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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일메이트(STALEMATE)(외전) (35/35)

[우주토깽] 밤하늘을 나는 새- 외전-

스테일메이트(STALEMATE)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죄송해요."

장석민이 사과의 말을 건네자 하캄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오랜만에 이런 곳에 와서 좋습니다."

전용기를 타고 남국의 섬에 오게 되었을 때 자하르가 혹시 대하기 편한 시종이 있는지 물었다. 왜요? 리조트나 호텔 직원 있잖아요, 하고 묻는 장석민에게 자하르가 개인 소유 섬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아직 섬이 다 완공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심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개인시종을 데려가는 게 편할 거라는 말에 장석민은 주저 없이 하캄의 이름을 말했다. 그렇게 타르카를 나오고 나서 다시 만나고 싶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터다.

장석민은 하캄이 가져다 준 망고주스를 마시며 눈웃음을 지었따. 하캄도 옆에 앉아서 같이 음료를 마셨다.

"그나저나, 자하르 왕자님과 혼인은 언제 하실 생각입니까?"

장석민이 풉, 하고 주스를 뱉어냈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 아니면 혼인을 안 하신다고 선언을 하셔서 지금 잔나툰이 온통 울음바다입니다. 자신이 하신 말씀은 신의를 갖고 지키신다니 다들 자하르 왕자님답다고는 하지만, 나이마 비전하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장석민은 타르카가 안전해져도 절대로 거기에는 발을 들여놓지 말자고 다짐했다.

"결혼은, 아직,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장석민은 대충 둘러대고 주스를 쭉쭉 빨아마셨다. 체스판을 가지러 갔던 자하르가 저 멀리서 나타났다.

"무슨 얘기들을 나누고 계셨나요."

자하르가 다정히 웃는다. 장석민은 별 얘기 안했습니다, 하고 답했다.

하캄은 먼저 가보겠다며 음료 잔을 들고 일어섰다.

"하캄이 아니라 다른 시종을 골랐으면 안 데려왔을 겁니다."

"......"

왠지 일부러 고르라고 한 것 같은 분위기인데.

장석민은 빨대를 질겅질겅 씹으며 체스판 위에 말을 올려놓았다.

오랜만의 대국이라 장석민은 손가락을 우두둑, 풀면서 전의를 다졌다.

"마지막 판은 제가 이겼는데, 말입니다."

"그러셨죠."

"이번에도 제가 이겨야 하겠습니다."

장석민이 말을 움직이며 물었다.

"이렇게 자주 휴가 나오셔도 됩니까?"

자신이야 구정 휴가니까 상관없다지만 자하르는 몹시 바쁘다고 들었다. 오늘만해도 라겔이 투덜거리면서 노트북을 들고 여기저기 전화를 해대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본 것이다.

"안 됩니다. 당연히."

"....."

"안 되는데 온 겁니다."

자하르의 기다란 손가락이 폰을 쥐었다. 장석민은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모양을 눈으로 좇았다.

"뭘 걸 겁니까."

"네?"

"체스, 말입니다."

전에는 이기면 자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자는 사이니, ......젠장.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꼭 걸어야 합니까?"

"뭐든, 목적이 있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장석민은 흠, 하고 비숍을 왼쪽 대각선으로 움직였다.

사실 그는 지금 바라는 게 없었다. 4일의 금쪽같은 휴가를 남국의 아름다운섬으로 왔지, 음식은 맛있지, 개인 리조트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호사스럽지, 집으로 돌아갈 비행기 걱정도 안 해도 되지. ......오늘 밤이 좀 무섭긴하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며 그럼 횟수 제한을 제안할까, 하고 중얼거렸다.

"횟수 제한이요?"

"......너무 심하셔서, 저 그때도 엄청 고생했거든요."

자하르가 가고 난 뒤, 일을 해야 하는데 의자에 한 시간 이상 앉아있지를 못해 결국에는 급한 서류 작업을 마쳐야 했다.

"심하다고요?"

자하르가 의아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럼, 그게 적당하다고 보십니까?"

