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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41화 (41/139)

41화

방금까지만 해도 우중충하고 볼품없던 공터가 신비롭게 보였다. 물론 새틴에게만 그리 보일 테다. 마력을 보지 못하는 에드워드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 상태로 몇 초가 지났다. 아마도 십 초는 넘었으리라. 에드워드가 “앗.” 하고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구덩이 흔적의 주변에 붉은 얼룩이 여럿 나타났다. 아주 높은 데서 페인트를 떨어뜨리기라도 한 듯한 모양이었다. 나름의 법칙이 있는지 어느 것은 진하고 어느 것은 연했다.

리타가 몸을 일으켰다. 점차 희미해지는 마력 한가운데 서 있는 리타는 꼭 산신령 같았다.

‘요정이라기엔 너무 강해 보이니까.’

키가 크고 날렵한 체형에 높게 묶은 긴 머리. 리타는 게임으로 치면 마법사보다는 전사 클래스에 가까운 외모였다. 리타의 발밑에 생긴 붉은 얼룩은 얼핏 적을 해치운 흔적처럼 보였다.

리타가 허리에 손을 얹고 새틴과 에드워드를 돌아보며 방금 쓴 마법에 관해 설명했다.

“여기서 누가 마법을 쓴 적이 있는지 확인한 거야. 마법은 눌러 쓴 글씨 같아서 며칠간 그 자리에 자국을 남겨. 사라지는 속도로 언제 일인지 유추할 수 있어.”

새틴은 볼펜 자국이 남은 접착식 메모지를 떠올렸다.

‘만들어서 팔면 부자 되려나?’

주인공이 판타지 세계로 차원 이동하거나 판타지 세계 인물에 빙의하는 소설에서는 현대 문물을 전파하는 에피소드가 종종 나온다. 기술적으로 발달한 세상에서 왔다는 어드밴티지를 이용한 부의 축적은 대리 만족이 끝내준다.

이내 새틴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랬다간 장르가 정말로 달라지잖아.’

마왕을 소환해야 할 악역이 주연 대신 여기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문명 발전에 기여하다니. 안 될 말이다.

새틴은 어느 소설에 들어왔는지 모를 때에도 눈에 띄는 짓을 하지 않고 살았다. 이제 와서 갑자기 일확천금의 꿈이 생기지는 않았다.

“이런 데에서 마법을 썼다는 게 의심스러워.”

“……어떤 점에서?”

새틴은 딴생각에 빠져 있느라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다행히 리타는 핀잔하지 않았다.

“봐. 저마다 사라지는 속도가 다르잖아. 최근 여러 차례 여기서 마법을 썼다는 뜻이야. 시신 태운 자리에서 대체 무슨 마법을 썼을까?”

마법 얼룩을 보느라 목을 쭉 빼고 있던 에드워드가 대꾸했다.

“시신을 태우느라 마법을 쓴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어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리타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시신을 태울 때 마법을 쓴 적은 한 번도 없대. 신전에 가기 전에 관청에 들러서 확인했어. 그리고 최근에는 시신을 태우러 온 적도 없고.”

그렇다면 확실히 기이한 일이다. 서문을 나와 마차를 타고 10분 남짓, 내려서도 한참 걸었다. 리타처럼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우연히 들를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장소의 용도는 화장터. 굳이 여기에 와서 마법을 쓴 이유가 뭘까.

새틴과 에드워드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리타가 먼저 추측한 바를 이야기했다.

“마법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말이야. 같은 장소에서 마법을 반복적으로 쓰는 건 주로 실험을 할 때야. 같은 조건을 유지해야 실험의 정확도가 높아지니까.”

마법을 잘 모르는 새틴이 듣기에도 일리가 있었다. 리타가 말을 하며 가장 진한 얼룩 쪽으로 이동했다.

“공터라면 여기 말고도 분명 있을 텐데 여기를 실험 장소로 쓴 데는 이유가 있겠지. 여기서만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든지.”

새틴과 에드워드는 별생각 없이 리타를 따라 움직였다. 세 사람은 가장 짙은 얼룩을 가운데 두고 섰다.

“화장터에서만 할 수 있는 실험이 대체 뭐가 있을지 나는 짐작이 안 되더라고. 흑마법의 흔적이 아닐까 추측한 이유는 그래서야.”

“여기에 다녀간 마법사를 찾아서 확인할 셈이군요.”

“맞아. 흑마법이 아니면 좋겠지만, 진짜 흑마법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확인할 생각입니까? 그 마법사가 또 여기 나타난다는 보장도 없는데.”

“보장은 없지만 다시 올 확률이 크다고 생각해.”

리타는 에드워드를 향해 씩 웃었다.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고양이가 배추 농사에 성공했다는 말을 해도 믿을 만한 표정이다.

“바로 최근까지 마법을 실험하던 사람이 하필 우리가 오기 직전에 성공했을 리 없잖아. 공식을 발견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경험에서 비롯한 추측이었다. 에드워드는 설핏 눈살을 찌푸렸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농도가 조금씩 다른 수많은 얼룩들은 정체 모를 마법사의 근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했다. 짧은 주기로 이 장소에 방문하며 성실하게 실험에 임했겠지.

에드워드가 아무 말 하지 않으니 리타는 새틴에게 물었다.

“넌 뭐 궁금한 거 없어?”

“궁금한 게 있긴 한데.”

