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스승은 평생 연구에 매진했으나 결국 성과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라기이스는 결코 스승처럼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살아 있을 적 스승은 시신을 충직한 종으로 만드는 마법에 관해 연구했다. 그저 불이며 바람 따위를 휘둘러 대는 마법사보다 훨씬 전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스승은 죽은 자를 깨우는 마법의 공식을 찾아냈다. 라기이스는 공식을 속으로 읊조렸다.
‘별. 바다. 군청색. ○○. 열여덟. 하나. 사막. 꿈. ×××. 흐릿함. 어제. 기도. ○. 햇무리. 빵. 일곱. 손톱.’
작은 불을 일으키는 마법은 겨우 단어 세 개로 이루어진다. 스승이 발견한 공식은 무려 열일곱 단어로 구성되었다.
본디 복잡하고 규모가 큰 마법일수록 공식이 길다. 그런데 흑마법은 대부분 공식이 장황했다. 스승은 인간의 정신이 아주 방대하기에 그렇다고 했다. 스승은 상술한 공식을 발견하는 데 평생이 걸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공식이 완벽하단 뜻은 아니다. 스승의 의지대로 망자가 깨어 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겨우 1, 2분 남짓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지가 없어 종으로 부리기는커녕 일으켜 세울 수도 없었다. 스승은 내내 그 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찾는 데 골몰했다. 신전 기사단의 습격을 받을 때마저도.
라기이스는 스승의 연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곧 의문을 품었다. 어차피 병사들은 죽음을 각오한 자들 아닌가. 산 사람에게 마법을 쓴다면 공식이 훨씬 단순해지지 않을까.
라기이스는 실험체를 구하러 나섰다. 마법사가 되려면 타고난 자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라기이스는 마법사의 자질을 만들어 주겠다는 말로 사람들을 꾀어냈다.
‘산 사람에게 마법을 쓰기란 왜 그리도 번거로울까.’
불 마법을 쓸 때는 대상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다. 그냥 태워 버리면 된다.
그러나 정신을 건드리는 마법을 쓸 때는 동의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유대. 시전자에 대한 거부감이 심할수록 마법이 실패할 가능성이 컸다. 스승이 구태여 망자를 이용한 것은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결과가 괜찮았지.’
스승의 공식은 산 사람에게 통하지 않았다. 곧바로 이지를 잃고 천치가 되었다. 그러나 몇 군데를 손보니 실험체들은 말하고 움직였다. 애초에 살아 있던 사람들이니 그야 당연했다.
거기에 더해 실험체들은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라기이스의 명령을 들었다. 두려움 없이 죽음을 향해 돌진할 수도 있었다.
‘자의식이 너무 강한 게 문제였지.’
명령을 충실히 따르던 실험체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이지를 잃었다. 라기이스는 실험체 본인의 의지와 라기이스에게 받은 명령이 충돌한 결과라고 추측했다.
라기이스는 실험체를 어린아이로 바꿔 보기로 했다. 아직 의식이 말랑말랑한 아이들이라면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실험 결과, 별 차이 없었다. 아이들은 조금 더 오래 버틸 뿐 결국은 이지를 잃었다. 시신 처리는 이제 이골이 났다.
상심한 라기이스를 새틴이 격려했다.
「선생님, 다음엔 분명 잘될 겁니다. 아직 다른 아이들이 있잖아요. 쓸 만한 아이가 또 있을 거예요.」
라기이스는 그 순간 영감을 얻었다. 새틴도 아이였다. 변성기가 지나고 키가 훌쩍 컸지만 성숙한 어른이라 하기엔 모자랐다. 다른 아이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마법사의 자질이 있다는 것뿐.
정신에 관여하는 마법은 어쩌면 대상자의 의식뿐 아니라 체질에도 영향을 받는 게 아닐까. 대상자가 마력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새틴, 내가 무슨 명령을 하더라도 따르겠느냐?」
「선생님?」
「대답하거라.」
「물론이죠. 저는 선생님의 제자이니…….」
「별. 파도. 푸른색. ○○, 열여덟. 하나. 사막. 꿈. ×××. 희미함. 어제. 기도. ○.」
「선생, 님?」
마법에 당한 새틴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다. 이전 실험체와 달리 금방 깨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라기이스는 판단할 수 없었다.
라기이스는 새틴을 깨우는 대신 참회실로 옮겨 놓았다. 깨어난 새틴이 이지를 잃고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아이들이 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만약 결과가 나빠 깨어나지 못한다면 새틴이 연구 기록을 훔쳐 달아났다고 할 셈이었다.
그런데 깨어난 새틴은 엉뚱한 결과를 내보였다. 엉뚱하긴 하나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기억을 잃었으되 이지는 잃지 않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능력까지 생겼다.
마력을 보는 능력이라니, 흑마법사만이 아니라 모든 마법사들이 원할 능력이 아닌가.
‘공식이 어긋난 건 분명한데.’
