 니가 해! 안 해!」

장석민은 기폭장치를 자하르를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그의 돌발행동에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던 남자도 놀라 기폭장치를 눈으로 좇느라 몸이 흔들렸다.

탕.

장석민은 흠칫, 몸을 떨었다. 등 뒤로 뜨끈한 액체가 훅 끼얹어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뒤를 돌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한 피냄새가 진동했다. 어깨에 총을 맞은 남자가 자리에 쓰러졌다.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남자를 제압했다. 라겔이 기폭장치를 회수해서 책임자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장석민은 총을 들고 서 있는,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방금 방아쇠를 당기고도 소름 끼칠 만큼 평온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자하르가 들고 있던 총을 경호원에게 건넸다. 그가 계단을 내려왔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심장에 들러붙어 장석민의 호흡을 짓눌렀다.

「괜찮으십니까?」

자하르가 물었다.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자하르가 쏜 총이 1mm만 비껴갔어도 자신의 머리는 수박처럼 깨져 죽었을 것이다.

미친놈,……진짜 미쳤어.

「괜찮으세요?」

자하르가 고개를 기울여, 다정하게 묻는다. 찰나의 순간에, 테러범이 당황한 틈을 타서 총을 빼 들어 방아쇠를 당긴 철두철미한 사람과는 동일인이라고 믿기 힘든 목소리였다.

「어떻게,…….」

장석민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움직였다. 한 걸음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팔을 붙들었다.

「……빗맞았으면,…….」

장석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총알이 얼굴 옆을 스치던 감각이 잊히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속삭이는 자하르의 목소리가 우아하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팔을 쥔 채로 눈을 부릅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느냐는 힐난이었다.

「──쟝이라면 최악의 선택을 할 거라 믿었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장석민은 일부러 그가 자신을 도발했음을 깨달았다.

「던질 거라는 생각은 못 했지만,──그건, 정말 예상 못 했습니다.」

자하르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장석민의 몸을 감싸주었다. 장석민이 바르작거리지 못하도록 외투를 바싹 여며주며, 자하르가 말했다.

「그대가 보여준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정치술에 진심으로 박수치고 싶었다. 그 짧은 순간에 장석민의 삽질을 순식간에 사람들을 향한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한 것이다. 자하르는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테러범에게도 자애로운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의 가호가 그대에게도 늘 함께 하길, 바랍니다.」

테러범이 욕설과 함게 침을 뱉었지만 자하르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테러범을 사살하지 않고 일부러 어깨를 맞추어 그 목숨조차 귀하게 여겼다며 사람들은 자하르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손에 피를 묻히고도 그는 여전히 성스러워 보였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눈이 마주지차 자하르가 가늘게 웃었다. 그대로 장석민의 허리를 붙들어 안아 올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장석민이 내려주세요. 하고 말하자마자 자하르의 눈이 선연하게 빛난다. 이럴 때는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기에 장석민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난장판이 된 건물 앞을 떠나며 자하르는 장석민을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장석민의 몸은 조금씩 떨려왔다. 엷게 웃고 있는 자하르의 얼굴에 변화가 없었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온화한 낯을 하고 자하르는 말없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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