“말해 봐.”

“흑마법이라는 게 정확히 뭐야?”

리타는 질문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왠지 민망해서 새틴은 에드워드를 쳐다봤는데 에드워드도 리타와 같은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곧 경악해서 입을 벌렸다.

“넌 그것도 모르면서 여길 따라왔어?”

자기가 도와 달래서 따라왔는데 저리 말하다니.

새틴은 몹시 억울했지만 따지지 못했다. 따질 새도 주지 않고 리타가 다다다 쏟아 냈다.

“흑마법은 규칙을 어긴 마법을 말하는 거야! 규칙도 아마 모를 것 같으니 알려 줄게. 첫째, 인격을 훼손하지 않을 것. 둘째, 생명을 이용하지 않을 것. 셋째, 망자를 모욕하지 않을 것!”

세 번째 규칙을 말할 때는 유난히 목소리가 높았다. 이제 알겠냐고 묻듯 리타가 쳐다봤지만 새틴은 멋쩍어하며 되물었다.

“셋 다 비슷한 느낌인데,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그런 뜻이야?”

리타가 어이구, 하고 이마를 짚었다. 에드워드가 대신 설명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번에 흑마법사를 잡을 때만 해도 희생자가 나왔다고 했잖아요.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마법사들은 대부분 대량 살인자들입니다.”

“야, 그렇게 말하니까 마법사가 다 사람 죽이는 나쁜 놈들 같잖아.”

리타가 기막혀하며 반발했지만 에드워드는 들은 체하지 않고 흑마법에 관해 이어 설명했다. 리타보다 친절하게.

“인격을 훼손하지 말라는 것은 정신을 조종하지 말란 뜻입니다. 생명을 이용하지 말란 건 사람에게 실험을 하지 말란 뜻이고, 망자를 모욕하지 말라는 건 시신을 되살리지 말란 뜻이죠.”

“아, 그런 뜻…….”

대충 흑마법의 정의를 이해한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리타와 에드워드가 저희끼리 무어라 아옹다옹했지만 그 내용은 새틴이 알 바 아니었다.

곧 다툼에 질린 리타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여기서 밤까지 기다릴 거야.”

별로 상세한 설명은 아니었다. 새틴이 빤히 쳐다보자 슬쩍 덧붙였다.

“오늘 안에 수상한 마법사가 나타나면 좋겠지만, 안 나타날 수도 있어. 며칠 더 도와주면 보수를 충분히 줄게.”

일이 생각보다 길어질지 모른다는 얘기는 미리 했어야 하지 않나.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나?

새틴은 그런 의심을 하면서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새틴도 알고 싶다.

다크에이지의 전개대로라면 여기서 나타날 흑마법사는 새틴 자신이다. 물론 주인공 일행과 바로 맞닥뜨리지는 않는다. 놓쳐서 다시 흔적을 찾고, 겨우 꼬리를 잡고, 쫓고 쫓다가 마왕을 소환하고 있을 때 비로소 얼굴을 본다.

그런데 새틴은 흑마법이 뭔지 오늘 처음 알았다. 지난 4년 동안 마왕이란 단어를 입에 담아 본 적도 없다.

그럼 여기서 흑마법(으로 의심되는 마법)을 실험하는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이야기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 ∞ ∞

세 사람은 숲에 몸을 숨기고 공터를 감시했다. 그러는 사이 하늘이 어둑해졌다. 처음부터 밤을 새울 생각이었던지 리타는 가진 물건이 많았다. 메고 있던 배낭 안에서 모포는 물론 육포며 마른 빵 따위가 한 아름 나왔다.

주섬주섬 받아 들던 에드워드가 의문을 표했다.

“성냥은 없습니까?”

“없어. 난 불 마법을 하나 쓸 줄 알거든.”

새틴은 이미 알던 사실이다. 리타가 신전 방화를 고민하던 모습을 봤으니까. 반면 에드워드는 의외라는 듯 리타를 쳐다봤다.

“추적 마법을 연구한다기에 다른 마법은 쓰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마법사들은 공식을 공유하지 않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난 좀 특이한 경우라서.”

저와 똑같이 마법에 관해서는 일자무식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에드워드는 상식이 있었다. 새틴은 괜히 말을 얹지 않고 리타의 말을 다 알아들은 척 고개를 주억였다.

리타가 배낭을 여미며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불을 피우면 안 되지. 흑마법사가 불을 보면 나타나지 않을 거 아냐.”

아까까진 그래도 추측이라고 덧붙여 말했는데 이제는 흑마법사라고 단정 짓고 있다. 물론 새틴도 흑마법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다.

‘흐름은 바꿀 수 없는 법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새틴이 무언가 해 버린 탓에, 혹은 하지 않은 탓에 전개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얼렁뚱땅 무언가 진행 중이다. 새틴이라는 변수는 결국 거대한 강물을 가로막는 손바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시간 여행이나 회귀를 소재로 한 픽션 중에는 미래를 바꾸려 애쓰지만 끝내 바꾸지 못하는 주인공이 많이 나온다. 새틴은 지금 그런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딱히 바꾸려 애쓴 적이 없긴 하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말이다.

“언제 그자가 나타날지 모르니 조용히 하는 게 좋겠어.”

지금까지 제일 큰 목소리로 말하던 리타가 쉿 하더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새틴과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히 육포를 뜯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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