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안 아파. 좀 피곤해서 그래.”
“그럼 방에서 쉬어. 오늘은 일요일이라 수업이 없으니까 쉬어도 돼.”
“그래?”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매일 수업을 해. 아침 아홉 시부터 열두 시까지, 한 시부터 세 시까지.”
맙소사, 주6일제의 세상이다. 새틴은 기겁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팀은 일주일 중 6일이나 공부를 한다는 사실이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근데 새틴은 오전엔 쉬어도 돼.”
“왜?”
“새틴은 다 배운 내용이랬는데…….”
말을 하다 말고 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다 까먹었을까?”
“글쎄, 모르겠네. 들어 봐야 알겠는걸.”
학교 안내를 마친 팀은 뜰에서 다른 아이들과 놀기로 했다며 나가고, 새틴은 2층으로 올라갔다. 아까 제 침실에 잠깐 들르긴 했으나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2층은 조용했다. 복도를 지나는 내내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모두 밖에 있을까. 문만 열어 봤던 서고에서 인기척을 느꼈는데 몇 명은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잠금장치가 없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야말로 기숙사처럼 생긴 방이었다.
침대가 둘, 옷장이 둘, 책상이 둘, 의자가 둘. 어느 쪽이 제 것일까.
새틴은 잠깐 고민하다 왼쪽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ㅇㅇ도 정리를 잘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새틴이 자리를 고르기가 무섭게 들어온 케인이 인상을 썼다.
“왜 남의 침대에 앉아 있어?”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짜증을 내는 말투였다. 새틴은 냉큼 일어나 맞은편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구겨진 이불의 꼴을 보니 아무래도 원래의 새틴은 ㅇㅇ와 상당히 성격이 다른 듯했다.
“털북숭이가 주라고 했어.”
케인은 가지고 들어온 접시를 새틴의 책상에 올려놨다. 샌드위치가 담겨 있었다.
“어, 고마워.”
고맙다는 인사에 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새틴과 그리 사이가 좋진 않았던 모양이다.
새틴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슬쩍 케인을 관찰했다.
‘누나는 왜 주인공 말고 악역을 제일 아낀 거지.’
이미 새틴이 된 이상 어찌할 방도가 없긴 하나 좀 궁금했다. 보통은 주인공을 제일 아끼지 않나. 독자야 취향의 인물을 좋아하게 되지만, 작가는 애초에 좋아하는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 텐데.
아무튼 지금은 누나의 취향이 아니라 앞으로의 전개 방향이 문제다. 2부와 3부는 대충 스포일러로만 봤지만 1부는 다 읽었다.
‘1부 내용대로면 쟤가 날 죽인다는 건데.’
1부의 시작은 케인이 스무 살이 되는 해다. 그리고 케인이 악랄한 흑마법사에게 잡혀 위기를 겪었을 때가 열여섯 살 때라고 했다.
‘해를 넘기도록 붙잡혀 있었단 얘긴 없었으니 지금 열여섯 살이라고 보면 되겠지.’
그렇다면 새틴의 여생이 길지 않았다. 앞으로 4년. 어쩌면 4년보다 짧을 수도 있고.
‘진행을 따라가는 편이 좋겠지?’
다크에이지의 내용을 몰랐다면 모를까 아는데 무시할 수는 없었다. 누나가 쓴 명작이 아닌가. 물론 섣부른 판단 탓에 끝까지 읽진 않았지만.
‘4년이면 길지.’
고졸이 대졸이 되는 시간이다. 원래도 ㅇㅇ는 천수를 누리고 싶다는 꿈이 없었다. 어차피 누나도 없는데 길게 살아 무엇 할까. 누나의 명작을 완성할 부품의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보람 있는 삶이다.
소설에서 케인은 흑마법사를 혐오했지만 새틴은 흑마법사의 복수를 하러 나선다. 즉, 둘은 대척점에 있는 관계다.
‘그렇다면 사이좋게 지낼 필요는 없겠네.’
오히려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 편이 케인에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새틴의 생각을 읽었을 리도 없는데 케인이 짜증을 냈다.
“기분 나쁘게 왜 남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는 거야?”
케인도 새틴과 별로 사이좋게 지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새틴은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접시를 챙겨 방을 나왔다.
“새틴, 기억을 잃었다는 게 사실이야?”
마침 계단 쪽에서 오던 여자애가 새틴을 발견하고 겅중겅중 뛰어오더니 물었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팀에게 들었으려니 싶어 새틴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 그래서 그런데 넌 이름이 뭐니?”
“나는 헤더. 그럼 이제 새틴도 우리랑 같이 아침에 수업 듣는 거야?”
헤더는 팀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그러나 반말이 스스럼없다. 이 세계는 서구적인 친구 관계가 보편적인 모양이다.
새틴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일단 대꾸했다.
“으음, 그럴 수도 있고.”
“케인하고는 얘기했어?”
“대충?”
아이들의 수가 많지 않아서인지 누가 누구와 함께 방을 쓰는지도 훤한가 보다.
헤더는 묘한 표정이 되어선 말했다.
“둘이 별로 사이 안 좋았는데.”
“그래?”
“기억 상실이라고 얘기했어?”
“아니, 얘기할 분위기가 아니더라고.”
“케인은 선생님을 별로 안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새틴은 머리를 굴렸다.
