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35)

「……, …….」

장석민은 카메라와 자하르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길게 한숨을 지었다. 한 손에 커다란 가죽 장갑을 끼고 있던 자하르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친다.

「아닙니다. 네, 구도 좋고 모델도 좋네요.」

장석민이 사진기를 들고 무성의하게 셔터를 눌렀다. 화면은 확인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대충 찍어도 그림이 될 인간이니까.

 "저 인간이야말로 가끔 진짜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장석민은 카메라를 든 채로 여기저기 셔터를 누르며 구시렁거렸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데리고 온 곳은 궁 근처에 있는 사막이었다.

여기서 뭘 합니까, 라고 묻는 장석민에게 자하르가 카메라를 건냈다. 카메라를 받아든 장석민은 멀뚱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웃 거렸다. 이걸로 뭘 라면 좋죠, 라고 거듭 묻는 장석민에개 자하르가 당연하다는 투로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하고 대답했다.

뭘요.

장석민의 짧은 물음에 자하르가 웃음을 삼켰다. 경호원들이 매가 든 케이지를 가져오는 것을 보고 장석민은 자하르가 매사냥응 하러 나왔음응 알아챘다. 시간이 괜찬으냐고 묻는 말에 자하르가 하루쯤은, 하고 고개를.끄덕였다. 이틀 뒤에 회의가 열리면 자하르와 하일이 연합을 한 임시기구가 발족하고 얼추 정국이 정리된다. 그의 말대로 하루쯤은 숨통을 트일 시간이 되는 것이다. 하긴, 유일한 취미라고 했으니 이런 시간도 그에게 가끔은 필요할 테지.

납득을 하며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에 저는 매사냥 못 하는데요, 하고 말했다. 케이지 안에 든 매를 확인하단 자하르는 압니다, 하고 담담히 대답했다.

그럼 저는 뭐하라고요.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에 쥔 카메라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르렸다. 장석민의 얼굴에 황당함의 웃음꽃이 피었다. 지금 나더러 찍사를 하라고? 찍사를 하라고 나더러 이 사막을 데리고 온 거냐? 저게 지금 왕자병에 걸렸……, ……왕자구나. 그래, 너 왕자지.

장석민이 한숨을 내쉬는 사이 자하르는 눈을 가린 매를 손에 얹은 채, 매사냥을 도우러 온 수행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기분을 풀어준다더니 저는 제일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누리고 있고 나에게는 카메라 하나를 던져주고 사진이나 찍으라니, 참으로 왕자님다운 생각이었다. 그래, 찍자, 찍어.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며 그런 자하르와 수행원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삼십 여분, 

비슷한 장면한 수십여 장을 찍어대니 금세 싫증을 느끼고 장석민은 카메라을 목에 건 채, 하릴없이 주변만 서성이고 있었다. 자하르는 매를 여러 차례 하늘로 날려 보냈다. 매는 빈손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고 작은 토끼나 새를 물어오기도 했다. 사냥감을 물어올 때마다 자하르는 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먹이를 물려주었다.

일견 다정해보이는 그 손길에 장석민은 저놈은 동물에게도 내숭을 부리는구나, 생각했다.

결국 나 빼고 다.잘해준다는 거군.

또 배알이 뒤틀렸다. 장석민은 일부러 자하르를 제외한 것들을 피사체로 두고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무작위로 카메라를 돌리다가 매를 속목에 얹은 채로 사막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는 자하르가 렌즈에 잡혔다.

 "……."

장석민른 말없이 렌즈 안을 들여다보았다..

자하르는 손을 올리자 매가 파드득, 소리를 내며 날개짓을 시작했다. 하늘로 날아오른 매는 금세 그 모습을 감추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렌즈를 통해 눈이 마주치자 머쓱함에 장석민은 카메라를 내렸다.

