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노인은 ㅇㅇ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피곤한지 눈을 껌벅이다 감아 버렸다. 차라리 잘되었다. 멀쩡하지 않은 노인을 혼자 두고 나가기가 영 껄끄러웠는데 잠든 새에 다녀오면 될 성싶었다.
ㅇㅇ는 조용히 문을 닫고 오두막을 나왔다. 표지판도 블록 깔린 길도 없지만 사람들이 다니는 경로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풀이 자라지 않아 누렇게 흙이 드러난 곳이 있었다. 그리로 오가는 사람이 꾸준히 있단 뜻이다.
길 아닌 길을 따라 한참 걸었다.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 내내 굶어 간혹 어지럼증이 들었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ㅇㅇ는 몸이 어려져서 체력도 더 좋아진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원래의 ㅇㅇ는 스무 살이었다. 새로 들어온 몸은 몇 살인지는 몰라도 ㅇㅇ보다 더 먹진 않은 듯했다. 거울은 아직 보지 못했으나 팔과 얼굴이 매끈매끈했다.
키와 체격은 원래 몸과 비슷했다. 길쭉하고 호리호리했다. 하나 아직 성장기라면 앞으로 더 자랄 터.
ㅇㅇ는 기계적으로 다리를 옮기며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누나는 무슨 이야기를 쓴 걸까. 노인과 손자의 이야기? 이를테면 머리에 문제가 있는 노인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손자 이야기라든지.
제법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아동 복지며 소외 계층에 관심이 많던 누나라면 그런 주제로 소설을 썼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목가적인 이야기려나.」
ㅇㅇ는 피로에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일부러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었다.
노인의 외모를 봐선 한국 배경은 아니다. 그렇다고 서양 배경도 아니다. 사람들을 더 만나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판타지 배경으로 추측됐다.
누나는 원래 출퇴근길에 웹소설을 보는 취미가 있었다. 간혹 재미있는 걸 발견하면 ㅇㅇ에게도 권하곤 했다.
「원래 한국형 판타지라는 게 그렇지.」
서양풍 판타지라 분류하지만 보다 보면 동서양이 혼합된 느낌이 강하다. 등장인물을 서양인처럼 묘사하면서도 팔뚝 털이며 가슴 털은 절대 언급하지 않는 점이나, 백작이니 공작이니 하면서 실은 조선 왕정의 정치 체계가 녹아든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기술력은 산업 혁명 시기 정도로 묘사하는데 사람들은 묘하게 현대적 사고를 한다. 여자와 어린이의 인권을 챙기고, 동물이 죽으면 큰일 난다.
「어느 정도는 이상적인 세계를 묘사하는 걸 거야.」
ㅇㅇ가 보던 소설들이 대체로 스트레스받을 요소가 없는 전개여서 이리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억울한 사람이 계속 억울한 채 살고,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굴러가는 세상을 소설에서까지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소설에서까지 답답한 걸 왜 부와아아아…….」
중얼거리는데 하품이 나왔다. 더는 못 가겠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저 앞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화재는 아니고, 마을이었다.
∞ ∞ ∞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그럴 운명이었던 건지.’
마을 사람들은 친절했다. 기억 상실(이라고 주장하는) 청년과 치매(일지도 모르는) 노인에게 도움을 주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곳간이 그리 넉넉한 마을도 아닌데 말이다.
덕분에 ㅇㅇ는 이 목가적인 소설에 금세 익숙해졌다.
‘과연 누나의 소설이야.’
안온한 일상 속에서 새틴은 원작자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누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들은 대답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별일이야 있을까.
‘이런 상황에 뭐 얼마나 거창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겠어.’
이름이 새틴이 된 데는 별 이유 없다. 마을 사람이 이름을 묻는데 예전 이름을 대기가 좀 그랬다. 성경식 작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자 이름을 쓰느니 노인이 아는 유일한 단어를 이름 삼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일 성싶었다.
‘어쩌면 진짜 이름일지도 모르지.’
노인과는 정말로 조손 관계고, 노인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게 손자의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은가.
확인할 길 없는 추측은 일단 미뤄 두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듣기로 오두막은 원래 숲지기가 쓰던 곳이라고 한다. 그는 봄부터 가을까지 숲을 관리하고 겨울이 되면 다른 마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몇 년이나 그렇게 지냈는데 바로 얼마 전, 새틴과 할아버지가 나타나기 직전에 아주 떠났다는 모양이다.
새틴의 입장에서야 빈집이 생겨 고맙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숲지기는 이곳을 떠났을까.
마을 사람들은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숲의 주인이 바뀌었거든.」
「숲에 주인이 있어요?」
「아, 당연하지. 주인 없는 땅이 어디 있겠어.」
예로부터 저 숲은 클로버랜드라는 도시의 관청이 소유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해 왔다. 가장자리 일부만 몇몇 개인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클로버랜드 관청이 그 땅들을 모두 사들였다.
