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이튿날, 새틴은 꽤 늦은 시간에야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아침 뭐 먹지.’ 하고 생각하다 낯선 천장을 보고 아침을 차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어제 저녁을 굶은 탓인지 허기가 심해 오래 뭉그적거리지 않고 로비로 내려왔다. 어제 본 종업원에게 추천받은 식당에서 아침을 때우고 신전을 찾아 나섰다.
간밤에 아무 생각 없이 고른 여관은 시장 근처였다. 길을 모른 채 내딛는 걸음은 새틴을 자연히 시장으로 안내했다.
‘영화 같네.’
클로버랜드의 성문을 막 지났을 때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경이 이제야 보였다. 다른 사람들 눈에 도회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새틴에게는 이곳 풍경 역시 아기자기하게 느껴졌다.
매끈하지만 규격이 다른 돌들이 촘촘히 깔린 길이며 목조 골격이 드러난 건물 사이의 빨랫줄, 물건을 파느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부인의 머릿수건, 짐을 잔뜩 싣고 하품하며 발을 옮기는 노새.
서양 시대물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게임 그래픽 같기도 했다. 아무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장을 지나 광장에 이르자 슬슬 목적지가 보였다. 혹시 도시에서 길을 잃으면 순찰 중인 경관에게 물을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낮은 건물들 너머로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보였다. 모르고 봐도 신전이었다.
위치는 알았으나 걸어서 가기는 멀 듯해 주위를 둘러보다 마차를 탔다. 마차 승강장 옆에 역마차의 노선도가 그려진 팻말이 있어 타야 할 마차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 꽤 적응 잘하고 있지 않나.’
그렇게 자화자찬했지만 사실은 좀 걱정도 들었다. 신전까지 가기는 어렵지 않은데 여기로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짐 챙겨서 나오기를 잘했네.’
어제 묵은 여관을 다시 찾느니 신전 근처의 여관에 묵는 편이 낫겠다. 그곳 종업원에게 물으면 클로버랜드를 나가는 마차를 어디서 타는지도 알 수 있겠지.
마차는 간혹 멈춰 승객을 내리고 실었다. 새틴은 그때마다 다른 승객에게 여기가 신전 근처냐고 물었다. 시골뜨기티가 나는지 다들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힐링 일상물의 법칙이 여기서도 어긋나지 않아 다들 인심이 좋았다.
“젊은이, 여기서 내려야 돼.”
“고맙습니다.”
할아버지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부인의 도움으로 새틴은 헤매지 않고 신전에 도착했다.
아직 정오도 되기 전인데 신전에 가는 사람이 꽤 많았다. 새틴은 이곳의 신전은 성당처럼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사람들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 생각은 곧 바뀌었다.
“번호표 받으세요, 번호표.”
수습 신관으로 보이는 소년이 숫자가 적힌 종이를 나눠 주고 다녔다. 엉겁결에 새틴도 받았다.
‘……은행?’
흰옷을 입은 신관들이 저마다 창구를 하나씩 맡고 앉아 있었다. 익숙하게 번호표를 받아 든 사람들은 차례가 되면 창구로 가 무어라 기도했다.
“번호표 받으신 분들은 이쪽으로 줄 서세요!”
소년 신관의 외침을 따라 새틴도 줄에 섰다. 새틴의 앞에 선 사람은 배낭을 멘 젊은 여자였는데 눈이 마주치자 싱긋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네…….”
새틴은 무심코 대꾸하고 멋쩍게 웃었다.
“기도하러 오셨나 봐요.”
“네, 뭐.”
여자는 붙임성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아주 예뻤다. 여태 발견하지 못한 것이 의아할 만큼.
새틴은 무심코 생각했다.
‘꼭 주인공 같네.’
대기 줄은 느리게 줄었다. 새틴의 앞 차례인 여자가 창구 앞에 앉았을 때는 족히 삼십 분 넘게 지난 후였다.
이제 곧 차례라 새틴은 부르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방금 앉은 여자의 자리에서 신관이 “다음!” 하고 외쳤다.
‘뭐야.’
신관은 다음 사람을 찾고 있지만 여자는 용건이 끝나지 않은 기색이었다. 창구의 턱을 탕탕 두드리며 언성을 높였다.
“아니, 정말이라니까요! 나중에 일 터지고 나면 늦어요!”
“신자님, 걱정하시는 이유는 알겠지만 분명 착각일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냐고요.”
“몇 년 전에 치안청에서 흑마법사를 처치했어요. 그때 얼마나 시끄러웠는데 또 여기에 흑마법사가 나타나겠어요.”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요. 네?”
“아마 그때 남은 흔적을 보고 착각하셨을 거예요.”
“아니면요? 아니면 어떡하실 건데요?”
“확실한 증거를 찾아서 오시면 됩니다. 그냥 의심이 된다는 말만으로는 저희도 나서기가 어려워요. 차라리 치안청에 얘기해 보시면 어떨까요?”
결국 여자는 씩씩거리며 돌아섰다. 아까는 붙임성 좋게 모르는 사람에게도 인사를 건넸는데 이제 부딪치는 사람은 다 패 버릴 기세다. 새틴은 여자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창구로 향했다.
