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장석민이 수행원에게 말했다. 오늘도 도서관 지기는 시체 같은 꼴을 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같이 가겠습니다.」
수행원의 말에 장석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도서관 안에 사람도 없고, 나갈 곳도 없잖아요. 금방 책만 가져올께요.」
수행원의 표정이 떨떠름했지만, 본인도 음침해 보이는 건물 안으로는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책만 가지고 바로 나올게요.」
장석민이 거듭 그렇게 말하자 수행원이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말을 하고 장석민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복도는 여전히 어둡고 스산했다. 발걸음 소리가 장석민의 뒤를 따라붙었다. 장석민은 뒤를 돌았다.
"참, 신기한 곳이란 말이야."
혼자 걷는데도 늘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단 말이지.
장석민은 쩝, 입맛을 다시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책을 찾는다는 핑계로 탑의 지하로 가볼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맨날 마지막 기회였지, 젠장."
장석민이 투덜거리며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자하르의 말대로 항상, 최악의 선택만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최악이 아니길 바라야지.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매번 와도 올 때마다 헷갈리는 곳이었다. 장석민은 책들을 손으로 훑으며 눈에 익은 제목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한참을 더듬은 후에야 간신히 오늘 가져가야 할 경전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럼 이 아래에 그 문을 여는 장치가 있을 터,
"어디 보자."
장석민은 책장 아래로 손을 집어넣으려고 허리를 굽혔다. 동시에 기겁을 하고 몸을 뒤로 뺐다.
"──!"
책장 사이에서 희끄무레한 형태가 지나갔다.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이 생겼다고 늘 투덜거렸는데 정말로 귀신을 본 것이다.
도망을 가야 하는데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빨리, 도망을……,
"흐악!"
누군가 등 뒤에서 장석민의 어깨를 쥐었다. 장석민은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펄떡 뛰어올랐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장석민은 머리를 감쌌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이여. 귀신은 진짜 딱 질색이란 말입니다.
소심하게 주저앉은 채로 성호를 긋고 있는 그의 어깨를 다시 부드러운 손이 툭툭, 두드렸다. 귀신이 뭘 먹고 손이 이렇게 부드, …….
"어……."
살그머니 고개를 든 장석민은 입을 벌리고 눈을 치떴다. 일전에 기도회를 하러 가서 보았던 그 남자였다.
장석민은 눈을 껌벅거리다가 자신이 얼마나 흉한 꼴을 하고 있는지 떠올리고 얼굴을 붉히며 일어섰다.
「안녕, ……하세요.」
영어로 인사를 건네자 남자는 말없이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영어를 못하는 건가. 역시 타르쿤인가 뭔가를 좀 배워둬야 하는 건가.
「여기는 어쩐 일로, 책? 러마디?」
장석민이 가져가야 할 책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자신처럼 경전을 베껴 쓰러 온 러마디인가 싶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장석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시 봐도 무서울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 눈매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는데, ……누구를 닮은 거지.
장석민의 음, 하고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복도 안쪽으로 사라졌다.
「어! 책 안 가져가요?」
장석민이 경전을 들며 외쳤다. 그러나 이미 남자의 모습을 사라져버린 후였다.
"……설마 진짜 귀신은 아니겠지."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비밀 통로로 들어가 봐야겠다는 생각은 싹 달아났다.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도서관 안을 돌아다닌다는 사실에 도무지 문을 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괜히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내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거지."
장석민은 책을 안아 들었다. 손안에 든 경전이 묵직했다. 그래도 이 모든 게 희망의 무게라고 생각하며 장석민은 걸음을 옮겼다.
희망을 안고 낑낑거리며 복도를 걷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눈동자는 장석민이 뒤를 돌아본 순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장석민은 소파에 앉아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입술에 경련이 일고 손발이 떨렸다,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어 벌써 몇 번이나 등 뒤로 손을 비볐는지 모른다.
「이렇게 말라쿤님을 만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하. 네.」
「고난을 겪고 있는 자에게 금과옥조 같은 소중한 조언을 해주신다하여, 찾아왔습니다.」
장석민은 고난이요, 하며 앞선 말을 되뇌었다.
