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말투는 썩 예쁘지 않지만 어쨌든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다. 새틴은 민망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고맙게도 케인은 핀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보고 온 것을 빨리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다.
“늙은이의 연구실에 아주 큰 책상이 있었어. 종이 뭉치가 쌓여 있었는데 뒤집혀 있어서 내용은 못 봤어.”
“흑마법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을까?”
“모르지. 그리고 바닥에 카펫이 있었어.”
“카펫?”
학교의 복도며 교실에는 카펫이 깔려 있지 않다. 선생님의 사무실과 서재에도 역시 마찬가지고.
서양에서는 카펫을 흔히 쓰니 여기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의외라고 예전에 새틴은 생각한 적이 있다. 이유는 고심하지 않았다. 그저 청소가 힘들어 그런 것이려니 했다. 딱히 중요한 사항은 아니니까.
그런데 아니었을까.
“사람은 으레 비슷한 방식을 쓰잖아.”
카펫 얘기 중에 갑자기 무슨 소리람.
새틴이 고개를 갸우뚱하니 케인이 덧붙여 말했다.
“뭔가를 숨길 때 말이야.”
“아.”
웹사이트의 비밀번호를 모두 똑같이 등록해 뒀다가 줄줄이 털렸다는 얘기를 인터넷에서 여러 번 봤다.
새틴은 밤중에 몰래 선생님의 뒤를 밟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선생님은 참회실 바닥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 놨지.”
“연구실 바닥에도 그런 게 있을지 몰라.”
“그리고? 선생님이 무슨 얘기를 하진 않았어?”
새틴의 채근에 케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깐 뜸을 들였다. 그러다 불쾌한 생각이라도 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그 늙은이가 꼭 내 속을 아는 것 같았어.”
“왜?”
“클로버랜드로 돌아가면 뭘 하고 싶냐고 물었어.”
“……뭔가 눈치를 챘을까.”
케인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대화가 끊겼다. 애매한 침묵은 주변을 살피게 만들었다. 케인은 여태 제가 새틴의 옷깃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 돌연 헛기침을 하며 핀잔했다.
“야, 좀 떨어져.”
“네가 비켜야 떨어지지.”
어이가 없어 새틴이 반박하자 케인이 뒤로 물러났다. 멋쩍었는지 귀가 벌겠다.
여태 두 사람은 문 앞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뒤에 공간이 얼마든지 있는데 마음이 급해 차분히 이야기할 자리를 찾는 것마저 잊었다.
간격을 만들던 케인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새틴도 그 앞에 앉았다. 곧 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딱히 생각해 본 게 없다고 했어.”
“그랬더니?”
“마법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어보던데.”
“뜬금없네. 그래서 뭐라고 했어?”
“돈 되는 거라고 했지.”
틀린 말은 아니지 싶어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끝인데.”
“……뭐 도움 될 만한 건 하나도 못 건졌어? 다시 들어갈 방법이라든지.”
케인이 씩 웃었다. 무언가 건졌다는 표정이라 새틴의 기대감이 커졌다. 케인이 미소를 지우지 않고서 말했다.
“잠금장치가 생각보다 단순했어.”
“밖에서 열 수 있겠어?”
“실과 얇은 철사만 있다면.”
그걸로 어떻게 열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새틴은 굳이 묻지 않았다. 아무튼 열 수 있으면 되었다.
새틴이 철사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는데 케인이 불쑥 말했다.
“그런데 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까.”
“응?”
“지금 나를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순순히 돌려보내 줬잖아.”
합당한 의심이고 걱정이었다. 그래서 새틴은 어이가 없어졌다.
“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거길 갔어?”
“안쪽을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선생님도 확인하고 싶었겠지.”
“뭘?”
“부르면 네가 오는지.”
잠시 말이 없던 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틴도 케인이 선생님의 연구실 안에 있는 동안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했다. 아마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내심 짐작하기도 했다.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생각해 봐. 아직 팀이 죽은 지 얼마 안 됐잖아.”
선생님이 쾌락 목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였다면 새틴은 연구실 문을 부숴서라도 케인을 데리고 나왔을 거다. 그러나 선생님은 쾌락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다. 다른 목적이 있다. 죽음은 그저 부수적 결과일 뿐이다.
“넌 매기가 없어진 후에 여기에 왔지?”
새틴의 물음에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듣기로 케인이 온 지 두 달 정도 되었다 했으니 매기가 사라진 지는 그보다 더 오래됐다. 매기와 팀의 죽음 사이에는 최소 두 달 이상의 간격이 있다.
“선생님한테는 연구도 중요하지만 의심받지 않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봐.”
“연달아 두 명이 사라지면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 거란 말이지.”
“그래, 그러니까 아직은 널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 말이 이상하네. 너한테 실험을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럼 언제쯤 할 거라고 예상하는데?”
“글쎄, 아이들이 팀을 잊어버릴 즈음?”
그게 언제가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선생님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할까. 살인자들에게 살인은 얼마나 중요한 행사일까.
