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전개대로라면 마왕을 토벌하러 가야 할 세 사람이 여기 다 모여 있는데 셋 모두 딴생각 중이다. 케인은 설마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도 안 하는 눈치고.
골머리를 앓는 사람은 오직 새틴뿐이었다.
‘잠자코 있으면 되나? 그래도 되나?’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든 굴러갈지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새틴을 대신해 케인이 흑마법사가 되고, 리타가 그 흔적을 찾고, 우연히 에드워드와 마주쳤듯 어름어름 마왕 출현 사태까지 왔다. 어떻게든 구색은 맞았다.
저마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사이 시간이 조금 흘렀다. 케인은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쳐다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저녁 식사해야지.”
새틴을 보며 하는 말이었다. 새틴은 엉겁결에 “어어.” 하며 따라 일어났다. 일어나서 보니 리타와 에드워드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먼저들 다녀와. 우린 좀 더 얘기를 해야겠어.”
리타가 그리 말하며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케인이 대꾸도 없이 성큼 발을 옮겨서 새틴은 허둥지둥 뒤를 쫓았다.
∞ ∞ ∞
여관 안에도 식당이 있는데 케인은 굳이 바깥으로 나왔다. 그 뒤를 따라가며 새틴은 혹시 리타와 에드워드가 뒤따라 나오지 않을까 싶어 여러 번 돌아보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꼼짝없이 케인과 단둘이 식사를 하게 됐다.
‘불편한 건 아니지만…….’
점심도 둘이서 먹었다. 이제 와 새삼 둘만의 식사가 불편할 리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을 뿐.
점심을 먹으며 케인은 별로 중요치 않은 질문들을 했다. 이를테면 새틴이 그간 지내던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을 찾아볼 생각은 안 했는지.
‘나한테만 안 중요한 질문이지.’
새틴을 절친한 친구로 생각하는 케인 입장에서는 궁금해할 만한 일들이다. 원래의 새틴이 케인을 아주 잘도 구워삶아 놨다. 악역 주제에.
케인은 새틴이 계속 반보 뒤에서 걷자 흘끔 보고 속도를 늦췄다.
“낮에 물어보려다 말았는데.”
“어, 어?”
“내가 무서워? 내가 널 해칠까 봐?”
케인은 표정도 없이 그리 물었다. 새틴은 가만히 케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이라 하늘은 짙은 분홍색이었다. 안개 때문에 보라색으로도 보였다.
케인의 얼굴에도 불그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은 그림자 탓에 유난히 그윽해 보이고, 콧대와 입술 끝은 여느 때보다 선명하다. 옅은 금발은 살구 속살 같은 색이 되었다.
케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조금 홀린 듯한 기분이 든다. 전혀 무섭지는 않다. 그럼에도 새틴은 종종 움츠러들었다. 반사적이었다. 케인이 아닌 다른 이유로 무서울 때가 있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아마 영원히 불가능할 거다. 기억 상실인 사람이 과거의 트라우마를 분명히 설명한다면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일 테니.
새틴은 겸연쩍어 고개를 저었다.
“안 무서워.”
“그럼 왜 그러는데.”
“나도 잘 몰라.”
새틴이 더 말하지 않자 케인은 물끄러미 새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걸음을 옮겼다. 탐탁잖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쨌든 더 말하진 않을 모양이다. 새틴은 얼른 쫓아가며 물었다.
“그런데 넌 왜 마왕을 소환한 거야?”
“난 그만뒀다고 했잖아.”
“아니, 전에 말이야. 왜 소환하려고 했어?”
케인은 새틴을 흘끔 보더니 팩 고개를 돌렸다. 번듯한 얼굴과 체격만 보면 어른처럼 보이지만 사실 케인은 겨우 스무 살이다. 노골적으로 토라진 내색을 해도 별로 징그럽지 않았다.
곧 케인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도 잘 몰라.”
조금 전에 새틴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새틴은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전혀 안 징그러운 건 아니네…….’
케인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새틴도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이미 마왕은 나타났다고 하고, 케인이 어떤 이유로 마왕을 불러내려 했는지는 몰라도 이제 관뒀다. 그럴 이유가 없어졌단 뜻이다. 물론 속마음을 볼 수 없으니 진짠지 알 방도는 없으나 케인이 그렇다고 하니 그리 믿어야지.
이윽고 케인은 적당한 식당을 골랐다. 간판이 너무 요란하지 않고, 손님으로 붐비지도 않는 가게였다. 한마디로 특색 없는 가게였다. 새틴은 케인이 무슨 기준으로 식당을 골랐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단골일까?
“전에도 와 본 데야?”
“아니.”
“그렇구나. 단골인가 했지.”
“아는 사람이 생기는 건 질색이야.”
뜻을 알기 어려운 말이었다. 새틴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케인이 빈자리에 앉으며 뚱하게 말했다.
“변명하게 되잖아.”
“무슨 변명?”