기름기가 반질반질한 얼굴을 한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장석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 오전 장석민의 일과는 자하르가 마련해 놓았다는 칼리파 장관과의 자리로 시작되었다. 이런 유의 자리는 이미 여러 번 가졌다. 어떤 의미인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꺼림칙하긴 했지만 창석민에게는 썩 어려운 자리는 아니었다. 자하르가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장석민이 해준 조언은 거의 그대로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누구를 만나든 간에 자하르가 준비해 놓은 자료를 외우고 그대로 조언을 해준 다음, 피곤하다며 자리를 뜨면 그만이었다.
「말라쿤님께 조언을 듣고자 하는 문제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네? 아아, 예에. 조언. 네.네. 그, 그렇죠.」
장석민은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어제 그렇게 나간 자하르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당연히 장석민의 머릿속에는 칼리파 장관에 관한 정보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 귀중한 조언을 들으려면 약속을 하고도 일주일을 넘게 기다려야 한다던데,얼굴 보는 것도 힘들군.」
칼리파 장관의 옆에는 꼴도 보기 싫은 카힌이 앉아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어도 라겔도 자하르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에 장석민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리문을 찾아온 두 손님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이 친하신 모양인가 봅니다.」
장석민이 칼리파 장군과 카힌 왕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외숙부님이시다.」
카힌 왕자의 대답에 장석민은 이런 자리를 마련해놓고 언질도 없이 사라진 자하르에 대한 원망이 세 배로 증폭했다.
「오늘 제가 이곳을 찾아온 목적은 아제르저 회사와의 공동 투자 펀드 설립에 관한 조언을 듣고자 함입니다.」
장석민은 예에, 그러시군요. 하고 무성의한 맞장구를 쳤다. 그의 시선은 문에 머문 채였다.
자하르,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빨리 오란 말이야.
「저에게는 몹시 중요하기도 하고, 자칫 잘못하면 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정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신중하셔야 하지요. 천천히,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장석민은 칼리파 장관이 영원히 숙고하길 간절히 기도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렇게 무례할 수도 있는 부탁입니다만.」
「…….」
사람들은 무례한 줄 알면서 왜 말을 하는 걸까. 그냥 닥치고 있어주면 안 되려나?
「발라쿤님의 영험한 능력에 관해서는 저도 들은 바가 많습니다. 에드문트 회장님과의 일화나 왕자님들을 위험에서 구하신 일이라든가. 아, 얼마 전의 테러 사건도 그렇고요.」
「아하하, 별거 아닙니다.」
장석민의 손을 내저었다. 시선은 여전히 문에 고정한 채로.
「제가 공교롭게도 그 당시에 다 외국에 나가 있었던 터라, 직접 보지를 못했습니다.」
「봐서 좋은 일도 없었습니다. 하하.」
「그래서 드리는 부탁인데,그 선견을 저에게 미리 경험하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
「네?」
「물론 말라쿤님을 의심한다거나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저로서는 그저 확신이 필요할 뿐입니다. 노인네가 나이만 드니, 소심해져서 드리는 부탁이니 그러려니 하고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허엉.
장석민은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빌어먹을, 자하르는 이런 너구리같은 영감을 나에게 넘겨주고 대체 어디를 가서──. 설마, 밤에 안들어온 걸 봐서 또 홍등가에……, ……젠장. 그러고도 남지.
왠지 모를 배신감에 장석민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제가 드리는 질문에 대답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게 바로 어려운 거라고!
장석민은 버럭 외치고 싶은 것을, 필사의 인내심을 끌어모아 참았다.
「여쭤 봐도 될는지요?」
「예. 어, 하하하, 네. 뭐 어려운 질문이 아니시면…….」
「부끄러운 얘기이긴 합니다만 실은 제 열두 번째 부인이 얼마 전에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장석민은 저도 모르게 뭐라고요? 하고 외쳤다. 칼리파 장관이 쑥쓰럽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장석민은 기가 막혔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아무리 젊게 봐준다 해도 일흔은 충분히 넘긴 얼굴이었다. 열두 번째 부인이라는 부분에서 놀라야 할지, 그 나이에 임신시켰다는 부분에서 놀라야 할지, 장석민은 감을 잡지 못했다.
「신의 축복으로 생긴 아이랍니다.」
「그, 그러게요. 축하드립니다.」
장석민은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제 부인의 뱃속에 든 아이가 어떤 성별을 갖고 있는지 ,입니다.」
"……시발."