「안 도망가요?」

장석민이 매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 주인이 누군지 아는 새는 절대로 도망가지 않습니다.」

 「참 신기하네요. 나 같으면 그냥 그대로 튈 텐데.」

자하르가 두꺼운 가죽장갑의 위치를 바로잡으며 장석민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리 때부터 훈련을 시킵니다. 아무것도 먹이지 않은 다음 굶어 죽기 직전에 주인이 제 손으로 먹이를 먹입니다.」

 「…….」

 「그걸 여러 차례 반복하면, 매는 주인의 손으로 주는 먹이가 아니면 먹지 않게 됩니다. 결국 주인이 없으면 죽는 것이라 생각하는 거지요.」

 「……되게, 주인이 왠지 사기를, …….」

자하르가 왼손을 뻗었다. 그 위로 아까 날라갔던 매가 앞발에 작은 토끼가 들려 있었다. 자하르가 먹이 주머니에서 생닭을 꺼내 매에게 먹여주었다. 매가 먹이를 다 먹은 것을 확인한. 자하르는 케이스에 그 매를 도로 가두었다.

「어? 더 안 합니까?」

 「배가 부른 매는 절대로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부족함이 없어도 뭔가를 탐욕스럽게 원하는 것은 인간뿐입니다.」

장석민은 부리로 제 날개를 다듬고 있눈 매를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톡톡 케이지를 두드렸다. 매가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날개를 푸덕거렸다. 

「그러다 손가락 잘립니다.」

장민석이 헉, 하고 손을 뒤로 뺐다.

「묘하게 동물하게 반감을 사는 유형이군요, 쟝은.」

장석민은 그 말을 적극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에 두 어번 더 라이언을 혼자 보러 갔다가 머리카락을 씹혔던 경험이 있는 터다. 물론 자하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우리 집에서 예전에 개도 키웠었는데.」

무안함에 장석민은 멋쩍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개가 쟝을 따르던가요?」

 「……, 아니요.」

아버지가 키우던 산토리는 자하르의 말대로 묘하게 장석민에게만 사납게 굴었다. 

「쟝이 무신경하게 굴어서 그런 겁니다.」

 「네? 제가요? 내가?」

장석민이 손바닥을 가슴에 얹고 소리치듯 되물었다. 삶을 살아오면서 무신경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역사가 없었다. 늘 여자들의 기분을 살피고 그녀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야, 알게 뭐고.

자하르가 케이지에 손을 넣어 매의 부리 주변을 어루만져주었다. 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부리를 자하르의 손에 비벼댔다.

「본인이 좋을 대로 만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좋아하는 곳을 만져줘야 합니다.」

말은 잘하지, 그럴게 잘 알면서 어제는 내가 제발 그렇게 빌었는데, 그런 짓을, ……됐다.

장석민의 쳇, 하고 낮게 혀를 차며 등을 돌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카메라 렌즈로 앞늘 보며 걸어가자 등 뒤에서 자하르의 멀리 가지 마세요, 하는 외침이 들렸다.

「이 근처에 사막 말고 다른 게 있어요?」

모래 위만 걷다보니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좀 더 다른 풍경을 보고 싶었다.

「계곡이 있을 겁니다.」

 「계곡이요? 사막에 계곡이 있습니까?」

 「바다와 만나는 지점으로 가는 계곡이 있습니다. 서쪽입니다.」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다 이쪽이여? 하고 물었다.

「반대편입니다.」

장석민이 어색한 말투로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카메라에 눈을 댄 채, 자하르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었다. 처음 보는 사막의 광경에 셔터를 열심히 눌렀다. 나중에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고 했으니까, ……설마, 저 인간은 내가 자기 사진을 가지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것은 아니겠지.

장석민은 아닐 거야,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물소리가 들렸다. 사막에 무슨 물이가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입이 턱 벌어졌다. 백색의 기암괴석이 살아있는 것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오랜 세월 바람에 깎여 살아온 세월대로 바위에 나이테가 새겨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 마다 계속해서 소리가 울렸다. 백색의 짐승이 웅크리고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장석민은 바다와 사막이 만나는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런 걸 찍어야지."

장석민은 셔터를 눌렀다. 바람 소리와 물소리가 어우러져,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졌다. 장석민은 카메라를 내렸다. 이런 것은 눈으로 담자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른다운 대자연 앞에 서자, 이것저것 고민하던 것들이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말라쿤님.」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장석민은 고개를 돌렸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부르십니다.」

검은색 옷을 갖춰 입은 경호원이 고개를 숙였다. 장석민은 쩝, 입맛을 다시며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가면 이 아름다운 광경을 언제 볼 수 있으려나.

「빨리 오라고 전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장석민이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 뒤를 돌아보자 경호원이 그를 재촉했다 눈에 풍경을 가득 담고 나서 그는 경호원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카메라로 밤하늘을 찍으며 걷던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다가 눈을 치떴다. 