케인이 조그맣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정신 나간 늙은이 같으니라고.”
“다음엔 이번처럼 무사히 나오지 못할지도 몰라.”
“알아.”
위험할지 모른단 얘기를 하면서도 케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서리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 보이긴 하나 겁을 먹은 기색은 아니었다.
새틴은 속으로 감탄했다.
‘배짱 좋네.’
겨우 열여섯 살이면서 케인은 몹시 대범했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태연히 선생님의 연구실로 향했다. 새틴이라면 그러지 못했으리라.
저 대범함은 타고난 기질일까, 아니면 학습된 성격일까.
새틴은 케인의 대범함이 부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안타깝기도 했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된 아이를 보는 심정이었다. 누나가 말하길 아이일 때 아이답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축복이라고 했다.
‘누가 누굴 동정하는지, 원.’
ㅇㅇ도 좋은 환경에서 자라진 않았다. 다만 ㅇㅇ가 겪은 고생은 케인이 겪은 고생과는 결이 달랐다.
적어도 ㅇㅇ는 침대에서 자고, 하루 세 끼를 먹으며 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육신의 괴로움은 겪지 않았다.
게다가 누나와 지내면서부터는 외부인과 교류 자체가 적어졌다. ㅇㅇ의 세상은 편협하며 정적이었지만 그래서 안정감이 있었다. 새틴은 그 시절을 생각하면 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금 같은 생활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누나가 죽지 않았다면 지금도 ㅇㅇ는 그대로 지냈으리라. 어떤 변화도 발전도 없지만 결코 불행해지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야말로 시들지 않는 정원과 같다. 영원한 봄의 정원.
케인에게도 누나 같은 사람이 생긴다면 좋을 텐데.
“뭐야,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런 표정이야.”
케인이 몸을 반쯤 일으킨 채 물었다. 새틴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억 상실인 사람이 과거의 추억을 생각하고 있었노라 대답할 순 없었다. 슬쩍 말을 돌렸다.
“로저스 말이야.”
“입 가벼운 로저스가 왜.”
제 이야기를 했다고 앙심이라도 품었을까. 케인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진심으로 화가 난 기색은 아니어서 새틴은 핀잔하지 않고 말했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굳이?”
“연구실에 비밀 공간이 있는지 확인을 한다 치면 말이야. 세 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실제로 연구실에 들어갈 사람이 한 명. 선생님을 붙잡고 시간을 끌 사람이 한 명. 다른 아이들의 주의를 돌릴 사람이 한 명.
케인은 설명 없이도 알아들었다.
“로저스여야 하는 이유가 있어?”
“선생님을 의심하고 있더라고.”
“그건 의외네.”
케인이 턱을 문질렀다. 서고에서 자주 얼굴을 봤으면서 서로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나 보다.
아무튼 새틴은 케인이 곧장 반대의 말을 하지 않아 주장에 자신감을 얻었다.
“한 명이라도 더 있는 편이 뭘 하든 좋지 않을까?”
“서로 배신하지 않는단 확신만 있다면 말이지.”
“자긴 혼자 선생님 연구실에 다녀왔으면서.”
∞ ∞ ∞
오후 수업을 마치고 교실에서 나오던 라기이스는 루퍼스가 식당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왜 그러고 있지?”
“시계가 고장 났네요.”
“시계?”
루퍼스의 시선을 따라 라기이스는 식당 벽의 시계를 보았다. 회중시계와 비교해 보니 시간이 한참 틀어졌다. 클로버랜드에는 시계 장인이 없어 남이 쓰던 것을 사다 걸었더니 결국 고장이 난 모양이다.
“다음에 나갈 일이 생기면 새것을 사다 주지.”
루퍼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라기이스도 연구실로 돌아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시계에 관한 생각은 아니었다.
지난 새벽, 라기이스는 케인을 만났다.
‘아까운 녀석이야.’
케인은 아이들이 모두 들어오고 싶어 안달하는 연구실에 들어와서도 별 반응이 없었다. 건성으로 한 번 훑어봤을 뿐이다. 새틴도 처음 들어왔을 땐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건만.
마법사가 되기에 걸맞은 성격은 딱히 없지만 흑마법사가 되기엔 대범하고 무신경한 성격이 좋다. 위험성이 높은 데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하니.
그런 점에서 라기이스는 케인을 높게 샀다.
아이들과 교류가 없으면서도 전혀 고립감을 느끼지 않고, 학교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기색을 태연히 드러냈다. 그렇다고 라기이스에게 반항하거나 주눅 들지도 않았다.
‘제자로 삼으면 좋겠지만…….’
실험이 성공하면 제자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실패하면 아까운 자질을 버리는 셈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라기이스는 나이가 많았다. 이제 와 제자를 키우느니보다 연구의 성과를 보는 편이 더 급했다. 새틴에게 같은 실험을 다시 할 순 없으니 이제 케인이 유일한 재료였다. 아깝더라도 사용해야 했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선택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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