「네?」
「아,아닙니다.」
너무나 황당한 질문에 장석민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대답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칼리파 장관이 넉넉한 미소를 지은 채, 장석민을 바라보았다. 장석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백 년 묵은 너구리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하하. 50퍼센트의 확률 아닌가. 그냥 편하게 대답하면 되잖아.」
카힌이 거들먹거리며 어깨를 뒤로 젖혔다.
50퍼센트 같은 소리 좋아하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그동안 개고생해서 얻은 이미지가 박살 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장석민은 카힌이 일부러 외숙부를 부추겨 이런 상황을 만들었음을 직감했다.
「대답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칼리파 장관이 넌지시 재촉하자 장석민은 연신 어색한 웃음을 내며 눈동자를 굴렸다. 자하르라면 칼리파 장관의 열두 번째 아내 배 속의 아이 성별까지 다 알아뒀을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 들었다. 동시에 그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나쁜 새끼. 나는 지금 능구렁이 같은 놈들 둘에게 이런 수난을 당하고 있는데 지는 여자들이랑 뒹굴고 있어?
「왜? 대답하기 곤란한가? 말라쿤의 그 위대한 선견은 자하르가 없으면 발휘하기 힘든가?」
카힌의 날카로운 지적에 장석민의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놈,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구나.
장석민은 최대한 차분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자하르 왕자님 하고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럼 대답해주면 좋겠군.」
카힌이 다리를 꼬고 앉으며 대꾸했다.
저 재수 없는 성격은, 집안 내력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같이 저런 성격을 가질 리가 없다.
카힌이 눈짓으로 장석민을 또 한 번 재촉했다.
어쩌지. 이런 순간에 자하르 얼굴만 떠오르면 어쩌자는 건데.
빌어먹을 놈.
「……글쎄요.」
장석민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게 네 대답인가.」
카힌이 되물었다. 장석민의 입술이 달싹, 달싹, 움직였다. 카힌은 자하르가 저 동양인을 옆에 끼고 다니는 모습이 싫었다. 어차피 쓰지도 않을 거면서 애지중지 데리고 다니는 게 배가 아팠다.
말라쿤이라 불리며 칭송받은 동양인 놈이 별거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놈도 분명 얼마 가지 않아 남자 러마디를 버릴 것이다. 그때 데려오면 된다. 하지만 무턱대고 기다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건, ……제 대답은, ……모르겠,…….」
「뭐라고?」
기어들어가는 장석민의 대답에 카힌이 눈썹을 찌푸렸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없, ……습니다.」
장석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를 때는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최선이란다. 다정하게 말씀해주시던 어머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엄마, 보고 싶어요.
「허허, ──거 참.」
칼리파 장관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너털대는 웃음을 지었다. 동양인 청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
「정말 탁월하신 선견입니다. 말로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이야.」
칼리파 장관의 이해할 수 없는 칭찬에 장석민의 얼굴에 당혹스런 기색이 스쳤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말라쿤의 현신이여.」
비꼬는 말투가 아니었기에 장석민의 혼란은 더해갔다. 함정인가? 지금 일부러 방심시킨 다음에 뒤통수를 내리치려고 이러는 것일까.
「……우연입니다. 숙부님.」
심기가 언짢다는 듯이 카힌이 얼굴을 찌푸렸다.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렸다. 뭐야, ──함정이 아니야?
「현재 아내는 남녀 이란성 쌍둥이를 임신 중입니다. 그러니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는 말라쿤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장석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애초에 문제에 대한 답은 50퍼센트의 확률이 아니었다. 일부러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포자기하듯 던진 대답이 정답이 되자 장석민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만큼 떨떠름했다.
「무례한 질문이었을 텐데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선견을 빌려 소중한 조언을 받고 싶습니다.」
칼리파 장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장석민은 아닙니다, 하고 그를 말렸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올 텐데, 거기에 요행을 바랄 수도 없었다.
「제게는 너무도 소중한 일입니다. 10억 달러 규모의 경제 협력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조언을 듣고자 합니다.」
장석민은 머릿속으로 10억 달러를 한화로 환산해 보았다. ……엄마, 여기서도 솔직하게 그냥 모르겠다는 대답을 해도 좋을까요?
「우선 제가 말씀드릴 사항은…….」
칼리파 장관이 말을 맺기 전에 문이 열리고 흰색의 전통복을 갖춰 입을 자하르가 걸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일 때문에 조금 늦었습니다.」
자하르가 칼리파 장관과 카힌 왕자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했다. 그의 시간이 마지막으로 장석민에게 닿았다.