섹스를 좋아하는 장석민이 봐도 그건 정상인의 범주를 넘어서는 행위였다. 나중에는 나올 것이 없어서 드라이 오르가즘을 느끼는 경험까지 했다. 섹스를 하다 죽는 게 소원이라고 했던 농담이 얼마나 멍청한 발언이었는지 요 며칠 깨닫는 중이었다.

"저는, ------참고 있습니다."

"네??!"

"지금도 참으면서 쟝과 체스를 두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시군요."

장석민은 침중한 어투로 말하고는 말을 옮겼다. 대체 몇 번을 해야 그럼 너는 만족하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남자의 옆에서 목숨을 보전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가는 중이었다.

"다른 왕자님들은, 다들 잘 계신가요?"

"너무 많은데요."

장석민은 이름이 기억나는 대로 읊었다.

"나단, 카힌, 또...., 하마드?"

"나단 형님은 공식적으로 병이 도져서 요양 중이고 카힌 형님은 새로 드인 남자 후궁에 빠져서 정사 삼매경이고 하마드는 얼마 전에 테러에 휘말려서 한 팔을 잃었습니다."

무서운 이야기를 매우 담담하게 서술했다. 장석민이 힘없이 웃으며 그렇군요, 하고 대꾸했다. 그러다 하일은요? 하고 물었다.

"하일 형님은 요즘 저를 결혼시키기 위해 동분서주입니다."

"......결혼, 이요?"

"이전에 약혼했었던 여자가 있었는데 돌아온 모양입니다."

이전에 약혼했던 여자, 라는 부분에서 장석민은 들고 있던 폰을 놓쳤다. 자하르가 한 손을 ㅗ폰을 받아 도로 장석민에게 쥐여 주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결혼은 제 은인과 하겠다고 선언을 해둔상태입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요."

"...... ......그 은인은 하겟다고 하던가요."

"그럼 안 한답니까?"

자하르의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장석민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체스판의 수를 읽는 척했다.

"저기, 그......, 이전의 약혼자분은, ...... 어떻게......"

자신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단초가 살레하라는 이름이었다.

장석민이 조심스럽게 물어오자 자하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뭐, 또 어디론가 보내든가 하죠."

"어디론가, 뭘, ......잠시만요. 또?!"

"다루기 쉬운 여자라 적당히 부추기면 한동안 어디로든 떠날 겁니다. 안 두실 겁니까?"

자하르가 장석민의 다음 수를 재촉했다. 장석민의 머리에는 체스 따위 잊힌 지 오래다.

"지금 무슨 말을, 그러면 그때 살레하 공주님이 사라진 게, ......자하르 왕자님이 뒷공작을, ......"

"그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자하르의 눈이 서늘하게 굳었다. 장석민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온것이 그의 심기를 긁은 것이다.

"...... ...... ...... 하하. ......하하하하."

장석민이 얼빠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그간 그 고생을 한 것이 내가 잘못해서 그런게 아니라, 다 저 이중인격자 때문이었단 말인가?

"왜 그러시죠?"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자하르가 나직하게 혀를 찬 뒤에 몸을 굽혔다. 입술이 가볍게 맞물린 다음 쪽, 하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뭐, ......!"

장석민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이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제가 쟝의 입에 넣고 싶은 것은 다른 겁니다. 이 정도로 넘어가는 걸 다행으로 아세요."

"......하하, ......"

장석민은 힘없이 웃었따. 이 무슨 해괴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결국엔 나는 저 인간이 저지른 짓을 사죄하러 끌려가서, 저놈의 후궁이 되었다는 거지?

"굳이 체스를 할 필요 없이 제 마음대로 쟝을 다뤄도 좋은 거라면,......지금 들어가도 됩니다."

장석민이 눈에 불을 켜고 묘수를 찾아내어 나이트를 옮겼다. 오늘만큼은 반드시 자하르를 이기고 말겠다고 장석민은 전의를 불태웠다.

"이기는 사람 마음대로 하는 거죠?"

