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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36화 (36/139)

36화

받은 품삯으로 무얼 살까 고민하던 새틴은 닭을 한 마리 샀다. 현대처럼 닭이 크기별, 품종별로 나오는 게 아니다 보니 말도 안 되게 컸다. 아마 육계처럼 살이 부드럽지도 않을 거다.

새틴은 오두막에 돌아오자마자 부엌으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커다란 닭을 헹구며 보니 군데군데 털이 남아 있기에 불에 그슬려 정리한 후 반으로 잘랐다. 반은 그대로 두고, 나머지 반은 토막을 쳤다.

토막 내지 않은 반을 우선 솥에 넣어 화덕에 올렸다. 졸아들 것을 감안해 물을 넉넉히 부었다. 당귀나 감초, 대추 따위는 없으니 생략하고 전에 캐 놓은 산삼을 넣었다. 산삼만 넣어도 보양에는 충분할 테다.

“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산삼 넣은 백숙을 일억에 파는 식당이 있대요, 할아버지.”

“으응.”

일억짜리 보양식에 대한 기대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대꾸였다. 사실 대꾸도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문간에 앉아 땅콩을 먹느라 정신없었다. 품삯과 함께 나눠 받은 것인데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솥의 물이 끓어오를 때쯤 토막 낸 나머지에 양념을 했다. 마늘과 고춧가루를 잔뜩 넣고 이 지역에서 많이 쓰는 향신료를 조금 섞었다. 그리고 솥 옆에서 달달 볶았다. 텃밭에서 키운 대파와 양파, 감자를 넣으니 제법 그럴싸한 닭볶음탕처럼 보였다.

“국물이 자작한 것도 좋은데, 비벼 먹을 밥이 없으니까 이게 낫죠.”

“으응.”

새틴이 식사 준비를 마친 시간은 평소의 점심시간보다 좀 늦었다. 할아버지는 땅콩을 잔뜩 먹었으면서 식탁 앞에 앉으니 금세 식욕이 도는 듯했다. 푹 익은 살을 발라 접시에 담아 주자 허겁지겁 집어 먹었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마른 입술을 보며 새틴은 픽 웃었다.

“잘 드시고 건강하세요.”

투박한 창문 옆에 둔 식탁에 이른 여름 볕이 들었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환한 빛을 받으니 꼭 색 바랜 흑백 사진 같았다. 새틴은 그 앞에서 새빨간 닭고기를 건져 먹으며 웃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은 날이네요.”

아주 지루하지만 평화로운 전원 소설의 클라이맥스 같은 하루였다. 새틴은 과연 이런 일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해졌다.

‘영원히?’

예상은 틀렸다. 그날 밤, 할아버지가 느닷없는 복통을 호소했다.

“새, 새티인, 새틴!”

할아버지의 얼굴이 허예졌다 퍼레지기를 반복했다. 어디가 아프단 말도 못 하고 새틴의 이름만 연신 불러 댔다. 바싹 마른 손이 새틴의 손목을 움켜쥐고 벌벌 떨었다.

이런 상황이 처음인 새틴은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119에.”

새틴은 멈칫했다.

119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 이 마을엔 의사도 없는데.

“일단, 사람들한테 가 봐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새틴은 할아버지를 업고 마을로 향했다. 어두운 비탈을 내려가는 내내 할아버지는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새틴의 이름만 부르짖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집에 있던 약을 가지고 나왔지만 쓸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관절 통증에 좋은 연고며 소화가 안 될 때 먹는 가루약을 당장 어디에 쓸까.

차라리 의원이 있는 다른 마을로 가 보자는 이야기를 누가 꺼냈을 때.

“새, 틴.”

할아버지가 숨을 거뒀다.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입을 벌린 채였는데, 그 얼굴은 묘하게도 원통해 보였다.

∞ ∞ ∞

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새틴은 저번에 할아버지에게 한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빨래를 밟으며 지루함을 달래려고 한 이야기였는데 말이 씨가 되어 버렸다.

‘내가 진짜 플래그를 꽂았나?’

지금의 평화가 좋다느니, 계속 이렇게 살면 좋겠다느니.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곳의 장례 방식에 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새틴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이곳은 화장 문화가 보편적이었다.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마을 화장장으로 옮겼다.

닫힌 가마 안에서 시신이 타는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 무어라 기도를 했다. 새틴은 멀뚱히 선 채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너무 경황이 없으면 눈물도 안 나오지.”

사람들은 새틴이 울지 않는 모습을 보고도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알아서들 좋은 쪽으로 해석했다. 꼬이고 모난 데 없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누나가 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다워.’

시신을 태우고 곱게 빻은 골분을 받는 것으로 장례가 끝났다. 너무 상심하지 말고 기운 내라며 어깨를 두드리던 마을 사람이 돌아가기 전에 말했다.

“어차피 한동안 싱숭생숭할 텐데 클로버랜드에 다녀와. 밭은 내가 봐줄게.”

“클로버랜드요?”

“원래 장례 끝나면 한 번씩 가.”

무슨 소리일까. 장례 치르느라 심신이 지쳤으니 도시 관광이라도 하란 뜻인가.