껍데기에 불과했지만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는 그 온화한 낯짝을 보는 순간 장석민은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살았다.
자하르가 이젠 어떻게든 해줄 것이라는 믿음에 장석민은 긴장이 탁, 풀렸다.
「자…….」
일어나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장석민은 멈칫, 입을 다물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자하르의 표정이 이상했다. 언뜻 놀라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복잡한 얼굴이었다. 자하르는 서서 장석민을 쏘아보듯이 시선을 던졌다.
왜 그러지. 내가 또 뭔가 실수를 했나.
엉거주춤하게 일어서 있던 장석민의 앞으로 자하르가 걸어왔다. 그와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질 때마다 장석민은 심장이 욱신거렸다. 공포에서 비롯된 감정인지, 극도의 긴장에서 해방된 기쁨인지, 구분되지 않는 통증이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다가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겨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석민은 자하르의 품으로 풀썩, 쓰러졌다. 자하르가 그의 몸을 받쳐 들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칼리파 장관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원래도 몸이 약한 사람인데 요즘 나라의 중요한 일을 내다보는 일을 하느라, 체력이 더 축난 것 같습니다.」
「저런, 저런, 아무래도 그런 신통한 능력을 발휘하고 나면 피곤하시겠지요.」
칼리파 장관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카힌은 손에 넣은 먹이를 빼앗긴 사나운 짐승처럼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카힌의 시선을 느낀 장석민이 몸을 움츠렸다. 자하르의 손이 장석민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장석민은 얼굴에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의 앞에서 남자에게 안긴 채, 쓰러지는 시늉을 해야 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이쪽이 너구리 같은 노인네와 승냥이 같은 중동 놈 앞에 서 있는 것보다, 백 배 나았다.
「괜찮으세요?」
자하르가 묻는다.
꾸며낸 다정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장석민은 순간, 자신의 몸을 받치고 있는 상대가 자하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하르가 축 늘어진 장석민의 몸을 두 손으로 안아들었다.
「죄송합니다. 만남은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장관님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칼리파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귀한 분이니 잘 모셔야겠지요.」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격으로 답을 맞힌 장석민에게, 칼리파 장관은
이미 깊은 감명을 받은 후였다. 시간이 언제가 됐든, 동양인 청년에게
조언을 받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장석민을 안아 든 자하르가 자리를 떠나려 했다, 카힌이 잠깐, 하면서
장석민의 소맷자락을 움켜잡았다. 장석민이 흠칫, 떨면서 자하르의 품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하르가 손에 힘을 주어 장석민을 바싹 끌어안았다.
「내가 준 선물에 대한 답이 없군.」
「카힌 형님, 그건 추후에 시간을 내어 감사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너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자하르.」
카힌이 장석민의 소맷자락을 움켜쥔 채로 말을 이었다.
「윗사람이 선물을 보냈늘 경우, 기쁜 마음이로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그것이 궁중의 예법이거늘.」
장석민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그간 받은 선물은 포장지도 풀지 않은 채로 구석에 피라미드 처럼 쌓아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느냐?」
카힌의 물음에 장석민이 어물어물 자하르를 올려다보았다. 마음대로 대답하라는 듯이 자하르는 아무런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지 그렇지 않은지 물었다.」
「……듭니다.」
장석민이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카힌이 재차 물었다.
「마음에 드는데 어째서 그걸 착용하지도 않았느냐.」
그 선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뭘 어쩌라는 건지, 장석민은 난감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자하르가 도와주면 좋으련만,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는 그걸 착용하고 다시 만나도록 하지.」
카힌의 말에 노골적인 수작이 엿보였다. 장석민은 대답하지 않고 조그맣게 고개만 끄덕였다. 자하르는 카힌과 칼리파에게 다시 인사를 남기고 응접실을 나왔다.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장석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
4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하르는 말이 없었다. 장석민은 내려달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가 내려주기 전까지는 입을 닥치고 있는 것이 현명한 처사임을 떠올렸다. 장석민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고 난 후에야,자하르는 입을 열었다.