「저기요, 여기가 아니고 저쪽 아닌가요?」

분명히 저 큰바위가 올 때는 등 뒤로 있었으니, 저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

장석민의 물음에 경호원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본 장석민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날, 탑의 지하실에서 봤던 남자의 얼굴이다.

 "……!"

장석민은 뒷걸음질쳤다. 일단은 모르는 척해야 한다. 차분하게 말을 건네고, …….

「저기 다른 분들은, 어디에…….」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래언덕으로 둘러싸인 계곡의 안은 마치 요새와도 같았다. 대체 언제 이런 곳까지 따라 들어왔단 말인가. 후회해 봐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남자가 대답대신 주머니에 가느다란 금속 끈을 꺼내들었다. 장석민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남자가 달려들었다. 장석민은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모래 때문에 발이 빠져 몇 걸음 걷지 못해 넘어지고 말았다. 그 위로 남자가 몸을 날려 장석민을 짓눌렀다.

 "안 돼. 하지, 윽 ─. "

남자가 장석민의 목에 금속 줄을 감았다. 장석민은 남자가 줄을 조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손으로붙둘고 버텼다. 

 "자, ……자하……."

그의 이름을 미쳐 다 부르지도 못하고 목에 줄이 감겼다. 얇은 금속이 목을 조르는 감각이 날카롭게 숨통을 조였다. 장석민의 입에서 바람빠진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렸다.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머리로 산소가 공급되지 않았다. 둔해진 머리에 떠오르는 얼굴이라고는 자하르뿐이았다. 비스듬한 미소를 건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얼굴이……,인생이 끝날 때가 된 것이다. 죽기 전에 떠오르는 것이, 남자의 얼굴이라니.

발버둥 치던 장석민의 몸이 점점 힘을 잃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퍽, 하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장석민의 목 안으로 산소가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인식이 힘들었다. 기침이 터져 나왔다. 연거푸 기침을 하다가 장석민은 웩, 하면서 토악질을 시작했다. 목구멍을 타고 시큰한 액체가 쏟아졌다.

눈물이 범벅된 눈으로 옆을 바라보니 남자와 자하르가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장석민은 자하르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걸음 못 걷고, 휘청거리다 자리에 쓰러졌다.

「쟝!」

자하르가 소리쳤다. 장석민은 왜 그가 그렇게 다급한 소리로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

몸의 균형이 아래로 무너졌다. 멍한 머리로도 장석민은 어디론가 추락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움켜쥐었다. 두려움에 호흡이 가빠졌다. 머리에 점점 피가 돌기 시작했다. 다리 아래로 물소리가 들렸다. 장석민은 자신이 계곡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발아래로는 천 길 낭떠러지였다.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이런 높이에서 물로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기본적인 물리학지식을 갖춘 지식인으로서 잘 알고 있었다. 장석민은 위로 기어 올라가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발을 디디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바위를 잡으려고 손을 움직인 순간, 그의 몸이 주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물이끼로 바위가 너무 미끄러운 탓이었다. 한 팔로는 제 무게를 버티지 못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계곡 위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 뒤에 잠잠한 고요가 찾아왔다. 발소리가 이어졌다. 장석민은 알 수 있었다. 이 위로 나타날 얼굴에 따라 자신의 생사가 걸렸다는 것을.

제발, 제발, 제발 ─. 

「잠시도 눈을 못 떼겠군요.」

자하르였다. 장석민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의 얼굴이 이토록 잘생겨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나 반가워서 오늘 밤은 과감하게 체스를 져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하르 왕자님…….」

꾀죄죄한 얼굴로 자신을 열렬하게 환영하고 있는 장석민을 자하르는 잠시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예매한 미소를 띤 채로,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을 뻗었다. 

「왕자님, ……저 사람이…….」

 「고자질은 올라와서 하세요.」

자하르가 장석민의 팔을 붙들었다. 나머지 한 팔을 마저 올리려고 했을 때, 장석민은 자하르의 등 뒤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았다.

「왕자님!」

장석민이 외쳤을때 이미 남자는 자하르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난 후였다. 자하르가 반대 편 팔을 들어 방어하려 했지만, 묘하게 반응이 느렸다. 그의 팔 위로 칼이 그어졌다. 장석민의 얼굴에도 뜨끈한 피가 튀었다. 남자가 아랍어로 뭐라고 외치며 칼을 치켜들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놓지 않는 이상, 그는 승산이 없었다.

