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쉬는 날 구태여 서고에 왔다는 건 그만큼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는 뜻이겠지. 새틴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여 책꽂이 사이를 돌아다녔다.
“새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보던 아이 하나가 새틴을 발견했다.
“안녕.”
새틴은 살짝 웃으며 인사하고 그 옆에 앉았다. 아이를 대하는 법은 잘 모르지만 친절하면 될 것이다.
아이는 기껏해야 열다섯쯤 되어 보였다. 어쩌면 더 어릴 수도 있고. 키만 껑충하게 자란 열두 살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물었다.
“책 보러 왔어?”
“그건 아니고, 좀 알고 싶은 게 있어서.”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태도를 보아하니 새틴이 기억 상실이라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한 기색이다. 바깥에서 노는 아이들끼리만 정보를 나눴는지.
새틴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자연스러울지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참회실에 들어갔다는 얘기는 들었어?”
“응, 오늘 아침에 팀한테 들었어.”
별 의심 없이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고에서 노는 아이와 바깥에서 노는 아이들 사이에 파벌이 있진 않은 모양이다.
“왜 들어갔는지도 들었어?”
“그건 몰라. 선생님을 엄청 화나게 한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겠어. 사실은 내가 기억이 잘 안 나.”
새틴의 말에 아이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이야?”
“뭔가 잘못된 모양이야. 예전 기억이 안 나는데 혹시 뭘 아는 사람이 있나 해서 찾아다니는 중이거든.”
“예전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무슨 말이야? 나도 기억 안 나?”
“사실은, 응.”
아이가 입을 떡 벌렸다. 팔다리는 길쭉한데 얼굴은 동그란 빵 같다.
“내 이름, 로저스잖아…….”
진짜 기억이 안 나냐며 고개를 들이대는 로저스에게 새틴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반면 로저스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추측한다.
“선생님하고 마법 연구를 하다가 그렇게 됐을지도 몰라. 위험한 마법을 쓰다가 머리를 다쳤다거나…….”
루퍼스와 같은 의견이다. 아무래도 새틴이 선생님의 연구에 참여하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 듯하다.
“혹시 무슨 연구를 하는지는 얘기한 적 없어?”
새틴의 물음에 로저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멈칫했다.
“뭐 생각나는 거라도 있어?”
“전에 새틴이 그랬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얘기였는데, 연구에 대한 얘기였을까.”
“안 풀린다고?”
“그때 매기 때문에 학교 분위기가 안 좋았는데 그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매기?
새틴이 의문을 표하기 전에 로저스는 말꼬리를 흐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새틴은 더 묻지 않았다. 모른다는 사람을 계속 물고 늘어져 봐야 인상만 나빠질 뿐이다. 새틴은 친절해 보이고 싶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어서 많이 불안하거든.”
다행히 친절해 보인 모양이다. 새틴의 인사에 로저스는 약간 쑥스러워했다. 이제 책을 읽어야 하니 가 보라며 새틴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티 나게 여러 아이에게 캐묻고 다니면 이상해 보일까 봐 일단 새틴은 서고를 나왔다.
루퍼스가 일하는 부엌과 텅 빈 식당을 지나 서쪽 복도로 향했다. 교실이 하나 있고 맞은편엔 세면장과 목욕탕, 세탁실 따위가 있다. 학생이 열둘밖에 안 되니 교실 하나로도 충분한 걸까.
새틴은 마지막으로 다닌 학교의 모습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졸업장은 검정고시로 딴 터라 학교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교실이 아주 많았는데.’
학년마다 학급이 일곱 개 있고, 음악실, 미술실, 시청각실, 과학실……. 용도별로 나뉜 여러 교실들이 있었다. 학생 수가 계속 줄고 있다고 하니 지금은 그때보다 교실 수가 적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절과 비교하면 교실 하나는 역시 부족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아이들의 나이도 제각각 아닌가. 새틴만 해도 열여덟 살이다. 팀이나 헤더처럼 어린아이들과 같은 수업을 듣긴 좀.
‘아니, 여긴 의무 교육이 없으니까 다르려나?’
한국에서도 아이들이 연령에 맞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100년도 채 안 되었다.
이 세계가 18세기나 19세기쯤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면 의외로 평범한 교육 방식일지도 모른다. 배움 자체가 축복일 테니.
일단 새틴은 바깥에서 노는 아이들을 찾으러 현관을 나섰다. 학교 부지를 빽빽하게 둘러싼 나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밤에 들어가기 겁날 거 같긴 하네.’
어두울 땐 열 걸음도 가지 못하고 길을 잃을 성싶었다. 길이 하나 있긴 하나 상당히 거칠다. 사람이나 교통수단이 자주 오가는 길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왜 이런 데다 학교를 세웠을까. 보기에 목가적이긴 하다만.
풍경을 살피며 새틴은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새틴, 기억 상실이라는 게 진짜야?”