"예."

"왕자님, 나중에 다른 얘기 하시면 안 됩니다."

자하르가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석민은 자하르를 곤란하게 할 방법과 묘수를 같이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때 라겔이 찾아와 자하르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자하르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일어섰다.

"잠시 통화좀 하고 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그가 자리를 떠난다고 말을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장석민에게는 그다음 수까지 생각해둘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니 상관없었다. 자하르가 자리를 떠난 뒤, 장석민은 팔짱을 끼고 끙끙거리며 고심을 했따.

얼음을 가져다주러 온 하캄이 그 모습을 보며 지그시 웃었따.

"체스를 두시나요?"

"네."

"자하르 왕자님이 어릴 때부터 알페즈 선생님과 자주 체스를 두곤 하셨죠."

이전의 기억들이 떠오르는지 하캄의 눈주름이 깊어졌따. 그가 웃으면서 장석민에게 말을 건넸다.

"왕자님이 잘 가르쳐주십니까?"

"네? 왜 가르쳐줘요? 같이 대국하는 건데?"

"대국이요? -------흐음."

하캄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낀 장석민이 왜요, 하고 물었따.

"제가 자하르 왕자님 하고 대국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혹시 신분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앞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다.

"알페즈 선생님은 그랜드 마스터셨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배운 자하르의 실력도 보통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석민은 자신이 좀 더 집중을 한다면 호각을 겨룰 수 있다고 믿었다.

"......나중에, 알페즈 선생님도 자하르 왕자님께 한 수 접고 들어가셨습니다."

"잠깐, 알페즈 선생님은 그랜드 마스터잖아요. 어떻게 자하르 왕자님이 그분을  이깁니까? 말도 안 되잖아요!"

그랜드 마스터는 전 세계에 천 명가량 되는 최상위의 플레이어 등급이었다. 그런 사람을 자하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분명 그 선생이라는 작자가 왕자니까 져준 게 분명하다고 장석민은 생각했다.

"자하르 왕자님은 선수 등록을 안 하신 것뿐입니다. 그럴 시간이 없으셨던 거지만. 저기 오시니까, 자세히 물어보세요."

통화를 마친 자하르가 멀리서 걸어왔다. 아름다운 조각상에 달콤한 초콜릿을 부어놓은 듯한 몸이었다. 빌어먹을, 저 사기꾼을 또 무심코 멋있다고 생각하다니.

"다음 수는 생각해두셨습니까?"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장석민의 형형한 눈빛에 자하르가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지그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페즈 선생님은 그랜드 마스터인데, ......왕자님이 이기는 건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자하르가 그렇지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이럴 줄 알았어! 알페즈 선생님도 참. 하하하! 아무리 제자가 왕자라도 그렇지. 명색이 그랜드 마스터가 일부러 져주기나 하고.

"알페즈 선생님도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죠. 어떻게 본인이 지는건지 모르겠다고. ---음. 그 폰을 움직일 겁니까?"

자하르가 장석민의 시선이 닿지도 않은 폰을 가리키며 물었다. 사실, 그가 오기전에 끝내주는 묘수라고 앞으로의 다섯 수까지 모두 계산해놓은 터였다. 그중 첫 번째가 폰의 전진이었다.

"......"

장석민이 참담한 시선으로 체스판을 노려보았다.

"시간이 더 필요하신 건가요? 그럼 얼마든지 기다려드리지요."

자하르가 팔짱을 끼고 물러서는 모습에, 장석민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랜드 마스터도 꼼짝 못하는 상대와 대국을 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사기잖아요! 이건!"

장석민이 한 손을 ㅗ체스판을 쳐냈다.

"명백한 사기입니다. 그랜드 마스터 윗등급 사람이랑 내가 어떻게 체스를....."

자하르가 얼어붙은 눈으로 장석민을 노려보았다. 장석민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오랜만이다. 이런 모드.

"쟝."

"...... ......네."

"체스판을 엎는 것은 어린애도 하지 않을 비신사적인 행위입니다."