「손 놓으세요!」

자하르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는 손을 쥔 채로, 꿈쩍도 하지않았다. 남자의 칼이 이번에는 자하르의 팔뚝에 박혔다. 장석민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남자가 칼을 뽑았다. 번뜩이는 칼날이 자하르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대로라면 자하르도, 자신도 죽을 것이다. 

장석민의 머릿속에는 자하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장석민은 손에 힘을 주었다.

「 ─! 」

자하르의 몸리 장석민에게 기울어쟜다. 공중으로 몸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자하르의 눈에 의아함과 경악이 차올랐다. 

한참 뒤에 아래에서 풍덩, 하고 물을 가르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미치겠네, 씨발."

장석민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자하르의 몸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장석민은 입고 있던 옷을 찢어 자하르의 상처를 동여맸다. 다행히 출혈은 심하지 않았다. 몇 번 더 어깨를 흔들자 자하르가 눈을 떴다.

「괜찮아요? 정신 들어요?」

 「」

자하르가 눈을 찌푸리고는 주변을 둘러본다, 그의 몸짓을 이해한 장석민이 대답했다.

「계곡아래로 떨어져서 그 밑에 있는 동굴로, ……미안합니다. 나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자하르를 끌어안고 계곡 아래로 떨어진 장석민은 차가운 물속에 머리를 박는 순간, 내가 논개도 아닌데 이게 대체 무슨 고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끝내주는 생존본능이 발동했다. 어떻게든 살아나가야겠다는 마음에 정신을 잃은 자하르까지 끌고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물 밖으로 나오면서 몇 번이나 육성으로 시발 타령을 해야 했다. 사람은 원래 의식을 잃고 늘어지면 평소보다 몇 배나 더 무겁게 느껴지는데다, 두 사람 모두 물에 젖은 채였고, 허우적 거리느라 체력이 방전된 것까지 더해져, 한 걸음을 움기는데도 토기가 올라왔다.

무슨 정신으로 자하르를 욺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은 후, 장석민도 바닥에 누워 한참을 숨을 골랐다.

시간이 지나도 자하르가 정신을 차리지 않자, 장석민은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켜 그의 상처를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괜찮습니까?」

장석민이 자하르의 팔다리를 살피며 물었다.

「안 괜찮습니다.」

 「…….」

역시 이놈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방법을, 모르는게 분명하다고 장석민은 생각했다. 

자하르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낯빛이 썩 좋지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는 발목의 통증을 확인하고 다시 바닥에 앉았다.

「멀리 가지 말라는 말, 못 들었습니까?」

 「잠깐……. 계곡에 가려고,」

 「처음에 갔던 방향과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는 거 모르십니까.」

자하르의 싸늘한 말이 이어졌다.

「어떻게 사람이 잠시만 눈을 떼어도, ─. 」

통증이 올라오는지, 그가 이를 사리물었다.

「……그 사람이, 왕자님이 오라고 해서……, 」

 「같이 온 수행원의 얼굴은 기억해두셔야 합니다.」

 「다 비슷하게 생겨서……, ……죄송합니다.」

잔뜩 풀이 죽은 채로 사과를 건네는 장석민은 보면 자하르가 눈으로 함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미처 이런 상황을 계산하지 못한 제 탓도 있습니다.」

자하르는 기분이 좋지 않았더 지금 이곳운 잔나툰의 근처였다. 아니, 잔나툰 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경계 경비가 확실한 곳이었다. 이것이 두 번째 암살시도였다. 게다가 이번 것은, 자하르가 아닌 장석민을 죽이려 했다.

자하르는 자신이 갖고 있는 기구를 이용해 모든 왕자들의 움직임을 보고받고 있었다. 이전에 있었던 암살 사건 이후로는, 더 집중해서 그들을 살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그의 불쾌함을 더했다.

「죄송합니다.」

자하르의 사과에 장석민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죠.」

 「……아니, 왕자님이 절 죽일 거라고 생각……, 아닙니다.」

죽이지는 않아도 반쯤은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관대함을 베풀면, 삼 분의 일쯤.

「쟝은 제 궁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제가 보호해줘야 마땅합니다.」

담담한 말투에 장석민은 적잖이 놀랐다.