헤더는 케인이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새틴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양 말한다. 케인과 달리 새틴은 선생님을 좋아했거나 혹은 선생님과 가까웠다고 이해해도 될까.
그렇다면 새틴은 왜 지하 반성실에 있었을까.
“헤더, 혹시 내가 왜 반성실에 있었는지 알아?”
“반성실?”
“지하에 있는 방 말이야.”
“아, 참회실?”
참회나 반성이나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헤더는 대수롭잖은 이야기하듯 이어 말했다.
“내가 듣기론 새틴이 선생님 말씀을 안 들었대. 원래 새틴이 선생님 연구를 자주 도와드렸거든.”
연구를 도와주던 중에 말을 안 들었다는 뜻일까. 지시를 거부하기라도 했나.
새틴이 고개를 갸웃하자 헤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잘 몰라. 선생님의 연구에 관해 아는 사람은 너뿐이었어.”
∞ ∞ ∞
부엌에 들러 접시를 반납하며 보니 “과연.”이란 말이 저절로 나왔다.
요리사 루퍼스는 수염이 아주 덥수룩할 뿐 아니라 손등이며 팔에도 털이 부숭부숭했다. 털북숭이라는 별명이 그야말로 딱 어울렸다.
“반성은 했냐?”
원래도 새틴과 허물없이 지냈는지 루퍼스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씩 웃으며 물었다.
새틴은 멋쩍게 웃으며 부엌 입구의 의자에 앉았다. 루퍼스의 휴식용 의자인 듯한데 지금 루퍼스는 솥에 광을 내는 중이라 비어 있었다.
“제가 뭘 하다 참회실에 들어갔는지 아세요?”
“애들이 하는 얘기는 들었지.”
“뭐라던가요?”
“영감탱이 말을 안 들어서 벌을 받은 거라던데.”
새틴은 턱을 문질렀다. 무슨 말을 어떻게 안 들었기에 그런 벌을 줬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를 참회실에 가둘 정도면 영감탱이가 어지간히 화가 났던 모양이지.”
루퍼스 역시 헤더와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선생님과 새틴의 관계가 좋았다고.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랬던 거냐?”
“그러게요, 저도 그게 알고 싶네요.”
“네 일인데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기억이 안 나요.”
“뭐?”
솥을 든 채 루퍼스가 눈을 끔벅였다. 덩치는 그리 크지 않은데 팔뚝만은 아주 우람했다. 한 대 맞으면 뼈 하나는 우습게 부러질 성싶다. 새틴은 쫄지 않은 척 팔짱을 끼며 눈을 돌렸다.
“애들한테 이 얘긴 못 들으셨나 보네요.”
“무슨 농담이야, 그게? 요즘 애들 농담인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예요. 참회실 침대에서 눈을 떴는데,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더라고요. 제 이름도 모르겠고…….”
슬쩍 말꼬리를 늘이며 루퍼스의 표정을 살폈다. 황당한지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선생님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왤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말했을 때 선생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새틴의 얼굴을 살폈다. 꼭 거짓말을 잡아내려는 사람처럼.
반면 루퍼스는 새틴의 말이 진짠지 아닌지 굳이 가늠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황당하고 놀란 기색이다.
새틴은 멋쩍은 체 웃었다.
“황당하죠. 저도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네요.”
실제로도 좀 멋쩍었다. 기억 상실이라니, 컨셉병 같지 않은가.
루퍼스의 표정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좀 진정이 되었는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영감탱이하고 엉뚱한 연구 하다 그렇게 된 거 아니야?”
“글쎄요.”
“어디 다친 덴 없어? 머리를 잘못 부딪치면 기억력이 나빠진단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모르죠. 저야 어제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모르니.”
“하여간 마법사들이란.”
“저도 마법사였어요?”
“아니, 너는…….”
대답을 하려다 말고 루퍼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을 쓰는 건 본 적이 없지만 자질이 있단 얘긴 들었어. 그러니 영감탱이가 널 계속 데리고 있던 게 아니겠냐.”
“그렇구나.”
“그나저나 기억을 다 잃었으면 주의 사항도 모르겠네.”
“주의 사항이요? 학교 안내는 팀한테 받았는데…….”
새틴이 세탁실과 목욕탕 이용 규칙 따위를 떠올리고 있으니 루퍼스가 작게 혀를 찼다.
“숲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 말이야.”
“숲이요?”
“길을 벗어나는 순간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해야 해. 깊은 숲들은 사람을 삼키는 법이거든.”
진짜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새틴이 뭐라 반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루퍼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쫄았냐.”
“농담이었어요?”
“농담이긴 한데 위험한 건 사실이니까 숲엔 들어가지 마.”
“네에.”
“영감탱이는 왜 이런 데다 학교를 지었나 몰라. 감옥도 아니고 말이야.”
새틴은 루퍼스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다가 부엌을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갈까 잠깐 생각하다 서고를 골랐다. 마침 부엌에서 가깝다.
‘서고는 증축해서 만들었다고 했지.’
그래서인지 서고의 위치는 다소 뜬금없었다. 식당과 부엌이 있는 동쪽 복도 끝에 위치했다. 반대쪽 복도 끝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 별수 없이 이쪽에 만들었을 거라고 새틴은 추측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간 서고에서는 희미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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