"......죄송합니다. 주워올게요."

장석민은 바닥에 떨어진 말을 하나씩 주워서 다시 체스판에 올리기 시작했따. 쭉 뻗은 팔다리가 움직이는 모습을, 자하르가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 킹이 하나, 어디에......"

흑의 킹이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을 발견한 장석민은 자하르가 말릴 틈도 없이 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침없이 물살을 가르고 수영을 해서 킹을 건져온 장석민이 밖으로 나오며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제가 왕을 구해왔습니다!"

일부러 썰렁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한 농담이었따. 자하르가 그렇게 눈으로 쏘아볼 줄 알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농담.

"......"

장석민은 우물쭈물하면서 킹을 체스판에 도로 올려놓았다. 체스판을 엎기 전의 형국 그대로 만들어둔 것이다.

"왕자님, 저기......"

이제 다시 체스를 두자는 말을 하려던 장석민은 아까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어디를 훓고 있는지 알아챘다. 물에 젖은 아랫도리에서 물기가 다리를 타고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저놈이, 왜 지금 거기를, ......

"쟝."

달콤한 부름이었다. 장석민을 뒷걸음질치고 싶게 만드는.

"이번 판은 저의 승리입니다."

"무슨, 아직 몇 수 두지도 않았는데......!"

"쟝의 다섯 번째 수에서 승패가 결정되었습니다."

자하르의 팔이 소름이 돋은 장석민의 팔뚝을 쓸어내렸다. 한층 더 소름이 돋아났다.

"그러니, ---무의미한 체스놀음은 그만하고 이제부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도록 합니다."

팔을 쥔 자하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장석민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휴가는, 이제 끝났다고.

"입을 벌리세요."

축 늘어진 채로 입술을 벌리자 차가운 얼음이 들어온다. 격렬한 성교뒤에 늘어진 장석민이 물을 마시는 대신 얼음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고난 후 그게 제법 마음에 드는지, 자하르는 그 뒤로도 항상 장석민의 입에 얼음을 넣어 주었다.

"드시고 싶은 건 없습니까?"

"......얼음이나 주세요"

자하르의 웃음이 등 위에 닿았다. 커다란 자쿠지 안에서 장석민을 끌어안은 채로 앉아, 자하르는 여유로운 반신욕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반신욕을 하기 전에 다른 행위도 그 안에서 충분히 벌인 상태였다.

남자 둘이 자쿠지 않에 있는 게 민망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하르가 뒤에서 자신의 목덜미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는 것이 마음에 들어, 장석민은 말없이 그에게 몸을 맡긴 채 늘어져 있었다.

"여기에 점이 있군요."

자하르가 장석민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네. 그렇다고들 하더라고요."

"-------."

"왜요?"

장석민의 무신경함에 자하르는 할 말을 잊을 때가 종종 있다. 바로 지금 같은 경우.

그랬다고도 아니고 드렇다고들, 인 것이다.

자하르의 손이 장석민의 아래를 헤집었다. 장석민이 힉, 하고 몸을 웅크렸다. 잔뜩 부어있는 입구를 손가락으로 벌리며 자하르가 은근히 속삭였다.

"여기가 맛있다는 얘기는 누가 안 해주던가요?"

"아, ......당연히 누가 그런 얘기를, ......"

장석민의 몸이 움칫, 튀어 오른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단단히 끌어안고 그의 어꺠에 얼굴을 묻었따.

"그런 얘기를 혹시라도 누군가 하거든 저에게 꼭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까."

"......없어요. 이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계속......"

고개를 돌려 말을 이으려던 장석민은 뒤에 이어질 말을 잊었다. 자하르의 얼굴이 아슬아슬하게 닿아있다. 장석민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는 어물어물 고개를 돌렸다.

"쟝은, ---."

자하르가 그런 장석민의 턱을 쥐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나직이 속삭였다.

"창부처럼 굴다가도 그렇게 얼뜨기 같은 소년처럼 굴 때가 종종 있단말입니다."

"내가 언, ......!"