내가 알고 있는 자하르가 물에 빠지면서 바꿔치기 되었나.

「 ─그건, 그거고.」

자하르가 눈을 감았다 뜨자 회색 눈동자에 형형한 분노가 서린다.

「저 몰래 드시는 약이라도 있나요?」

 「네? 약이라니요, 없는데 그런건.」

 「그런데 거기서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행동입니까?」

 「그, …….」

남자가 칼을 들고 자하르의 목을 가르려 했기에 순간적으로 그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였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손을 놓지도 않으시고, 그 남자는 칼을 들고 있어서, …….……. 그래도 살았으니까.」

 「매번 요행이 따를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따끔한 충고에 장석민은 어깨를 움츠리고 알겠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자하르가 그의 불퉁한 표정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쟝은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제 손을 잦아당기실 테지요.」

 「네?」

 「표정이, 그렇습니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사실이긴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장석민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제가 그 남자를 제압하고 쟝을 살린다는 가능성은 머리에 없습니까?」

 「……, ……. 어깨가, …….」

장석민의 시선이 자하르의 왼쪽 어깨에 닿았다. 아까 지혈을 하기위해 옷을 벗기다 그의 어깨가 부어있음을 알아챘다. 황금상에서 떨어지던 자신을 잡아줄 때 부딪치며 다친 것 같았다. 자하르는 한 번도 어깨가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부상만 아니었더라면 자하르는 손쉽게 남자를 제압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장석민은 미안함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저랑 믿을 생각이 없군요.」

 「그게 아니라,…….」

 「알겠습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말을 단호다게 잘라냈다. 두 사람의 주변에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단단히 화가 났음을 눈치챘다.

고개를 떨군 채로 흠뻑 젖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는 장석민을 보던 자하르가 낮게 혀를 찼다.

「수행원들이 찾으러 내려올 겁니다.」

계곡을 보러 간다던 장석민이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을 때, 자하르는 잠시 가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었다.지금쯤이면 당연히 수색조가 편성되어 주변을 뒤지고 있을 것이다.

「혹시 핸드폰은 안 갖고 오셨어요?」

장석민의 물음에 자하르가 주머니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핸드폰을 꺼내주었다. 장석민이 전원버튼을 눌러보았지만 시커먼 화면은 바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장석민은 아타깝다는 듯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렸고 자하르는 눈을 감고 바위에 몸을 기댔다. 장석민이 몸을 웅크려 무릎을 끌어안았다.

「붙어요.」

체온이 떨어진 두 사람이 동굴에서 밤을 지새우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지만 장석민은 그의 옆으로 다가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어깨에 닿는 자하르의 손이 너무나 차가웠던 것이더.

장석민은 자하르의 옆으로 바싹 다가가 앉았다. 자하르의 손이 장석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어색한 침묵을 자하르의 낮은 목소리가 잘랐다.

「카메라는.」

 「네?」

 「카메라는 어디에 있나요.」

 「모르, ……아마 ,박살 났을 것 같은데요.」

남자가 쇠줄로 장석민의 목을 휘감았을 때 뭔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때 그것이 카메라의 유명을 달리하는 소리였을 거라고 장석민은 생각했다.

「안 됐군요.」

장석민은 혼란스러웠다. 자하르가 말한 저 안 된 대상이 카메라인지, 박살 난 카메라의 주인인 본인인지, 아니면 오늘 이 끔찍한 일을 겪고도 살아났지만 단지 자하르의 사진을 찍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게 될 장석민인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때문에 나오신 건가요?」

장석민의 물음에 자하르가 웃음을 삼켰다.

「그럼 뭣 때문에 바쁜 와중에 나왔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매사냥을 하러, …….」

「보통 매사냥은 비행기를 타고 사막을 건너갑니다. 가까운 곳에서는 훈련을 시키는 정도입니다.」

자하르의 대답을 듣자 장석민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정말로, 이 바쁜 와중에 자신에게 사진을 찍게 해주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을 나왔다는 얘기인가?

「……왜,…….」

머릿속에 떠도는 의문을 입 밖에 내어 물었다. 자하르가 눈썹을 휘며, 장석민을 바라보았다.