새틴이 눈만 슴벅이고 있으니 마을 사람이 부연했다. 새틴이 상식에 어둡다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 모양이다.

“우리 마을은 작아서 신전이 없잖아. 클로버랜드에 가서 신전에 들르란 소리야.”

“신전에는 왜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해 달라고 하는 거지.”

“아, 그런 뜻…….”

장례 절차가 너무 간단하더라니.

새틴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을 사람이 어깨를 으쓱였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닌데 보통은 다 하니까.”

“클로버랜드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숲을 빙 돌아야 해서 꽤 걸리지. 갔다가 오는 데 한 사흘은 걸릴 거야.”

“꽤 머네요.”

“우리 마을이 좀 외져야 말이지. 아무튼 갈 거면 저기 잡화점에 말해 놓을게. 그 집 마차 타고 나가. 짐마차긴 해도 앉을 자리는 있어.”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마을 사람을 보낸 후 새틴은 혼자 남아 집을 정리했다. 계속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이 없으니 일이 한결 수월했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골분이 담긴 항아리를 침실 한구석에 두고 새틴은 밖으로 나왔다. 날이 더워지며 텃밭의 김매기는 하루 일과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잡초를 뽑으며 내일 할 일을 생각했다.

‘대강 챙겨서 가면 되겠지.’

그동안 품삯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빼서 모아 둔 돈이 있었다. 염소 한 마리 못 살 돈이지만 클로버랜드에 다녀오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삯마차를 타고 어딜 가 본 적은 없어도 그간 주워들은 게 많아 이곳의 물가에는 익숙했다.

기왕 도시까지 가는 김에 구경을 좀 하다 오면 어떨까.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던 새틴은 문득 의아해졌다.

‘이것도 이야기 전개상 일어날 일이었을까?’

힐링 일상물에도 사건은 일어나는 법이다. 주변인의 죽음도 그런 사건 중 하나다.

현실에서 아는 사람의 죽음은 결코 사소하다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픽션에서 노인의 죽음은 그리 대수롭지 않다.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인생의 변곡점이 되기도 하고.

‘내가 진짜가 아니라서일까.’

할아버지의 죽음은 새틴에게 약간의 당혹감을 주었을 뿐 다른 감상을 남기지 않았다. 이번 일로 새삼 성장하기에 새틴은 죽음에 익숙했다. 앞으로의 일상에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다녀와서도 그냥 잡초나 뽑고 밥이나 해 먹고 살겠지.’

새틴의 생각은 꼬박 하루 걸려 클로버랜드에 도착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사실 지쳐서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체력이 많이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마차는 차하고 다르구나.’

장례 다음 날 아침 잡화점의 짐마차를 얻어 타고 가까운 마을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클로버랜드행 삯마차를 탔다.

날이 더웠다. 함께 탄 승객들은 다들 쿰쿰하게 땀 냄새를 풍겼다. 지붕이 없는 마차인데도 땀 냄새가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다행히 후각은 금세 마비됐다.

그 상태로 마차는 두어 시간 달리다 잠깐 쉬고, 또 두어 시간 달리다 잠깐 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클로버랜드에 진입했을 때는 이미 해가 떨어진 후였다.

‘피곤해 죽겠네.’

내내 앉아 있었을 뿐인데 새틴을 비롯한 승객들은 모두 녹초가 되었다.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나?’

마차에서 내리는데 어째 관문 근처가 붐볐다. 가만 보니 단순한 행인들이 아니었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무슨 일 있소?”

새틴의 바로 다음에 내린 승객이 행인에게 물었다. 행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아, 하더니 설명했다.

“며칠 전에 치안청에 협박 편지가 왔대요. 클로버랜드 사람들을 깡그리 죽이겠다나.”

“아니, 그런 미친놈이 다 있나.”

새틴도 같은 생각이다. 어째 그런 미친놈이 다 있을까.

“그래서 순찰이 늘었어요. 불심 검문도 하고…….”

“그럼 위험한 거 아니오?”

“하하, 벌써 몇 번이나 그런 적이 있었어요. 매번 아무 일도 없었고. 그냥 웬 정신 나간 사람이 장난을 치는 거겠죠.”

행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갈 길을 갔다. 이곳엔 양치기 소년 동화가 없는지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괜히 엿듣고 불안해졌던 새틴도 걱정을 접었다.

‘판타지 세계의 장난 전화 같은 건가 보네.’

새틴은 어기적어기적 사람들을 따라 여관으로 향했다. 너무 피곤해서 도시 풍경을 구경할 정신도 없었다.

여관에서 제일 싼 방을 빌렸다. 식사를 하겠냐는 종업원의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멀미를 좀 했는지 입맛이 없었다.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뭐가 들어갈 성싶었다.

“그럼 편히 쉬세요.”

방을 안내해 준 종업원이 떠나자마자 새틴은 늙은이처럼 신음하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을 기운도 없었다.

“역시 침대가 좋구나…….”

오두막에서는 할아버지에게 침대를 양보하느라 늘 딱딱한 바닥에 이불을 여러 겹 깔고 잤다. 그 생활이 벌써 4년. 모처럼 제대로 된 침대에 누우니 몸이 절로 녹아내렸다. 새틴은 언제 잠든 줄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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