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로저스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자정 무렵 창밖에 반뜩이는 빛을 보았다. 사물에 반사되지 않는 기이한 빛. 마력이었다. 마법사가 우연히 근처를 산책 중인 게 아니라면 신전 기사단이 왔음이 분명했다.
‘신성 마법도 마력을 쓰는 건 똑같은 모양이지.’
아무튼 이제 더는 걱정할 필요 없다. 신전 기사단은 아마도 습격할 타이밍을 재는 중이다. 로저스가 나가서 도움을 청하면 바로 밀고 들어올 것이다.
“신전 기사단이 온 줄 알면 선생님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조용히 나가야 해.”
“넌? 넌 안 나가?”
“케인이 붙잡혀 있다니까. 케인을 데리고 가야지.”
“아…….”
로저스가 현관을 나가는 모습을 보고 새틴은 몸을 돌렸다.
‘로저스가 붙잡히는 건 생각 못 했어.’
학교 주위를 떠도는 빛을 발견한 순간 새틴은 안도했지만 동시에 불안해졌다.
다크에이지에서 흑마법사가 신전 기사단의 습격을 받았을 때 불이 났다는 묘사가 나온다. 다만 어떤 경위로 불이 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이 불을 지르는 걸까?’
가능성은 있다. 선생님은 평범한 불 마법도 하나 이상 쓸 줄 아니까.
아무튼 대비를 해야 했다. 다른 아이들이야 불길이 번지기 전에 알아서 몸을 피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로저스였다. 참회실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상태에서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지.
새틴은 우선 로저스를 구해야 했다.
‘케인은 내가 배신한 줄 알겠지.’
화난 케인의 얼굴을 상상하며 새틴은 걸음을 서둘렀다. 이제 케인을 구해 줄 차례다.
그러나 미처 계단에 이르기도 전에 폭발음이 울렸다.
∞ ∞ ∞
“불을 지른다고요?”
“정확히는 불덩이를 떨어뜨릴 겁니다. 우리 마법사님의 주특기시죠.”
“꼭 그래야 하나요?”
“흑마법사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대면하기 전에 태워 버리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불을…….”
수습 신관 에드워드는 이 작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들이 여럿 있다면서요. 아이들이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어차피 인질로 잡히면 죽을 목숨입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한갓 부랑아들입니다. 죽는다고 누가 슬퍼하겠습니까.”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신전 기사단이 주축이 되었더라면 이렇게 위험한 작전은 실행하지 않았을 텐데.
발단은 쓰레기 처리장의 인부가 치안청에 가져온 편지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적혀 있어 처음엔 아이의 낙서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흑마법사를 고발하는 내용이 덧붙어 있었다. 구해 달라는 구조 요청과 함께.
치안청 고위직에 앉아 있는 마법사가 해석해 보니 괴발개발의 낙서는 마법 공식이었다. 그것도 오래전 신전에 붙잡힌 흑마법사의 공식.
곧바로 토벌대가 꾸려졌다. 흑마법사로 의심되는 이가 세간에 자선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보니 준비는 최대한 조용히 진행되었다.
더불어 치안청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신전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작전에 참여한 치안청 경관들이 흑마법에 당하면 응급 처치를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신성 마법을 쓸 줄 아는 두 명의 신관이 작전에 참여했다. 에드워드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에드워드는 작전의 내용을 모른 채 여기까지 왔다. 듣고 나서 기절초풍했으나 힘이 없었다. 그의 주장은 현장에서 일해 본 적 없는 애송이의 불만으로 치부되었다.
“살고 싶어서 도움을 청했을 텐데 죽기라도 하면…….”
“신관님께서 그 애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 되겠네요. 슬슬 시간이 됐으니 물러나 계세요. 신관님도 해야 할 일이 있으시잖습니까.”
치안청 소속의 경관은 더 이야기를 듣지 않고 가 버렸다. 에드워드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물러났다. 에드워드의 사수인 제레미가 혀를 찼다.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했지 않느냐.”
나이가 지긋한 제레미는 인자하지만 그리 열정적이진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을 바꾸려 애쓸 만큼 기력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아들도 사람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니. 별 탈 없기를 바랄 수밖에.”
마침내 작전 실행 시간이 되었다. 치안청의 늙은 마법사가 턱을 치켜들고 앞으로 나와 주문을 외웠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예행연습을 하더니 태도에 자신감이 넘쳤다. 반면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누가 공식을 훔쳐 들을까 걱정이라도 되는지.
‘부디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할 텐데.’
에드워드는 불덩이가 건물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가슴 위로 두 손을 모았다.
∞ ∞ ∞
굉음에 깨어났을 때 케인은 몹시 당황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검은 안개라도 드리운 듯 시야가 어두웠다.
케인은 눈을 부릅뜬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직 제가 늙은이의 연구실에 쓰러져 있음을 알았다. 뺨에 닿은 카펫의 촉감이 낯설지 않았다.