「왜 굳이, ……그렇게 저한테 …….」

장석민의 입술이 뻐끔뻐끔 움직였다. 자하르가 표정없이 장석민과 시선을 마주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사진 한 장 없어졌다고 우울해 하며 황금상에 기어 올라간, 나잇값도 못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뿐이었다.

그의 평연한 대꾸에 장석민의 얼굴이 일순, 붉어졌다. 자하르가 열이 오릅니까, 하고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아니요, ……아니. 괜찮습니다.」

장석민은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자하르의 손이 이마에서 멀어졌다. 장석민은 순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기척을 알아챈 자하르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었다. 장석민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정말이지.」

「……?」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군요. 쟝은.」

당연히 빛에 팔려 등 떠밀려온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손을 댈 때마다 흠칫흠칫 떨면서도 제 욕망을 채우는 일에는 묘하게 적극적이다. 순진한 것인지 가벼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만 해도, 사진 한 장에 세상이 끝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더니, 손을 댔다 떼니 보란 듯이 안도하는 기색이 비친다.

장석민의 그 종잡을 수 없는 부분이 자하르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벼랑 끝에서 자신을 올려다본 순간, 보여주었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내도록 장석민을 벼랑에 매달리게 하고 싶었다. 그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인지시켜, 자의에 의해 날아오게 하고 싶었다. 장석민을 손에 쥐고 있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고 초조했다. 마치 훈련받지 않은 매를 손등에 올려놓은 기분이었다.

「……제가, 그런가요?」

장석민이 물었다. 커다란 눈이 불안으로 그득했다.

「제가,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인가요?」

장석민은 확인하듯 물었다. 자하르가 고개를 돌리며 그렇습니다, 하고 대꾸했다. 장석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석민은 입안에서 종잡을 수 없다는 말을 되뇌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 돌이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오늘 밤이 지나면, 하일의 궁으로 쫓겨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마치 차인 것 같은, ……,남자에게 차일리가 없잖아. 애초에 연애감정이 없는데.

장석민은 손으로 연신 옷자락을 쥐었다 놓았다.

자하르의 반대편 손이 장석민의 손을 움켜쥐었다.놀란 장석민의 손을 빼내려 하자 우악스러운 힘이 제지했다.

「──한 번만 더.」

자하르의 목소리고 잇새로 이어졌다.

「손을 빼거나 몸을 피하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장석민이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하르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억지로 쥐고 있지 않으면,눈을 떼기만 해도 공중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장석민의 손을 쥔 채로,자하르는 눈을 감았다.계속 움켜쥐고 있어도 차가운 손끝에 온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장석민이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자하르의 눈치를 살폈다.

「죄송합니다.손이 너무 차가워서, …….」

「여전히 차갑군요.」

「……?」

「그날, 기억을 잃고 쓰러졌을 때.」

갑작스럽게 던져진 잊고 있었던 기억에, 장석민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하르가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어갔다.

「통증이 심해서 불구덩이 속에 처박힌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독 때문에 자하르는 열이 펄펄 끓어올랐다. 그를 업고 탑에서 기어 올라온 장석민은 자하르가 말하고 있는 불구덩이 속에 처박힌 느낌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날과 다름없이 초연한 태도였다.

「거의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불구덩이 속에서 언뜻언뜻, 제 몸을 스치던 손입니다.」

「…….」

「몹시 차가워서, 그 손이 옆에 있으면 몸이 타들어 가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자하르의 입가에 민틋한 웃음이 걸린다. 장석민은 자신이 자하르를 두고 도움을 청하려고 일어서자 그가 옷자락을 움켜쥐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서, ……어울리지 않게 그랬던 거구나.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그 손은 보이지 않더군요. 차가운 손을 가진 사람이 중요한 것을 목격해서 도움을 받기도 해야 하지만 나를 그대로 버리고 갔다는 생각에, ──참 괘씸한 마음이 들더군요.」

「……, 하하…….」

장석민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야말로 물에서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형국이구나.

「왜 안 나타나는 걸까요. 그분은.」

자하르가 제 손가락을 장석민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얽었다. 장석민은 식은땀을 흘리며 글쎄요, 하고 대꾸했다.

「뭘 보았는지 몰라도, 지금까지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을 봐서는 입이 무거우신 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하르가 은인을 찾는 이유는 그날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장석민은 그 목격의 대상이 '사건'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자하르는 '무엇을'보았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 '무엇'에는 사건과 자하르의 본모습도 포함되어 있을 것일 테지.

