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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9화 (19/139)

19화

케인은 새틴이 더 주절거리게 두지 않고 말을 끊었다.

“쓰레기는 확인했어?”

“어, 쪽문에서 자루를 가지고 나오던데.”

“부엌 쪽문 말이지.”

“근데 밖에서는 못 열게 돼 있더라.”

부엌의 위치는 바로 이 아래. 그러나 면적은 훨씬 넓다. 2층에는 여섯 개의 침실이 있는데 1층에는 부엌과 식당뿐이다.

부엌의 구조를 케인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루퍼스가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하는 공간 안쪽 상당히 넓은 부분이 벽에 가려 있었다. 아마 개조를 해서 세운 벽이리라고 케인은 짐작했다. 문의 모양이 딴 곳과 달랐다.

본 적 없는 그 안의 구조를 케인은 막연히 가늠해 봤다.

“부엌 안쪽에 털북숭이가 지내는 방이 있을 거야. 설마 솥에 들어가 자진 않을 테니.”

웃으라고 한 얘기가 아닌데 새틴이 작게 웃었다. 케인이 빤히 쳐다보자 새틴은 안 웃은 척 말을 받았다.

“그 문이 바로 저장고로 가는 게 아니었구나. 침실하고 지하 수로가 가까이 있으면 좀 무섭겠다. 쥐도 많다던데.”

말을 마친 새틴은 본 적 없는 부엌 안쪽의 구조를 상상하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케인은 슬쩍 비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일부러 만든 저장고가 아니라 옛날에 만들어진 수로를 저장고로 쓰고 있을 뿐이라면 아마 문은 크지 않을 테다.

바닥을 열고 들어가는 방식일 가능성도 있다. 참회실 바닥의 비밀 공간처럼.

‘그렇게 비밀스러운 모양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쓰레기 자루를 수로에 보관하고 있지 않은 이상 그쪽에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설마 식재료와 쓰레기를 한 공간에 두진 않겠지.

‘……설마.’

모를 일이다. 더러운 인간들의 더러움에는 한계가 없다. 거리에서 지내며 케인은 별별 사람을 다 봤다. 이곳에 유일하게 좋은 점이 있다면 거리에 비해 훨씬 위생적이라는 점이다.

“근데 있잖아.”

생각이 끝났는지 새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엉뚱한 소리를 할 거라 예상하면서도 케인은 일단 말해 보라고 고갯짓했다.

“수로를 통해서 어디 다른 데로 갈 수는 없을까?”

“관둬.”

“왜?”

“옛날 수로는 미궁이나 마찬가지야. 엉뚱한 데로라도 나가면 다행이고, 재수 없으면 내내 헤매다 죽을 수도 있어.”

새틴은 믿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케인을 내려다봤다. 케인은 행여 들어갈 생각하지 말라고 한마디 더 하려다 말았다.

어린애도 아니니 알아서 하겠지. 어차피 수로 입구까지 가기도 쉽지 않다.

수로 이야기를 끝내고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일단 털북숭이가 자리를 비우게 만들어야 해. 그 자루를 어디에 두는지 알아야 하니까.”

“어차피 거기 어디 있을 텐데 굳이 확인할 필요 있어? 별로 넓지도 않은데.”

“만약을 위해서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잖아.”

어림짐작하고 숨어들었다가 목적 근처도 못 가고 들키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새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케인은 참 꼼꼼하구나.”

칭찬인데 어쩐지 칭찬 같지 않았다. 케인이 인상을 쓰자 새틴이 슬그머니 웃더니 시선을 피했다. 역시 칭찬의 의미가 아니었다.

케인은 탐탁잖은 마음에 혀를 차고 말했다.

“아무튼 오늘 밤에 확인하자.”

“이렇게 급하게?”

새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인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나 죽고 나서 하든지.”

∞ ∞ ∞

루퍼스는 침대 아래에서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간 급료로 받은 돈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게 유일한 낙이지.’

동전 하나 어긋남 없이 맞는 걸 확인한 후 루퍼스는 상자를 다시 침대 아래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예전 일을 떠올렸다.

2년 전 루퍼스는 클로버랜드의 한 식당 앞에서 구인 공고를 보고 있었다. 웬 영감이 다가와 어디서 왔느냐 묻더니 일자리를 제안했다. 루퍼스는 누가 그런 데까지 가서 일을 하냐고 코웃음 쳤다.

그럴 만도 했다.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마차로 세 시간은 걸리는 숲. 심지어 짐마차로는 더 오래 걸린다. 일을 마친 후 술 한잔 걸칠 동료도 없는데 돌봐 줘야 하는 어린애들은 득실거린다니.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루퍼스는 여기에 왔다. 시골뜨기 신참 요리사에겐 과한 정도를 넘어 꿈같은 급료를 제시받으니 싫단 말이 쏙 들어갔다.

3년만 일하면 식당을 하나 차릴 수 있다는데 위치가 대수일까. 외진 숲이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 섬이라도 가야지.

혼자서 열 명 넘는 사람의 식사를 준비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침 준비를 마치고 잠깐 쉬면 점심시간이 됐다. 또 잠깐 앉아 있다 보면 저녁때다. 해가 떨어지면 내일 아침을 준비해야 했다.

지루한 일이지만 꼬박꼬박 쌓이는 돈을 보면 버틸 만했다.