그 과정에서 관청이 숲지기의 고용 승계를 하지 않은 까닭으로 그는 일자리를 잃었다.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어졌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새틴은 클로버랜드라는 지명이 묘하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떠올렸다. 예전에 본 웹소설에 등장하는 지명이었다. 누나도 본 소설이다.
‘설마 아니겠지.’
우연히 겹쳤거나 무심코 차용했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 어느 쪽이든 큰 문제는 아니다. 대단히 특색 있는 단어도 아니니.
‘그 소설에 새틴이란 인물도 나오긴 했는데…….’
그래도 이 세계가 그 소설은 아니겠지. 새틴이라는 이름은 엄밀히 말해 진짜 이름도 아니고 그냥 할아버지의 입버릇에서 따왔을 뿐이니까.
여하튼 새틴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숲지기의 오두막에서 지내게 되었다. 작은 텃밭도 가꾸고, 숲에서 버섯이나 산나물을 채취하기도 했다. 먹어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해 매번 마을 사람들에게 확인을 받아야 했지만.
‘괜찮은 생활 같아.’
할아버지는 얌전해 크게 손 가는 데가 없고, 새틴은 조용한 오두막 생활이 꽤 체질에 맞았다. 간혹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고 삯을 받아 이것저것 살림을 장만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새틴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전보다 너그러운 성격이 됐다. 일상이 명상이나 다름없었다.
“새, 틴.”
내내 침대에 앉아 천장을 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행주를 꾹 짜서 창가에 널어놓은 새틴은 방으로 들어가 물었다.
“배고프세요? 제이크 아저씨가 저녁거리를 주셨어요.”
“새애…….”
“텔레비전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요.”
새틴은 할아버지의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침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고 부엌으로 돌아왔다.
‘역시 판타지가 좋다니까.’
가스레인지처럼 불 조절이 편리한 화덕이라니.
새틴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냄비를 화덕에 올렸다. 다소 심심해 보이는 스튜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이곳에서는 후추도 고추도 고급 향신료가 아닌 덕에 입에 딱 맞는 어레인지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새틴은 취향대로 이것저것 넣고 간을 봤다.
‘맛있네.’
∞ ∞ ∞
“그럼 다녀올게요.”
오늘도 할아버지는 넋을 놓고 있었다. 구태여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새틴은 오두막을 나왔다. 텃밭을 대강 훑어본 후 숲 쪽으로 발을 옮겼다.
오늘은 점심 전까지 숲을 좀 돌아다닐 예정이다. 이맘때면 먹을 만한 산나물이 많이 나왔다.
‘남들이 다 뜯어 가기 전에 나도 좀 뜯어야지.’
요 며칠 마을 사람들도 숲에 종종 드나들었다. 깊이 들어가면 헤맨다지만 얕은 곳까지는 전 숲지기가 표시를 해 둬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밝은 시간에 숲속을 걸으면 기분이 아주 상쾌해졌다.
‘이게 치톤피드인가 피톤치드인가 그거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새틴은 숲 안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그러다 눈에 익은 산나물이 보이면 조금씩 뜯어 바구니에 담았다. 어차피 입이 둘뿐이라 많이 뜯을 필요도 없었다. 뭔지 모르겠다 싶은 건 손대지 않고 뒀다.
감자나 양파 같은 흔한 식재료들은 지구와 비슷한데 산나물은 영 다르게 생긴 게 많았다. 아니면 잘 모르니 낯설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시금치 같은 거나 알지. 산나물을 어떻게 알겠어.’
조리된 산나물들은 원래의 형태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누나는 곤드레 나물을 좋아했는데 마르지 않은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ㅇㅇ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뜯은 흔적만 쫓아다니면 엉뚱한 풀을 뜯을 일은 없겠지. 새틴은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한동안 숲을 돌아다녔다.
‘이 정도면 되려나?’
새틴이 바구니를 흔들며 산나물의 양을 가늠하는데 발치에 특이한 풀이 보였다.
‘……이거 인삼 아닌가?’
잎이 달린 인삼을 실물로 본 적은 없다. 먹어 본 삼이라고는 삼계탕에 들어가는 건조 인삼과 액상 형태로 가공된 홍삼 정도다.
그래도 인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안다. 심마니의 생활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서 봤다. 인삼이나 산삼이나 생김에는 차이가 없다고 했다. 밭에서 키우면 인삼, 산에서 자라면 산삼이다.
‘맞는 거 같은데?’
새틴은 바구니를 잠시 내려놓고 풀의 형태를 살폈다. 다섯 갈래의 잎사귀가 있고 가운데엔 빨간 열매가 조롱조롱 매달렸다. 심마니 다큐를 보지 않았어도 한 번쯤 눈길을 줄 모양새였다.
‘자생한 거니까 산삼이라고 보면 되겠지?’
주변의 잡풀들을 뽑아내고 흙을 살살 긁었다. 새틴은 특별히 보약을 챙기는 편이 아니지만 산삼을 봤는데 그냥 갈 순 없었다.
‘할아버지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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