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아직 마왕에 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새틴은 능력을 자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마법사인 리타와 달리 제 한 몸 지킬 수단이 변변찮다 보니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리타야 다크에이지에서도 마왕을 퇴치하러 가는 인물이다. 얼렁뚱땅 원작의 전개를 따라 굴러가는 작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있든 살아 나올 가능성이 크다.
반면 새틴은 그 자리에 필요하지 않다. 따라갔다가 괜히 개죽음이나 당할지도 모른다.
새틴은 멋쩍게 웃으며 슬쩍 사양하는 뉘앙스를 흘렸다.
“도움이 되는 부분보다 방해가 되는 부분이 더 클 것 같은데.”
“걱정돼서 그래? 에드워드를 데려가면 좀 다쳐도 바로 치료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
치료할 수 있으니 함부로 다쳐도 된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새틴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리타를 쳐다봤다. 리타는 광인처럼 반짝반짝 눈을 빛낼 뿐 새틴의 걱정을 짐작하지 못했다. 새틴이 요청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라 믿는 듯했다.
그때 잠자코 버섯 수프를 기다리던 케인이 한마디 했다.
“네 공명심 채우는 데 새틴을 이용하지 마.”
리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반박했다.
“이건 공명심이 아니라 정의감이라는 거야. 클로버랜드 사람들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어떻게 공명심이야.”
“정말 도와주고 싶을 뿐이면 치안청에 가서 돈이나 기부해. 애먼 사람 끌고 위험한 데 들어갈 생각 말고.”
새틴은 케인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는 않고 슬며시 고개만 끄덕였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리타는 새틴의 반응을 보더니 약간 시무룩해졌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뭐, 꼭 공명심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나한테는 무리일 거 같아.”
“그럼 할 수 없지…….”
리타는 더 강요하지 않고 새틴의 거절을 받아들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세 사람은 로비에 잠시 머물렀다. 투숙객들이 곳곳에서 심각하게 얘기 중이었다. 모두 신문을 한 부씩 들고 있다. 마왕이 나타났다는 게 진짠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고, 리타처럼 일단 가 보자며 눈을 빛내는 사람도 있었다.
‘큰돈은 사람을 모으는 법이지.’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유능하리란 보장은 없지만.
리타나 케인처럼 마법을 쓸 줄 알았더라면 새틴도 못 이긴 척 리타의 요청을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일확천금을 하고 싶단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아예 관심이 없지도 않았으니.
포상금의 일부를 나눠 받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잠깐 생각했다.
‘텃밭에 울타리를 만들 수도 있겠지.’
간혹 숲에서 나온 동물들이 텃밭의 작물을 해칠 때가 있었다. 새틴은 감정 표현이 그리 격렬한 편이 아니나 싹이 난 지 얼마 안 된 작물을 사슴인지 고라니인지 모를 놈들이 죄다 처먹었을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괭이를 들고 뛰쳐나갔다.
그러나 야생 동물을 붙잡기는 쉽지 않았다. 새틴이 몇 번이나 허탕을 치고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은 톱니로 된 덫을 놓으라고 조언했다. 할아버지가 다칠까 봐 결국 덫은 놓지 못했다.
포상금을 받아서 울타리를 설치하면 덫을 놓지 않고도…….
‘아, 할아버지 죽었지. 이제 그냥 덫 놔도 되겠구나.’
그리고 마법을 쓸 줄 알면 직접 사냥을 할 수 있으니 굳이 포상금을 탐낼 필요도 없다.
‘역시 마왕 토벌은 내 일이 아니야. 신경 쓰지 말아야지.’
새틴은 다시금 다짐했다.
물론 다짐을 늘 지킬 수는 없는 법이다. 다짐을 한 지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새틴의 결심이 흔들렸다. 급하게 계단을 뛰어 내려온 어느 투숙객을 보고 난 후였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남자가 종업원과 실랑이를 했다. 가만히 듣자 하니 가족이 아픈 모양이었다.
“아니, 애가 깨어나질 못한다는데 의사를 못 부르는 게 말이 됩니까?”
“저희도 안타깝지만, 지금 왕진을 올 수 있는 의사가 없대요. 다른 손님들도 계속 기다리고 계세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혹시 음식이 뭐 잘못된 거 아닙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다고!”
의사를 부르지 못한다는 종업원의 말에 투숙객의 어조가 거칠어졌다. 아이가 아파 여유를 잃어버린 듯하다. 종업원이 난색을 하고서 차분히 일렀다.
“자녀분만 그런 게 아니라 지금 도시 전체에 그런 아이들이 많아요. 노인들도 그렇고. 의사 말로는 전염병 같진 않고 마법적인, 그런 원인일 거래요. 의사한테 보여도 아마 치료법은 못 들으실 거예요.”
“그럴 수가…….”
조용한 술렁임이 로비로 번졌다. 슬슬 방으로 돌아가 게으름이나 부리려던 새틴은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케인이 한 걸음 앞서갔다가 돌아보았다.
