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38화 (38/139)

38화

흑마법사라니. 판타지 소설에는 흔하게 등장하는 직업이지만 이 세계에 와서는 한 번도 흑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새틴은 지금 여자가 농담을 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새틴이 대꾸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여자가 내거는 조건이 더 상세해졌다.

“보수에 더해서 소개장도 써 줄 수 있어요. 내가 이 지역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 수도에 가면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요. 원하는 자리가 있으면 얼마든지 마련해 줄게요.”

“네에…….”

말만 들으면 사기꾼이 따로 없었다. 누나의 소설 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당장 달아났으리라.

새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여자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혹시 왕실에 줄을 대고 싶으면.”

“아니, 괜찮아요. 전 별로 바라는 게 없어서요.”

딱히 애를 태우려고 한 말이 아닌데 여자가 눈을 부릅떴다. 거절하는 사람을 처음 봤을 리도 없는데 약이 잔뜩 올라서는 따졌다.

“내가 어떻게 해야 도와줄 건데요? 당신 도움이 꼭 필요하단 말이에요.”

좀 전엔 새틴이 있으면 일이 쉬울 것 같다더니 이젠 꼭 필요하단다. 거절당할수록 집요해지는 성격인 듯했다. 새틴은 여자가 더 굉장한 조건을 걸기 전에 답했다.

“오늘 안에 끝나는 일이면 그냥 도와드릴게요. 내일은 집에 가야 해서.”

순식간에 여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 생각했어요. 일단 가죠. 점심부터 먹을까요? 내가 살게요.”

점심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지만 새틴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방문한 곳이다. 점심시간을 기다리며 시간을 때울 만한 곳을 알지 못했다. 여자에게 주도권을 넘기고 따라가면 한결 편할 테다.

신전을 등진 채 식당을 찾아 걷는 동안 여자는 다시 첫인상과 같은 모습을 찾았다. 붙임성 좋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 왔다.

“집에 간다는 얘기는 뭐예요? 집이 멀어요? 여기 사람이 아니에요?”

“네, 마차로 하루 정도 가야 돼요. 클로버랜드는 처음이에요.”

“그렇구나. 그럼 돌아갈 때 집까지 가는 마차를 빌려줄게요.”

자기 마차를 빌려준다는 걸까, 아니면 삯마차를 대절해 주겠다는 걸까. 어느 쪽이든 진심이라면 새틴으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돈이 많나 보네.’

이곳의 유행을 잘 모르다 보니 여자의 차림새만 보고는 부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주근깨 없이 흰 얼굴로 미루어 보건대 볕 아래서 고생하며 자란 사람은 아니리라고 짐작했다.

잠시 재잘대던 여자가 문득 생각났는지 물었다.

“근데 몇 살이에요? 우리 비슷한 또래 같은데.”

평범한 질문이나 새틴은 난처했다. 슬쩍 다른 데를 보며 대꾸했다.

“스물, 셋이요.”

스물셋이라고 할지 스물넷이라고 할지 잠깐 망설였다. 남이 들으면 무슨 그런 고민을 하느냐고 할 테지만 새틴으로서는 어려운 문제였다.

그간 새틴이 지낸 마을에는 비슷한 또래가 없었다. 모두 새틴보다 훌쩍 나이가 많거나 확연히 어렸다. 대충 얼굴만 봐도 손윗사람인지 손아랫사람인지 분간이 가다 보니 나이를 말할 일이 잘 없었다.

새삼 나이를 소개하자니 영 어색하고 자꾸 틀린 기분이 들었다.

‘스물넷이라고 할 걸 그랬나.’

의미 없는 후회를 잠깐 하는데 여자가 반가워하며 외쳤다.

“나랑 동갑이네!”

이 말을 듣고 나이를 올리면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일 테지.

이제 새틴은 스물세 살이 되었다.

∞ ∞ ∞

적당한 식당을 골라 들어갈 때쯤 새틴과 여자는 서로에 관한 정보를 꽤 많이 교환한 후였다.

여자는 마법사였다. 아직 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변변치 않은 실력이라며 겸양을 떨었지만 그래도 새틴은 감탄했다. 여자는 새틴이 태어나 처음 보는 마법사였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듣기로 마법사는 아주 드물다고 했다. 큰 도시에도 기껏해야 두엇뿐이라던가. 마을 사람 중엔 마법사를 본 적이 있는 사람보다 본 적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

여자는 직업 외에도 자질구레한 신변잡기를 털어놓았다. 정해진 일과가 지루해 집을 나왔다는 말에 새틴은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알았는데 여자는 상당히 부유하고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듯했다. 그런 집안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보니 새틴은 여자의 마음을 섣불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새틴은 “아, 그렇구나.” 하고 기계적으로만 반응했는데 여자는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그동안 혼자 다니느라 이야기할 곳이 없어 답답했노라며 별별 하소연을 다 했다.

그러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노릇하게 익은 칠면조 다리를 크게 토막 내며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새틴이 쳐다보자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직까지 이름도 말을 안 했네. 나는 리타야. 성은 사정이 있어서 밝히기가 어렵고.”

리타. 흔한 이름인데 이상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불쾌감이 아니라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남의 이름을 듣고 뜸을 들이면 이상해 보일까 봐 새틴도 일단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새틴…….”

새틴이 말꼬리를 흐린 것은 일부러가 아니다.