「어째서 허락도 없이 칼리파 장관을 만났습니까.」
「오늘 약속이 되어있다고 찾아오셨습니다.」
「기다렸어야죠.」
장석민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다른것은 몰라도 여기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제가 만나고 싶어서 만났습니까, 카힌 왕자님이 당장 내려오지 않으면.왕족에 대한 모독이라는 말을 전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서러웠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귀한 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살아왔는데 갑자기 신분 계층에 대한 압박을 느끼려니 서럽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러는 왕자님은 오전에 약속이 있는 것을 알고도 안 오시면 어쩝니까. 그게 이것보다 중요합니까?」
밤새 남녀와 뒤섞여 진땅 구르고 돌아왔을 자하르에게 장석민은 비난을 퍼부었다.
「제 목숨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왕자님의 계승권도 달린건데 어떻게 그것을 하다가…….」
자하르가 장석민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지 장석민이 화를 내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라니요,」
「그거, 말입니다.」
섹스니 성교니 하는 단어가 이렇게도 입 밖으로 내기 힘든 적이 있던가. 장석민은 딴청을 피우며 대명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무리 그게 급해도, ……다음에는 언질이라도 좀 하고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입을 다문 채로 장석민을 바라보는 자하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왜요, 제가 트, 틀린 말 한 것은 아니지 않습…….」
장석민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젠장, 이라고 중얼거렸다.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을 던진 대상이, 영 틀려먹었다. 니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함부오 놀리느냐며 목을 잡아 비틀고도 남을 상대였다.
「기다리셨습니까?」
「잘못 ─, ……네? 」
꾸중을 듣기 전에 사과부터 치고 들어가는 수법을 써먹으려던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리며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저를 기다리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담담하다. 평연한 표정도 그대로라, 장석민은 눈을
슴벅거리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네, 당연히 기다렸……, ……기다리면 안 되나요?」
장석민이 되묻자 자하르의 눈에 어렴풋이 웃는 기색이 스친다. 어라, 아까도 저런 표정이었는데, 왜 저러지.
이해할 수 없는 자하르의 반응에 장석민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혹시, 내가 돌아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나.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서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연락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자하르가 이렇게 선선히 사과를 해오자 장석민은 되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인간이 아니잖아, 당신.
「아, 어……, 뭐 바쁘셧다면,……」
「아버님의 병세와 관련된 일이라서 밤새 병원에 있다 왔습니다.」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에 장석민은 점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병원에, …… 못 들어가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혹시나 있을 사고를 대비해 후계자들의 접근을 모두 막고 있다고 들었다. 자하르가 대답했다.
「잠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들어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괜한 내 착각이 아니겠지.
「아, 그, 저기, 차도는 좀…….」
「호전도 악화도 없는 답보 상태입니다.」
자하르가 침대 옆에 앉았다. 장석민은 유난히 그가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렇겠지, 밤세도록 병원에 있다가 왔을 테니.
자하르가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입술을 굳게 다문 그의 옆얼굴을 보던 장석민은 자신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하르의 아버지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쓰러진 대상이 가진 의미만을 생각하느라 무크라르 왕이 자하르의 아버지였음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왕자니 뭐니 해도, 자하르도 아버지를 걱정하는 아들의 마음일 텐데, 이중인격자라고 해도 효심이 없을 리가 없다.
장석민이 저기, 하고 자하르를 불렀다. 자하르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눈길만 옮겨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도 얼마 전에, 대장암 수술을 받으셧습니다.」
「……?」
「초기에 발견해서 간단한 폴립 제거 수준이라고 들었는데도, 수술전날 진짜 미치겠다라고요, 밥도 안 먹히고, 잠도 안 오고, 우리 아버지가 되게 강하시거든요. 죽여도 안 죽을 것 같단 사람이 아프다니까, 되게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걱정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아니고 걱정을 안 한다고 나빠질 것도 아니더라고요.」
맥락 없는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면서 장석민은 무안함에 목덜미를 긁적였다.
「저기, 그러니까, 제 말은, ……괜찮으실 겁니다. 그러니까, 자하르 왕자님도 너무 스트레스 받지마세요. 가끔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이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때는 그냥 두는 것도 방법입니다.」
장석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어 자하르의 어깨를 두 번, 조심스럽게 도닥였다. 자하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놀랄 만큼 무심한 얼굴이었다.
「뭐하시는 건가요.」
자하르가 물었다.
「……, ……그러게요.」
장석민이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한국어에 있는 병신 삽질, 이라는 표현을 영어로 표현해야 할지 머릿속에 단어가 맴돌았다.
「오해하셧나 보군요.」
자하르가 해사하게 웃었다.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서,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깨어나시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요.」
「…….」
그래, 이거야! 이게 바로 자하르지. 잠시 잠깐 이놈이 평범한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속을 뻔했잖아!