“안 올라가?”
“올라가야지…….”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새틴은 종업원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투숙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자코 있어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야기가 알아서 굴러가는 중이니 새틴은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도 될 거라고. 어차피 새틴은 주인공도 아니고 지금 이 사태에 책임이 있지도 않으니까.
그런데 기분이 이상했다. 가당찮은 죄책감이 들었다.
옆에서 리타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한가 본데.”
새틴은 예전에 본 뉴스들을 떠올렸다. 오염물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이 병에 걸린 사례는 세계적으로 어디에나 있었다.
환경에 문제가 생기면 약한 존재들부터 타격을 받는 법이다. 농작물이 시들고, 물고기나 새들이 죽는다. 가축이 쓰러질 때쯤엔 사람들도 이미 안전하지 않다. 어린아이와 노인을 시작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병에 걸린다.
클로버랜드의 무고한 아이와 노인들이 아픈 이유가 정말로 검은 안개 때문이라면 이는 실로 심각한 문제였다. 안개가 나타난 지 겨우 하루 좀 넘었을 뿐이다. 이 속도라면 내일이나 모레쯤엔 장정들도 쓰러질지 모른다.
‘일주일이면 다 죽을지도…….’
클로버랜드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적지 않았다. 지금 이 여관에 묵는 사람만 해도 수십은 되었다.
“걱정돼?”
케인이 물었다. 새틴은 잠깐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은 가만히 뜸을 들이다 다시 물었다.
“네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야…….”
바로 대답을 하려던 새틴은 케인의 눈을 보고서 멈칫했다. 어쩐지 탐탁잖아 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무엇이 탐탁잖은지는 몰라도 구태여 틀린 답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새틴은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렸다.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어차피 나나 다른 사람이나 다 똑같이 위험한 상황일 텐데.”
“빠져나갈 방법을 알아볼까?”
“……우리끼리?”
“그럼 또 누가 있어?”
태연히 말하며 케인은 씩 웃었다. 여전히 시선은 묘하다.
새틴은 결국 한숨을 쉬며 조금 전 피한 답을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걱정돼. 노인과 아이들이 아프다잖아. 뭔가 도와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방법?”
“그러니까, 찾으면 있을지도 모른단 얘기지.”
사실 말하면서도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했다. 의사가 치료할 수 없는 병. 퍼지는 속도는 너무 빠르고, 당장 새틴 자신조차 안전하지 않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언가 하고 싶다. 지난 일을 현재에 덧씌우고 있다. 그때와는 상황이 다른 걸 알면서도.
내내 말이 없던 리타가 대뜸 새틴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시선은 케인에게 향했다. 리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우리가 빨리 가서 마왕을 처치하자.”
∞ ∞ ∞
에드워드의 객실에는 벌써 일곱 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 모두 같은 여관의 투숙객들이었다. 신전이 너무 붐벼 들어가지 못했다며 부디 일행의 병을 살펴 달라는 부탁을 하러 왔다.
‘정말 큰일이군.’
어제는 치안청이 난리더니 오늘은 신전이 난리였다. 신전뿐 아니라 곳곳의 의원들도 골머리를 앓는 중이라 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아이와 노인들이 픽픽 쓰러져 잠드는데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물을 뿌려도 깨어나지 않았다. 의사는 무슨 병인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고 하고, 신전에서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에드워드도 두 번째로 부탁받았을 때까진 신성 마법으로 잠든 아이들을 깨워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다음부터는 굳이 시도하지 않았다.
‘역시 저 검은 안개 때문일까.’
창문을 통해 저 멀리 검은 안개가 보였다. 안개는 어제와 달라진 데가 없었다. 여전히 불길하기 짝이 없다.
갑자기 나타난 안개와 갑자기 이상을 보이는 사람들. 둘 사이에 연관이 있을 거란 추측은 그리 비약적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어제 치안청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치안청에서 마법 사건을 담당하는 마법사 해리스와 만났다. 원래 안면이 있던 사이라 다른 사람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치안청에 꾸준히 협박 편지가 왔어. 벌써 몇 년이나 됐지.」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네. 그래서 나는 망상증 걸린 미친놈이 보내는 거라고 생각했지.」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은 이제 다르게 생각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선생님께선 지금까지 협박 편지를 보낸 사람이 이번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의심은 해 볼 만하지 않은가.」
말로는 의심이라 하지만 에드워드는 해리스의 표정에서 애매한 확신을 느꼈다. 몇 년째 잡지 못한 협박범에게 그 죄를 덮어씌우려는 걸지도 모른다.
「내 전임자는 그 협박 편지를 보내는 놈이 누군지 안다고 했었네.」
「커넬 선생님이요?」
커넬은 해리스 이전에 치안청에서 마법 사건을 담당했던 마법사로 에드워드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첫 만남은 4년 전 흑마법사 토벌 때였는데 상당히 거들먹거리는 사람이라 그때는 직접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다. 후에 다른 신관들을 따라간 공적인 자리에서야 몇 마디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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