「……몹시 무거우신 분일 겁니다.」

장석민이 힘없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면 좋겠군요.」

그때 장석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그분이, ……뒤늦게, 나타나시면,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인 데다 자하르를 속이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여기서 고백성사를 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김에 오늘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남자가 그날 탑에서 봤던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사실도 귀띔해주고.

자하르가 글쎄요, 하고 감았던 눈을 뜬다. 날카로운 눈빛이 찬찬히 장석민의 얼굴을 내리훑었다. 겁을 먹은 듯한 눈동자를 보자, 자하르는 다시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비로 맞이해야죠.」

「네?!」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공표한 이상,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장석민은 어색하게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허허, 하고 웃었다. 이 인간이 제정신인가.

「……그분이 비가 되기 싫다고 하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후궁인데.」

「참으로,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그럴 수도 있을 걸요. 아마, …….」

「참으로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그렇게 된다면,──그건 그때 가서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지금 일부러 심술을 부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증거는 없는데 네놈이라는 심증은 가고, 그날 그러고 튀어버린 데다 비가 되기 싫다고 버팅기니, 괘씸죄가 적용된 것이다.

말하지 말자. 어차피 지금 얘기해도 아무런 소용없다.

장석민은 입을 다물고 이 비밀은 관까지 가져가리라 마음먹었다.

「아까, 그 사람…….」

그래도 이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누구요?」

「저를 공격하던 사람이요.」

자하르가 계속 말해보란 듯이 눈짓했다.

「저를 죽이려 한 걸까요.」

「처음에는 쟝을 죽이려 한 겁니다. 뒤늦게 저를 발견하고 저를 공격하긴 했습니다만.」

아니에요. 처음부터 그 사람은 왕자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장석민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그래도, 하고 말문을 열었다.

「왕자님도 죽이려고 한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조심하세요. 꼭 조심하셔야 합니다.」

거듭 같은 말을 반복하는 장석민을 바라보던 자하르의 눈빛에 슬쩍 웃음이 스쳤다.

「알겠습니다.」

「……아는 얼굴은 아니었죠?」

자하르가 말없이 웃었다.

「알고 있을 리가 없지요. 앞으로 쟝을 경호하는 인원을 세 배로 늘리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혼자 돌아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장석민은 우울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손으로 상처가 남은 목을 더듬었다.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다가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께름칙하고 무서웠다. 자하르는 항상 이런 기분으로 살아오고 있었던 것인가.

자하르는 언뜻, 입매를 찌푸렸다.

「목을 젖혀보세요.」

어두워서 장석민의 목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장석민이 뒤로 목을 젖히자 자하르의 표정이 한층 더 삭막해졌다.

「상처가 나을 틈이 없군요.」

이전에 테러범이 칼을 대어 생긴 상처가 이제야 막 희미해지던 중이었다. 그 위에 진한 줄이 하나 더 생기자 자하르는 못내 그것이 거슬렸다.

「괜찮습니다. 이런 건 침만 발라도 나을,──힉.」

목덜미에 닿는 뜨끈한 감촉에 장석민이 기겁하여 목을 움츠렸다.

「낫지 않는데요? 더 핥아야 하는 겁니까?」

자하르의 뻔뻔한 목소리에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궁으로 돌아가면 약을 발라드리지요.」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언제쯤, 찾아올까요?」

자하르를 등에 업고 걸을 수는 있겠지만 얼마 가지 못해 쓰러질 것이다. 밖에는 아직 암살범이 돌아다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곳에서 가만히 수행원들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임을 알면서도 장석민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곧, 찾으러 올 겁니다.」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자하르도 시간은 보장하지 못했다. 계곡 아래로 떨어진 데다 장석민이 깊숙한 곳으로 끌고 들어와 수색 작업에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장석민이 어깨를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게 자하르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예 장석민을 앞으로 끌어와 뒤에서 끌어안았다.

「괘, 괜찮습니다.」

「새파란 입술로 그런 얘기해 봐도 소용없습니다.」

실제로 몸이 으슬으슬 추웠던 터라 장석민은 반론을 더 펼치지 못했다. 한 팔로 어깨를 끌어안고 있을 때보다 분위기가 배로 어색했다. 등 뒤로 남자의 단단한 팔과 가슴이 여실히 닿아 느껴졌다. 장석민은 마른침을 연신 삼키며 자하르의 몸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무슨 이야기든 하자는 생각에 장석민은 입을 열었다.