「깨어나시면 좋겠지만, ─뭐, 문제가 잘 해결된다면 깨어나지 않는 것도 한 방법 이긴 하겠군요.」
젠장. 이런 놈을 인간적으로 걱정해주다니,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걱정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걱정은 공짜인데요, 뭐.」
장석민이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저놈을 걱정해주면 내가 성을 간다, 성을.
「공짜라서 해주셧던 건가요.」
장석민은 날름 그렇다고 답하려다가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뾰족해서, 고개를 내저었다.
「왕자님하고 저는 한배를 탄 운명이니까, 모쪼록 잘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별일 없으면 잘 될 겁니다.」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한 말투였다. 그래, 자하르가 잘 되어야 내가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칼리파 장관이 쟝을 마음에 들어 하던 눈치던데, 어떤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그 사람 열두 번째 부인이 애를, ……아닙니다. 별말 안 했어요.」
장석민은 손을 내저었다. 이야기하기도 피곤했다.
「적당히 잘 처리하신 것 같더군요, 잘하셨습니다.」
칼리파 장관이 흡족한 눈으로 장석민을 바라보던 것을, 자하르는 바로 알아챘다. 칼리파 장관은 이번에 설립할 정부 기구를 위해 필수적으로 이용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카힌의 외숙부라는 사실을 알먄서도 그와의 약속을 잡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자하르는 장석민에게 시선을 두었다 능력이 좋은 것인지 운이 좋은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카힌 형님께서는 별말씀 없었습니까?」
「네. 그냥 시비만 거시던데요, 그런데 카힌 왕자님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요, 그런 말씀은 안 하셨는데.」
자하르 역시 카힌이 리문에 있다는 전갈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 능구렁이 같은 칼리파와 카힌의 협공을 계산해두지 않은 것은, 분명히 자하르의 실수였다.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자하르의 눈에는 장석민의 희게 질린 얼굴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칼리파와 카힌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장석민의 표정이 변해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 가득, 환희로 차올라 자신을 반기던 얼굴이 자하르의 눈에 아로새겨졌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자하르는 뜨거운 무엇인가가 목을 꽉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 통증은 목에서 내려와 심장을 욱신거리게 했다. 불쾌함과 간지러움의 사이에 있는, 알 수 없는 감각에 자하르는 한동안 장석민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지금은 불퉁하게 투덜거리고 있는 장석민을, 자하르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카힌 왕자님은 저를 안 믿는 눈치던데요.」
「원래 형님은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카힌 왕자님은 대체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매번 저러시는 건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억하심정이 아니라 욕정입니다.」
「……그러니까 왜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요.」
장석민이 카힌을 처음본 것은, 아니 처음으로 그런 인간이 있다고 정확하게 인식한 것은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였다. 그날 이후부터 보기만 하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 장석민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쟝에게 박고 싶어서입니다.」
「 ─!! 」
장석민의 목덜미가 시빨겋게 달아올랐다. 분노와 수치가 일순간에 얼굴로 몰린 것이다
「그 아래가 아주 먹음직하다는 것을 알아챈 겁니다.」
자하르의 시선이 장석민의 다리 사이에 머물렀다. 그 미묘한 공기의 변화를 눈치채고 장석민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시선이 닿은 것뿐인데도 온몸이 화끈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자흐르의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놈의 고개를 영원히 돌려버리고 싶었다.
「그러게 왜 흘리고 다녀서 ─」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장석민은 미처 듣지 못하고 네? 하고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카힌 형님은 나중에 다시 뵐 때, 감사 인사만 하시먄 됨니다.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그럼, 저는 그 선물을 가지고 다시 카힌 왕자님을 봬야 하는 건가요,……싫은데.」
카힌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장석민이 손바닥으로 팔뚝에 올라온 소름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쟝.」
그가 장석민을 불렀다. 뒤를 돌아본 장석민은 자하르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젠장, 저렇게 웃고 있을 때는, 영 안좋은 일들이 이어지던데,
「그런데 카힌 형님께서 주신 선물은 마음에 드셨다고요?」
장석민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선물을 풀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아시잖아요.」
장석민이 얼굴하다는 듯이 구삭에 쌓인 선물 더미를 가리켰다. 자하르가 무신한 투로 대꾸했다.
「글쎄요, 그중 하나는 풀어보셨을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