학교 분위기는 의외로 괜찮았다. 부랑아들이 제 버릇을 남 못 주고 물건을 훔쳐 가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일도 없었다. 길바닥 생활을 한 덕인지 다들 눈치가 빨랐다. 여기서 사고를 치고 쫓겨나 봐야 저희 손해인 걸 잘 알았다.

간혹 수상한 분위기를 느낄 때가 있지만 루퍼스는 깊이 알려 하지 않았다. 여기엔 돈을 벌러 왔을 뿐이니 돈만 벌면 된다.

‘담배나 피울까.’

낮에 상단에서 온 사람이 적적하겠다며 담뱃잎을 조금 나눠 주고 갔다. 너덧 번은 피울 수 있을 거라 했으니 오늘 한 번 피우면.

“루퍼스, 안에 있어요?”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람.’

루퍼스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침실을 나갔다. 어둑한 데서 움직이다 지하 수로 문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어이쿠!”

본 사람도 없건만 루퍼스는 민망해서 괜히 혀를 찼다.

‘구조가 진짜 후졌다니까.’

사나흘에 한 번은 꼭 이렇게 발이 걸린다.

복도에서 부엌으로 들어오면 안쪽에 문이 하나 보인다. 아이들은 간식을 먹고 싶을 때가 아니면 부엌까지 오지 않으니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2년 전 영감은 원래 창고 겸 저장고였던 자리를 반으로 나눴다. 안쪽은 요리사의 침실로 개조하고, 나머지 반은 그냥 두었다. 지하 수로의 문이 있어 그쪽은 방으로 쓸 수 없었다. 낮은 우물 모양의 문은 덮기도 가리기도 애매했다.

여기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루퍼스는 수로의 문 위에 식재료를 쌓아 두고 썼다. 그 자리가 서늘해 그랬던 것인데 어느 날 루퍼스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수로 안에 두어도 되지 않을까? 그럼 지나다니기가 한결 편할 텐데.

루퍼스는 곧 생각을 실천했다. 깨끗해진 문 주변에는 오래 지나지 않아 다른 것이 쌓였다. 팔아 치울 쓰레기를 그 자리에 두니 편했다.

‘바깥에 두면 야생 동물이 헤집기 일쑤란 말이지.’

쓰레기를 침실 앞에 두니 보기엔 좋지 않지만 아무렴 어떨까. 몸이 편한 것이 제일이다.

“루퍼스, 없어요?”

컴컴한 부엌을 가로질러 문으로 다가가니 다시 한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간다, 가.”

여기쯤 오니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이 됐다. 이 학교에서 변성기가 지난 애는 딱 둘뿐이다. 새틴과 케인.

벌컥 문을 열었다. 문을 두드리려던 새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밤중에 무슨 일이야? 야식 만들어 달라고 하면 먼지 나게 맞을 줄 알아.”

“그런 거 아니에요. 저 좀 도와주세요.”

누가 이렇게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루퍼스는 당황했다.

“뭔데.”

“일단 와 봐요.”

설명도 하지 않고 새틴이 성큼 앞서갔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루퍼스는 일단 그 뒤를 따라갔다. 계단을 오르다 물었다.

“영감한테는 얘기했어?”

“아, 선생님한테 얘기할 만한 일이 아니에요.”

영감한테는 얘기 못 하지만 저에게는 얘기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루퍼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알게 될 테다.

새틴은 2층에 이르러 동쪽 복도로 꺾었다. 아이들의 침실이 있는 쪽이다. 루퍼스가 알기로 새틴의 침실은 가장 안쪽이다. 케인과 함께 방을 쓴다고 들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나직하게 울릴 뿐 복도는 조용했다. 아이들이 깨어 있기엔 늦은 시간이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라 모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새틴은 그나마 다 컸다고 이 시간까지 깨어 있는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마지막 문 앞에 이르러 새틴이 서두르던 걸음을 멈췄다.

“야, 뭔데 그래.”

새틴은 대답하지 않고 루퍼스를 돌아보았다. 루퍼스는 저도 모르게 약간 긴장했다.

창이 없는 복도는 낮에도 어둑하지만 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램프를 들고 선 새틴의 분위기는 아주 묘했다. 평소엔 허여멀겋다고만 생각했던 얼굴은 어딘지 신비롭고, 굽슬굽슬한 검은 머리는 몹시 부드러워 보였다.

‘내가 돌았나.’

루퍼스는 제 뺨을 툭툭 쳤다. 아무래도 여기서 너무 오래 일을 했나 보다. 예쁜 여자도 아니고 나뭇가지 같은 사내놈을 보고 이상한 생각을 하다니.

“놀라면 안 돼요.”

“뭔데.”

새틴이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케인은 어디에 갔냐고 물으려는데 새틴이 등을 떠밀었다. 불시의 일이라 루퍼스는 어어,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른쪽이 제 침대예요.”

침대가 뭘 어쨌다는 거지.

루퍼스가 그리 생각하는 찰나 새틴이 그의 등 뒤에 달라붙었다.

“뭐, 뭐야? 왜 이래?”

“루퍼스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었어요. 여긴 다 어린애들뿐이고…….”

“뭐, 뭘…….”

“부탁이에요.”

루퍼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키만 껑충하니 큰 사내놈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침대에…….”

침대에?

“도마뱀 좀 잡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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