새틴, 리타, 클로버랜드. 따로 들었을 땐 별생각 없던 단어들이 같은 자리에 모이니 하나의 그림을 그렸다.

‘다크에이지하고 너무 많이 겹치는 거 아니야?’

검은 곱슬머리의 새틴, 신전이 있는 클로버랜드, 신분을 감춘 마법사 리타.

누나의 추천으로 본 다크에이지는 원래 오래된 판타지 소설이었다. 얼마 전, 물론 얼마 전이라고 해도 이곳에서 지낸 시간을 생각하면 꽤 예전이지만 아무튼. 얼마 전부터 개정판이 웹소설로 연재되고 있었다.

‘1부 도입부가 어땠더라?’

이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면 더 기억이 잘 났을 텐데 그간 시간이 지나 떠오르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무슨 내용이었지?’

주인공은 케인. 금발에 눈이 푸른 전형적인 주인공 캐릭터로 직업은 기사다.

‘정식은 아니고 수습이었던 거 같은데…….’

프롤로그에서 케인은 악랄한 흑마법사에게 붙잡혀 실험체가 될 위기에 처한다. 위급한 순간 다행히 신전 기사단이 나타나 흑마법사를 처단한다.

자연스레 성기사를 동경하게 된 케인은 신전 기사단에 들어가고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성 마법에 재능이 없어 다른 기사단에 들어간다.

그다음의 내용이 가물가물해 새틴은 억지로 쥐어짜 냈다.

‘리타가 나타나서 모험이 시작됐지.’

케인이 지내던 클로버랜드에 마법사 리타가 나타난다. 케인은 흑마법사의 흔적을 찾았다고 주장하는 리타를 도와서.

‘어, 신관도 한 명 있었던 거 같은데.’

탱딜힐의 조합이었다고 새틴은 어렴풋이 기억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좀 격식 있는 이름이었는데.’

알렉산더? 나폴레옹? 새틴은 일단 기억나지 않는 이름은 뒤로 넘겼다.

용사 파티의 구색을 갖춘 케인 일행은 1부 내내 흑마법사의 흔적을 추적하다가 진짜 흑마법사를 찾아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흑마법사는 과거 케인을 붙잡고 있던 흑마법사의 제자다.

이 부분은 좀 더 분명히 기억이 났다.

‘마왕 소환을 하려고 했지.’

이름은 새틴. 검은 곱슬머리의 새틴은 케인과 달리 죽은 흑마법사를 존경해 왔기에 그의 복수를 하려 한다. 신전 기사단이 있는 클로버랜드에 마왕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줄거리를 생각할수록 미심쩍어졌다. 너무 많은 부분이 겹쳤다.

‘내가 그 새틴은 아닐 텐데. 아닐, 텐데?’

확신할 수 없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새틴의 신변에 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야, 그래도 아닐 거야. 정말 아닌가?’

새틴이 눈썹 사이를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으니 맞은편에서 리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심각해?”

“아니, 그냥 예전 일이 생각나서…….”

사람을 앞에 두고 고민을 해 봐야 답은 찾을 수 없을 테다. 오두막으로 돌아가서 차근히 생각을 하기로 하고 새틴은 당장의 의문을 미뤄 두었다.

그사이 리타는 칠면조 고기를 반 가까이 먹어 치웠다. 새틴도 얼른 식사를 시작했다.

먼저 식사를 마친 리타가 배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먹으면서 들어.”

“응.”

“옛날에 흑마법사가 붙잡혔을 때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몇십 년 전인데 그땐 흑마법사에 관한 일을 모두 신전 기사단이 주도했대.”

새틴은 고기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에이지에서 케인을 붙잡고 있던 흑마법사를 처치한 것도 신전 기사단이다. 판타지 소설로 배운 상식에서 보면 흑마법사는 신전과 상극이니 리타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말이야. 가장 최근의 흑마법사 토벌 때는 신전이 곁다리였어.”

“최근?”

“들은 적 없어?”

“내가 아주 작은 마을에 살아서 바깥 이야기를 잘 몰라.”

“아휴, 정보 불균형이 정말 심각하네. 나라가 어찌 되려고. 아무튼 4년 전 얘기야.”

다크에이지에서 리타는 신분을 감춘 공주다. 만약 이곳이 다크에이지 안이라면 리타가 지역별 정보 불균형을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진짜 다크에이지일까?’

새틴은 복잡한 속내를 내보이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고기를 씹었다.

“그때 흑마법사를 잡는 데 가장 크게 공을 세운 곳이 어딜 거 같아?”

다크에이지의 전개를 생각하면 신전 기사단이라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조금 전 리타는 신전이 곁다리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느 쪽의 정보를 우선해야 할까.

새틴이 눈을 도르르 굴리며 고민하고 있자니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는지 리타가 말했다.

“치안청이야.”

“아, 치안청.”

새틴이 사는 마을에는 치안청이 없지만 치안청 소속 직원은 한 명 상주하고 있었다. 워낙 별일이 없는 작은 마을이라 치안청 직원은 매일 같이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고 지냈다.

클로버랜드 치안청은 아마 그보단 바쁠 터. 어젯밤에도 관문 앞에서 경관을 여럿 봤다. 다들 도시 치안을 위해 여러모로 힘쓰고 있겠지. 그래서 흑마법사를 잡는 일에도 직접 나섰을까?

‘이 부분은 다크에이지랑 다르네. 역시 아닌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