여자와 실랑이하던 신관은 직업 정신이 매우 투철했다. 조금 전의 일은 새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친절한 미소로 새틴을 맞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친지가 사망해서…….”
“기도를 받으러 오셨군요. 사망하신 친지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지요?”
“……그게 사정이 있어서 이름을 모릅니다.”
신관은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친절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시군요. 그럼 기도하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쥐고 신관이 무어라 길게 읊었다. 은유가 너무 많아 의미는 잘 모르겠으나 경건하긴 했다. 새틴도 괜히 두 손을 모았다.
기도를 마친 후 신관이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고 말했다.
“부디 죽은 자가 생전에 시험을 잘 치렀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가란 말씀은 안 해 주시나요?”
새틴의 물음에 신관이 웃었다.
“자격이 있다면 갈 것이고 없다면 가지 못하겠지요.”
“앗, 네…….”
이 세계의 종교는 상당히 냉정하구나.
면벌부에 관해서는 새틴도 회의적인 입장이었던지라 가만히 수긍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관이 손을 들어 다음 대기자를 불렀다.
이걸로 클로버랜드의 볼일은 끝났다.
∞ ∞ ∞
‘아직 안 갔네.’
신전 앞에서 여자를 발견하고 새틴은 눈길을 주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고뇌 중이었다. 높이 묶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느리게 하느작거렸다.
아는 체를 할 만한 사이도 아니라 그냥 지나치려던 새틴은 여자의 중얼거림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다 태워 버릴까.”
뭘 태워 버린다는 거지. 설마 신전을?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신전을 불태우는 건 너무 막 나가는 처사 아닌가.
‘그냥 한 말이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홧김에 하는 말이겠지. 새틴은 괘념치 않고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새하얀 빛이 모여들었다. 무슨 현상인지는 몰라도 신비로웠다. 시선을 빼앗기고 서 있으니 여자가 이쪽의 기척을 눈치채고 중얼거림을 멈췄다.
“왜 그렇게 봐요?”
“아름다워서요.”
새틴의 입에서 무심결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여자가 픽 웃었다.
“많이 듣는 얘기예요.”
혹시 외모에 대한 평가인 줄 알았을까. 새틴은 얼른 덧붙였다.
“얼굴 얘기는 아니었어요. 못생기셨단 얘긴 아니고 주변에 반짝이는 그게 아름다워서…….”
“무슨 말이에요?”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새틴은 서서히 흐려지는 빛의 흔적들을 가리켰다.
“이거요. 반짝거리는 거.”
“뭐가 반짝거린다는 말이에요? 아무것도 없는데.”
여자는 새틴과 같은 곳을 보면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새틴은 졸지에 헛소리한 사람이 되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여자의 눈이 나쁘거나, 새틴의 눈이 나쁘거나. 새틴은 비관적인 생각부터 했다.
‘빛이 보이는 안구 질환이 뭐가 있지?’
백내장이니 녹내장이니 하는 병의 이름은 많이 들어 봤지만 구체적으로 증상이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새틴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뭐가 보였는데요?”
여자는 새틴이 입을 다무니 가까이 다가오며 캐물었다. 개수작이라도 부린다고 생각했을까. 새틴은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이젠 안 보여요. 아까 그쪽 주변에 반짝이는 게 있었는데, 제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보이지 않는다는데 괜히 우겨 봤자 말다툼이 될 성싶어 새틴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나 여자는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발 더 다가오며 또 묻는다.
“반짝거렸어요?”
“……네.”
턱에 손을 얹고 골똘히 생각하듯 눈을 굴린 여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새틴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까의 빛이 다시금 부옇게 일어났다.
“어, 어, 지금.”
새틴이 황급히 말하자 여자가 웃었다.
“당신, 재밌는 능력이 있네요.”
허공에 일렁이던 빛은 서서히 잦아들었지만 여자의 눈은 도리어 반짝였다. 직전의 고뇌는 모두 잊은 양 명랑해진 여자가 새틴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시간 있어요?”
“시간이야 있는데.”
시간은 많다.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갈 예정이지만 일단 오늘은 아무 일정도 없다. 다만 무슨 의도로 묻는지 몰라 새틴은 살짝 경계했다. 설마 웃는 얼굴로 나쁜 제안을 할까 싶으나.
‘모를 일이지.’
그동안 만난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오늘 만난 사람도 좋은 사람이리라 섣불리 기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이야말로 이야기의 역경이 시작되는 날일 수도 있다.
사실 그럴 가능성은 아주 낮다 생각하면서도 새틴은 일단 여자에게 물었다.
“무슨 용건이신지 먼저 알려 주실 수는 없나요?”
“음, 이런 데서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여자는 이제까지의 태도와 어울리지 않게 약간 쑥스러워했다. 검지로 정수리를 살살 긁다가 말했다.
“어쩌면 세상을 구해야 할 거 같은데…….”
미안하게도 새틴은 그만 무례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혹시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이를테면 머리에…….
‘혹시 할아버지 다음으로 돌봐야 하는 사람인가?’
여자는 새틴의 표정을 보고 생각을 짐작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설명했다.
“만약의 경우에 그렇다는 거예요. 당장은 흑마법사의 흔적을 쫓을 생각이에요. 당신이 있으면 일이 쉬울 것 같은데, 어때요? 보수라면 섭섭지 않게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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