자하르가 혀로 장석민의 뺨을 핧았다. 맛을 음미하듯이 느릿하게. 

"그런 점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의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 귓불, 심지어는 어깨 부근까지 피가 몰렸다.

사, 사랑, 사랑스럽, 그런, ...... 그렇군요,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장석민은 욕조 안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한참을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담한 뺨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진다. 자하르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것을 좇는다.

"왕자님은 그럼 저를 사, ......사, ......"

혀에 문제라도 생긴 사람처럼 장석민은 발음을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가 다문다. 

"사랑하냐고요?"

"......! ...... ......"

자하르가 평연하게 대신 물어주자 장석민은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리가요."

"...... ...... ......"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딱 잘라 대답할 것까진 없잖아. 황금 같은 구정의 4일 연휴를 가족들의 온갖 욕을 배불리 처먹고 이곳까지 날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우울한 낯빛을 하고 장석민은 입을 다물었다.

투정 같은 한마디가 덧붙은 것은 집으로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음성 메시지 17개를 받은 것에 대한, 자그만 복수였다.

"그런 생각은 들더군요."

자하르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수가 빤히 보이는 체스를 두면서 내가 뭘 하고 있는거지, 하는."

장석민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지금의 4일을 빼기 위해 한 달간 침대에 제대로 누워 잠을 청한 적이 없습니다. 돌아간다면 당분간은 그런 나날이 지속될 겁니다. -----그런데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

"이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짓된 가식도 없는, 평연하고 시시한 그 한마디에 장석민은 마음속의 불안이 툭, 풀어진 느낌이었다. 

사실, 이곳으로 오면서도 이 관계에 대한 의심은 끊이지 않았다. 자하르는 일국의 왕자고 자신은 평범한 청년이다. 떨어져 있는 시간도 길었다. 남자든 여자든 상대를 가리지 않는 자하르를 떠올리면, 밥을 먹다가도 마음이 묵직해 소화가 되지 않았다.

"...... 왕자님은, ......" 

장석민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외에는 다른 사람과, ......"

그가 무엇을 물으려는지 눈치챈 자하르가 뒷말을 이어준다.

"수절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자하르가 믿지 않으시는군요, 하고 비스듬히 웃는다. 그가 장석민을 바투 끌어안고 속삭였다.

"매번 만날 때마다 제 정액이 얼마나 진해져 있는지 목구멍 끝까지 먹여드리는데, ----모자라셨습니까?"

"아, 아니요."

장석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하르의 눈이 흉흉해지는 것을 느낀그는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이전에 워낙 난잡하셔서 아니...... 그러니까 자유로운 성생활을, ......"

장석민은 혀를 질근 깨물었다.

"난잡하다, 라."

자하르가 장석민의 말을 입안에서 되새기며 눈을 가늘게 뜬다.

"그래요. 난잡한 성생활, 좋지요."

자하르가 손가락으로 장석민의 뺨을 톡톡 두드린다.

"그걸 참고 있는 겁니다."

"----."

"그러니 앞으로도 난잡한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왠지 자신의 무덤을 파고 누워 땟장까지 덮은 느낌이었지만 장석민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달부터 해외지사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겁니다."

"다음 달이요?"

"제가 워낙 난잡해서 참기가 어려워서 말입니다."

"......"

"---점점 참기 어려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끌어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었다. 이 밤이 지나면, 한동안은 만나기가 힘든 것이다. 장석민은 그의 팔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소늘 얹었다. 손가락을 톡톡, 두 번 두드렸다.

"저도 이대로, 괜찮다는 생각이......드는데요."

장석민이 누구의 흉내를 내고 있는지, 모를 리 없다. 자하르가 짧은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래요, 괜찮습니다, 그럭저럭. 나직한 목소리가 장석민을 끌어안는다. 장석민은 몸을 뒤로 젖혔다. 따스한 온기가 등에 닿았다. 눈을 감으니 새카만 밤이 몰려왔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새도, 잠시 내려앉아 눈을 감을 만큼, 까만 밤이었다.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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