“그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
다시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케인은 더 말하지 않고 종업원을 불렀다. 지난번에 식사할 때는 아주 많은 양을 먹었으면서 오늘은 점심때도 이번에도 보통 사람만큼만 주문했다.
‘내숭?’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이제 와서 무슨 내숭을 떤단 말인가. 게다가 새틴이 뭐라고.
식사를 하는 동안 별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다만 케인은 간혹 손을 멈추고 새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럼 새틴은 예의상 “좀 먹을래?” 하고 음식을 권했다. 같은 음식을 먹고 있으니 사실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케인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속을 모르겠네.’
기묘한 식사를 마친 후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도시를 둘러싼 안개 때문에 달은 안 보여도 아직 문을 연 가게가 많아 그리 어둡진 않았다. 함께 걷는 사람의 얼굴 정도는 충분히 식별 가능했다.
케인은 몇 걸음인가 걷다가 불쑥 말했다.
“너 때문이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마왕을 소환하고 싶었던 이유 말이야.”
이게 무슨 말이지.
새틴이 눈을 껌벅이자 케인이 웃었다.
“네가 죽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죽어도 될 거 같아서 그랬어.”
∞ ∞ ∞
새틴과 케인이 식사를 하러 나간 사이 에드워드와 리타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상황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게.”
리타는 어느 면에서 이상하냐고 되묻지 않았다. 뭐 하나 빠짐없이 다 이상했다.
마왕? 이상하다. 마왕성의 요란한 등장? 이상하다. 마왕성을 소개하는 와이번? 이상하다. 무엇이 이상하지 않은지를 헤아리는 편이 빨랐다.
“목적이 뭘까요? 이 도시에 대체 무얼 할 셈일까요?”
“마왕이라고 하면 보통 생각나는 게 뭐지?”
“……세계 정복?”
에드워드의 진중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으나 틀린 말은 아니다. 이야기책에서 마왕은 대체로 어딘가를 정복하고 싶어 했다. 나라나 대륙, 세계. 스케일은 작가에 따라 다르다.
리타는 뺨을 긁적이며 헛웃음을 흘렸다.
“웃기는 일인데 다른 생각 나는 게 없네.”
“진짜라면 웃기다고 할 일이 아닙니다.”
“아무튼 그렇다고 치면 왜 바로 정복하려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을 때 뭔가 굉장한 마법이라도 쓰면 효율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텐데. 그 굉장한 마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잠깐 생각한 에드워드가 대꾸했다.
“시간이 필요한 방식을 쓰려는 걸지도요.”
“예를 들면?”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전술과 전략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마왕 역시 생각이 있을 수 있겠죠.”
“아, 뭐야.”
리타의 핀잔에 어깨를 으쓱인 에드워드는 곧 또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마왕이 세계 정복을 바란다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상상력이니 다른 방향에서 접근을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만들지 마세요. 저한테 묻는다고 알 리 없잖습니까. 그저 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거지.”
“에이.”
리타와 에드워드는 머리를 맞대고 상상력을 총동원했다.
“보물을 찾으러 왔을까?”
“그런 것치곤 별 움직임이 없군요.”
“인간 체험을 하러 왔다든지?”
“그렇게 요란하게 나타났는데요?”
“휴가는 어때?”
“우리의 대화를 아주 쓸모없게 만드는 가정이네요.”
“아, 공주를 납치하러 왔나?”
“그런 거라면 수도로 갔겠죠. 공주를 왜 여기서 찾겠습니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을걸?”
“무슨 소리죠?”
“아니, 그냥 그렇다고.”
“만약 우리가 짐작하지 못할 이유 때문이라면, 그야말로 짐작할 방법이 없군요.”
리타나 에드워드나 살면서 마왕을 본 적은 당연히 없고, 진짜 마왕을 봤다는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 보니 토론에서 대단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새틴과 케인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두 사람을 보니 슬슬 리타도 배가 고파 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틴에게 어느 식당에 다녀왔냐고 물으려던 리타는 깜짝 놀랐다.
“뭐야, 얼굴이 왜 그래?”
“어, 왜?”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
사실 과장이다. 하지만 새틴의 얼굴이 아까보다 꺼칠하게 느껴지는 건 정말이었다. 심각한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안색이 어두웠다.
새틴은 제 얼굴을 좀 더듬어 보더니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럴 리 없잖아. 여기 조명이 별로인가 봐.”
조명? 리타가 무심코 주변을 살피는데 새틴이 빠르게 말했다.
“어서 식사하고 와. 위기가 닥쳐서 식자재값이 뛰기라도 하면 전처럼 먹지 못할 수도 있어.”
맞는 말이긴 한데 그 얘길 새삼 지금?
리타가 대꾸를 하기도 전에 새틴은 쉬겠다며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케인은 알은체도 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진짜 찰거머리네.”
리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하는 말에 에드워드가 대꾸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보통 친구는 아니었을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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