케인은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늙은이가 주문을 외우자 창밖에 괴상한 빛이 나타났다. 그리고 케인은 곧 의식을 잃었다. 아마도 그 상태로 오래 지나진 않았으리라. 늙은이가 바로 곁에서 당황한 어조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아무래도 늙은이가 의도한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정신이 없는지 늙은이는 케인이 깨어난 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둑한 안개에 둘러싸인 듯한 시야에서 무언가 움직이다 멀어졌다. 그사이 다른 사람이 온 게 아니라면 늙은이의 인영일 테다.
‘이 틈에 도망쳐야 하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케인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머리가 심하게 울렸다. 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거지.
케인은 바닥에 누운 채 겨우 눈만 움직였다. 보이는 건 없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곧 알 수 있었다. 어둠 사이에서 무언가 일렁였다. 그 형태를 뚫어져라 보고 있자니 점차 더워졌다.
‘……불이 난 거야.’
희미한 빛의 방향으로 케인은 불의 위치를 가늠했다. 연구실은 계단 옆에 있다. 치솟는 불길은 아마도 계단에서 시작된 듯했다.
“불이야!”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났다. 진작 잠자리에 들었어야 할 아이들이 부산스레 뛰어나오며 무어라 떠들어 댔다. 불이야! 불! 선생님! 살려 주세요! 빨리 여기서 나가야 돼!
“이게 대체 무슨…….”
늙은이는 아직 문간에 서 있었다. 불을 막을 마법이 없다면 늙은이 역시 몸을 피해야 할 텐데 인영은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다 불쑥 다가왔다.
“깨어났구나.”
늙은이의 인영은 촛불 앞의 그림자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계단의 불 때문이라 짐작하면서도 케인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공기와 반대로. 꼭 악마를 앞에 둔 기분이다.
늙은이가 고개를 바짝 들이대고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응?”
곧 불길이 들이닥칠 텐데 무섭지도 않은지 늙은이는 케인을 붙잡고 흔들었다. 케인이 대답하지 않자 매섭게 다그쳤다.
“무엇이 보이느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케인의 눈에 무언가 뚜렷하게 보였다. 시커먼 어둠 속 괴물처럼 일렁이는 그림자, 뜨거운 열기의 잔상. 그 사이를 이질적인 빛이 떠돌았다.
“……빛이.”
케인이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하자 늙은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좋아, 좋아. 이번엔 틀리지 않았어.”
늙은이가 케인의 몸을 옆으로 밀어내고 바닥에 엎드려 무언가 했다. 바닥의 비밀 공간을 여는 듯했다. 바스락거리며 문서 따위를 챙기는 소리가 났다.
“됐어. 이제 됐어.”
늙은이의 목소리에서 기이한 희열이 느껴졌다. 늙은이가 기뻐한다고 생각하니 케인은 뱃속이 뒤틀렸다.
‘그냥 가도록 둘 것 같아?’
케인은 안간힘을 다해 늙은이의 발을 걸었다. 극심한 어지럼증도 케인의 분풀이를 막지 못했다. 성급히 몸을 일으키던 늙은이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악!”
요란하게 넘어진 늙은이는 잠시 끙끙거리다 일어났다.
“버러지 같은 새끼!”
“컥!”
“어차피 죽을 놈이, 윽…….”
전에 없이 거칠게 욕하며 케인을 걷어찬 늙은이는 다시금 몸을 웅크리고 앓는 소리를 냈다. 넘어지면서 어딘가 다친 모양이다. 케인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꼴좋다.’
더 지체할 수 없다 여겼는지 늙은이는 이내 몸을 일으키고 절뚝이며 연구실을 나갔다. 케인은 늙은이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 간신히 식별해 냈다. 늙은이는 계단 쪽이 아닌 복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왜 저리로 가는 거지?’
뛰어내릴 곳을 찾는 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은 쓸데없는 의문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불길이 점점 거세어지는 중이다.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대로 있다간 죽겠어.’
케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데다 두 손이 뒤로 묶여 있어 일어나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게다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무언가를 짚고 몸을 지지하기도 어려웠다.
케인은 아직 불이 옮겨붙지 않은 벽에 기대어 겨우 연구실을 나왔으나 거기서 더 움직일 수 없었다. 보이지 않아도 이리 가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계단 쪽으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열기가 강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눈만 보였더라도 멀쩡한 곳을 조심히 딛고 뛰어 내려갔을 텐데. 이 상태로 계단을 내려가려 시도해 봤자 불구덩이에 스스로 뛰어드는 꼴밖에 되지 않으리라.
케인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소리를 치던 아이들은 모두 빠져나갔는지 이제 사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아쉽진 않았다. 어차피 누가 남아 있다 하더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케인을 도와주러 오진 않을 테니.
케인은 홀로 살아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창문, 창문으로 나가자.’
연구실 창문은 열리지 않으니 깨고 뛰어내리는 거다. 뼈가 부러질지도 모르지만 타 죽느니보단 나았다.
‘미친 늙은이 같으니라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계획은 세웠는데 몸이 생각을 따라 움직여 주지 않았다. 채 두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케인은 멍하니 주저앉아 고개를 쳐들었다.
검은 안개 속을 일렁이는 불길의 잔영이 악마의 손가락으로 보였다. 갈퀴처럼 케인의 영혼을 긁어 지옥으로 가려 한다.
‘이렇게 죽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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