「자하르 왕자님, …….」

「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빨리도 받는 군요. 그 인사.」

짓궃은 대답에 장석민은 휴,하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왕자님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인 건 확실합니다.」

「제가요?」

「잘해줬다가 쌀쌀맞았다가, 천박, ……솔직하셨다가」

재빨리 적절한 단어로 교체를 했지만 자하르의 귀에는 이미 천박이라는 글자가 들어갔다.

「천박하다──. 대나무 밭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아니요. 모국어가 아니라 실수한 겁니다. 단어가 헛나왔습니다.」

「저는 쟝이 가진 능력 중,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영어실력입니다.」

「…….」

「그런데, 쟝의 앞에서는 솔직해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작작 솔직해야지, 이 인간아."

「뭐라고 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하여튼, 참 다채로운……, …….」

장석민은 말을 맺지 못했다. 목덜미가 뜨끈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저는 그래도 제법, 쟝의 앞에서는 일관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아, 예. 일관. ……그렇죠. 일관되게, 막, …….」

엉덩이 부근에 닿는 단단한 감촉에 장석민의 머릿속은 뒤죽박죽 단어가 엉켜갔다. 단단하게 굳은 장석민의 어깨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자하르가 나직이 속삭였다.

「제 속직하고 천박한 심정은──, 이대로 쟝의 다리를 벌려 그 질척거리는 구멍안에 제 것을 꽂아 넣은 채로, 밤새 빼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장석민이 눈을 뜬 채로, 굳었다.

「그리고 보드랍고 탄력 있는 질 안에 단단하게 부푼 성기를 찔러 넣고 쳐올리는 겁니다. 제 성기를 꽉꽉 문 채로 놓아주지 않는 그 발긋하고 조그만 구멍에 제 정액을 가득 부어줄 겁니다. 가느다란 허벅지로 뜨끈한 정액이 흘러내리는 꼴을 꼭 보고 싶군요.」

자하르가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장석민의 어깨가 앞으로 움츠러들었다. 말로 귀가 범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꼼짝없이 여기서 당하겠구나. 장석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하르의 손이 장석민의 배를 바싹 끌어안았다. 그의 이마가 장석민의 어깨에 닿았다.

「──오늘은 그럴 수가 없겠군요.」

「네?」

「체스판을 두고 왔습니다.」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은 눈을 껌뻑거렸다. 섹스판이 아니고 방금 체스판이라고 말한 것 맞지?

「체스판이요?」

「억지로 하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어, ……, …….」

「그 말도 믿지 않았군요.」

그렇게 말하는 자하르의 목소리가 어딘지 씁쓸했다. 장석민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믿을게요. 믿습니다. 완전히, 믿…….」

바싹 끌어안긴 채였기에,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조각처럼 솟은 자하르의 코끝이 장석민의 코에 닿았다. 숨결이 느껴진다.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이 닿을 거리였다. 자하르의 입술이 멈칫, 하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장석민은 숨을 삼켰다. 추위 때문인지 머리까지 얼어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장 부근이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목덜미와 얼굴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자하르, 왕자님. 부탁드릴 게, …….」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극도로 긴장되었다. 자하르가 뭔가요, 하고 눈을 반쯤 내리깐 채로 물었다.

「제가, ──물러서도 좋을지, 허락을, ……」

허락permission이란 단어를 내뱉을 때도, 아슬아슬하게 입술이 스쳤다. 자하르가 입안에서 낮게 혀를 차는 기척이 들렸다.

「좋습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기까지 영겁의 시간이 흐른 기분이었다. 장석민은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자하르의 입술에 살짝 닿았던 부분이 전기가 오른 듯, 찌릿했다.

「대신.」

뒤따르는 단어가 장석민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체스를 둘 겁니다.」

「……,」

「좋은 승부가 되길 바랍니다.」

자하르의 신사적인 목소리가 등 뒤로 닿았다. 그에게 끌어 안겨진 채로 장석민은 밤새 머릿속으로 체스의 묘수를 떠올렸다.

수행원들이 그들을 찾아낸 것은 동이 터올 무렵이었다. 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체스를 두겠다는 자하르의 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긴급 국정회의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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