새틴에게 쓴 것과 같은 마법을 팀에게 써 보았지만 같은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 다른 실험보다 못했다. 팀은 곧바로 이지를 잃었다.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라기이스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인간을 충직한 종으로 만드는 마법, 마법사가 마력을 볼 수 있게 만드는 마법.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 연구일까.
라기이스의 결정은 점차 후자로 기울었다.
전자는 존경하는 스승에게 물려받은 연구일 뿐 라기이스의 숙업이 아니었다. 반면 후자는 온전히 라기이스의 성과다. 부작용만 제거하면 그야말로 대단한 발견이 될 터.
‘케인에게 실험해 성공한다면 내게도 써 볼 수 있겠지.’
새틴은 제게 생긴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눈치였다. 제대로 된 마법사가 아니니 그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 턱이 없다.
라기이스는 새틴과 달리 그 능력이 얼마나 유용할지 알고 있다.
‘전쟁 영웅도 될 수 있을걸.’
전장에서 마법사들이 대우받는 이유는 혼자서 다수의 적을 죽일 수 있어서다. 기동성이 좋고 위력이 있으며 은신이 용이한 병사. 귀히 대접받을 만했다. 같은 이유로 적군의 마법사는 골치 아프다.
그런데 마력을 보는 능력이 있다면 어떨까. 적군 마법사가 마법을 쓰려는 시도만 해도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상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무력화시키는 셈이다.
‘흑마법사라 해도 서로 모셔 가려고 하겠지.’
라기이스는 스승을 만나 흑마법사의 길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종종 아쉽다는 생각은 했다. 명예와 권력은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것이니.
나이가 드니 집중력이 떨어지는지 쓸데없는 생각이 길어졌다.
‘잠깐 쉬어야겠군.’
시간을 확인한 라기이스는 자리를 정리했다. 펼쳐 놓기만 하고 손도 대지 않은 문서들을 한데 모아 바닥의 비밀 공간에 감추고 카펫을 덮었다.
곧 연구실을 나선 라기이스는 사무실 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아이를 보고 눈썹 사이를 찡그렸다.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
아이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로저스였다. 얌전한 성격이라 그다지 눈에 띄지 않던 아이인데 어쩐 일로 찾아왔을까.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느냐?”
“잠깐,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라기이스가 거리에서 골라 온 아이들은 대부분 수더분했다. 그래도 간혹 욕심이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매기나 팀 같은 아이들이 그랬다. 그 애들은 툭하면 라기이스를 찾아와 중요치 않은 질문들을 했다.
‘답이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지.’
자신이 이렇게 성실하고 영특하다는 표현을 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겨우 열두어 살 먹었지만 스스로 개척하지 않으면 앞날은 바뀌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물론 진리를 깨달았다 하여 곧바로 성숙해지지는 않았다. 그 아이들은 라기이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그다지 영악하지 못하단 사실도 몰랐다.
로저스는 그 아이들과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다.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다소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라기이스의 감상이었다.
“따라오너라.”
라기이스는 로저스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 ∞ ∞
“새틴, 거기서 뭐 해?”
바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놀다 들어온 아이들이 새틴을 보고 물었다. 다른 곳 다 놔두고 계단 중간에 앉아 있으니 의아한 모양이다.
새틴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쉬고 있어.”
“왜 방에서 안 쉬고?”
“케인이 화를 내서.”
“아직도 케인하고 친해지지 못했구나. 그만 포기하지.”
새틴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아이들은 키득거리며 우르르 뛰어 부엌으로 향했다. 루퍼스에게 무언가 얻어먹을 게 있는지 확인하러 가는 길이 분명하다.
새틴은 슬쩍 2층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케인도 로저스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을 로저스는 그렇다 치고 케인이 너무 늦을까 봐 걱정이다.
‘확실히 훔치는 것보단 낫다만.’
처음엔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쓸 만한 문서를 훔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로저스가 반대했다.
「그러면 금방 눈치챌 거야. 짐마차가 올 때까지 아직 며칠이나 남았잖아.」
로저스의 말대로다. 훔친 문서를 바깥으로 보내더라도 신전 기사단이 오기 전에 죽으면 아무 소용 없다. 로저스는 이어서 대안을 제시했다.
「옮겨 적자. 어차피 중요한 건 내용이니까.」
「날다람쥐 같은 게 도움 되는 말도 하는구나.」
케인은 나름대로 칭찬이라고 한 말 같았는데 로저스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리 계획을 세운 후 세 사람은 연구실에 침입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찾았다. 실은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철사였다.
새틴이 철사를 어디서 구할지 막막해하자 케인이 픽 웃었다. 다 구할 곳이 있다며.
‘시계에서 꺼내 올 줄은 몰랐는데.’
침입에 성공한 케인은 지금 선생님의 연구실 안에서 훔칠 만한 내용을 열심히 옮겨 적는 중이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 듯한데 새틴은 무언가 찜찜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찜찜한지 짚으려 하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불안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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