너덧 명의 아이들이 커다란 나무 주변에서 놀고 있었다. 굵은 나뭇가지에 누가 그네를 묶어 놓았는데 방금 새틴을 부른 아이가 마침 그네에 앉아 있었다. 뒤에서 그네를 밀어 주던 팀이 툴툴거렸다.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진짜야?”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새틴의 주위를 둘러쌌다. 다들 어려서인지 걱정보다는 그저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듯 호기심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새틴이 어어, 하며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자 팀이 볼멘소리를 했다.
“새틴, 빨리 진짜라고 알려 줘.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안다니까.”
“응, 진짜야.”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새틴은 지금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완전 바보라고.”
기억이 없는 거지 바보는 아닌데.
새틴은 약간 떨떠름해졌지만 무어라 반박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그냥 웃었다. 아이들 말에 진지하게 반박해 봐야 불편한 어른으로 보이겠지.
새틴이 동의했다 생각하는지 팀은 우쭐거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아무튼 다들 기억 상실이라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쉽다.
“얘들아, 혹시 어제 내가 어쩌다 참회실에 갔는지 아니?”
아이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아느냐고 묻고 대답했다. 한 아이가 대표로 대답했다.
“몰라. 하지만 새틴이 잘못했겠지.”
“왜?”
“선생님이 그런 벌을 줄 정도니까…….”
아이들끼리 눈을 마주치며 맞아, 맞아 했다.
“다들 선생님을 좋아하는구나.”
새틴의 말에 한 아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여기 오기 전의 일은 생각하기도 싫어.”
“나도…….”
“맞아, 정말 힘들었어.”
아이들이 저마다 힘들었던 일을 와르르 털어놓았다. 다들 가족도 갈 곳도 없는 아이들이라 거리에서 생활하며 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이렇게 좋아하는 선생님을 케인은 왜 싫어할까. 다크에이지에서 실험체가 될 뻔했단 서술이 나오긴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모를 텐데.
새틴은 슬쩍 눈치를 보다 물었다.
“케인은 어때?”
한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케인이 뭘 어쨌는데?”
“나하고 같이 방을 쓰는데 날 좋아하지 않는 거 같아서. 케인이 어떤 앤지 궁금하네.”
잠깐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아이들이 두서없이 말했다.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아이들의 목소리는 남자애나 여자애나 모두 작은 새 울음소리처럼 높았다.
“케인은 처음부터 선생님을 안 좋아했어.”
“케인은 아마 도망칠 거 같아.”
“케인은 성격이 나빠. 선생님이 얼른 아셔야 할 텐데.”
정보라 하기 애매한 험담들 사이에 좀 의아한 내용이 끼어 있었다. 새틴은 슬쩍 흐름을 끊고 다시 물었다.
“도망칠 것 같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팀이 대답했다.
“가끔 도망치는 애들이 있어. 잘 이해는 안 되는데 말이야.”
“그냥 떠나면 안 돼? 왜 도망을 쳐?”
팀과 아이들이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2
2년 전, 마법사 라기이스가 처음으로 클로버랜드에 나타났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중간 정도 크기의 도시인 클로버랜드에는 마법사가 거의 없었다.
늙은 마법사만 몇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관청과 치안청의 명예직에 앉아 귀족과 같은 호사를 누리며 살았다. 사실 늙은 마법사들은 어딜 가나 비슷했다.
라기이스는 조금 특이한 마법사였다. 머리가 희게 셌을 만큼 나이가 많은데 관청이나 치안청에 기웃거리지 않았다. 거들먹거리며 힘을 과시하지도 않고 비싼 값에 의뢰를 받지도 않았다.
라기이스가 클로버랜드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건물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처음엔 도심 근처의 저택을 알아보다 마땅치 않자 클로버랜드 인근의 마을까지 돌아보더니 결국은 숲 한복판의 아무도 찾지 않는 허름한 저택을 샀다. 사람이 헤매기로 유명한 숲이라 저택이 아주 헐값에 나와 있었다.
수리를 하지 않고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꼴이었기에 라기이스는 인부를 몇 고용했다. 다들 기피하는 숲 가운데여서 급료를 비싸게 치렀다.
클로버랜드와 인근 마을에서 온 인부들은 공사를 하며 소문을 날랐다. 괴짜 마법사가 학교를 세우려는 모양이라고.
그러자 클로버랜드는 물론 다른 도시에서까지 사람들이 찾아왔다. 저마다 아이를 데리고 공사 현장을 드나들었다. 인부에게 뇌물을 주고 라기이스와 줄을 대 보려 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사들은 대부분 후계자를 한 명, 기껏해야 두 명 정도나 키웠다. 마법사들은 희소함이야말로 그들의 진짜 무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마법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은데 마법사가 되는 길은 바늘구멍보다 좁았다. 마법을 가르쳐 주는 학교에 아이를 보낼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부모가 바글바글했다.
라기이스는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학교를 세울 생각이긴 하나 마법사를 키우는 학교가 아니라 하니 다들 실망해 돌아갔다. 그 와중 누군가 물었다.
「그럼 뭘 가르칠 겁니까?」
「무엇이든지요.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무엇이든 가르쳐 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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