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역시 주연이라 그런가?’
에드워드가 생각보다 쉽게 제안을 수락했다. 새틴은 남들에게 말 못 할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방문하는 신전은 어제의 치안청처럼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거리는 그럭저럭 차분한 분위기였던 데 반해 신전은 난리 통이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새틴이 중얼거리자 앞서 걷던 에드워드가 답했다.
“병자들의 가족일 겁니다.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해도 다들 돌아가질 못하죠.”
에드워드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불쾌해서는 아닌 듯했다. 신전 앞에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신관과 동행해서인지 이번에는 번호표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기도 창구로 다가가자 에드워드를 알아본 신관 중 하나가 어쩐 일로 왔냐고 묻더니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무슨 일인지 바로 이해한 모양이다.
“기껏 순례를 나갔는데 너도 참 운이 없다.”
신관은 일행에 관해서는 묻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제레미 신관님 뵈러 온 거지? 지금 소예배당에 계셔.”
“감사합니다.”
일행은 기도 창구를 지나 본관으로 들어갔다. 긴 복도를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오른편에 대예배당으로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었는데 에드워드는 왼편으로 꺾었다.
바깥의 소란이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쯤 케인이 중얼거렸다.
“신전은 처음이야.”
흘려들으려던 새틴은 저도 모르게 케인을 쳐다봤다. 케인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왜.”
“아니, 신전이 처음이래서…….”
다크에이지의 케인은 성기사가 되고 싶어 했는데 눈앞의 케인은 그간 신전에 와 본 적조차 없다니. 하기야 흑마법사가 됐는데 신전에 기도를 하러 다녔다면 그편이 더 이상하긴 했다.
이윽고 소예배당 앞에 이르렀다. 안내 표지판이 없어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문을 두드린 에드워드가 방문을 알렸다.
“제레미 신관님, 저 에드워드입니다.”
몇 초 후 “들어오너라.”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드워드가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 지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에드워드를 반겼다.
“이렇게 금방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구나.”
“돌아온 게 아닙니다. 여쭐 것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니?”
“이쪽은 한동안 신세를 지기로 한 분들입니다.”
에드워드가 옆으로 비켜서자 제레미의 얼굴이 보였다. 흰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남성으로 신관 중엔 제법 지위가 있는 편인지 옷자락에 복잡하게 수가 놓여 있었다.
리타가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서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에드워드가 저희에게 신세 지고 있어요.”
명랑하기보단 다소 경망스러운 언행에도 제레미는 언짢아하지 않고 웃었다. 에드워드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새틴은 제레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가볍게 묵례만 하고 말았다. 함께 왔을 뿐 딱히 소개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니 괜한 말은 생략했다.
그리고 새틴은 케인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인사하는 시늉이라도 하란 뜻이었다. 케인은 아까 에드워드가 묵는 여관에 찾아갔을 때처럼 벽이나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케인.”
새틴이 채근하자 그제야 케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꾸벅였다. 제레미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허허 웃을 뿐 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기에 에드워드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치안청의 공고문 보셨지요?”
“그래, 참,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해야 할지…….”
제레미가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공고를 보고 사람들이 위험한 행동을 할까 걱정이란다. 가만히 있는다고 안전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 말이지.”
“저도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신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긴급회의가 열렸었지. 토벌을 나서는 이들에게 축복을 내리면 어떻겠냐는 얘기가 나왔단다. 세 명이나 네 명 이상인 모임에 한해서 무료로 말이지.”
마왕 토벌에 나서는 분들께 오늘 단 하루 축복이 무료! 친구와 함께 오시면 혜택이 더블!
새틴이 전단지에 들어갈 만한 문구를 떠올렸을 때 옆에 서 있던 케인이 작게 웃었다. 다행히 새틴 혼자만 듣고 움찔 놀랐다. 설마하니 케인이 제 생각을 읽었을 리는 없는데.
“왜 웃어?”
제레미와 에드워드가 듣지 못하도록 새틴은 소리를 죽여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케인은 용케도 바로 알아들었다.
“웃기잖아.”
웃기기는 했다. 그래도 진지한 상황이니 좀 주의하란 뜻으로 새틴은 케인의 옆구리를 치고 아무 일 없던 양 제레미와 에드워드 쪽을 보았다. 에드워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저도 비슷한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다만 축복보다는 성물을 내리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성물을?”
“치안청이 포상금을 빌미로 미리 등록하게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누가 혹여 물리치기라도 하면 그 공을 나눠 먹을 심산이겠지요.”
제레미가 허어, 하며 탄식하며 수염을 매만졌다. 에드워드가 강하게 주장했다.
“신전에서 성물을 나누어 준다고 하면 모두 여기에 들를 겁니다. 축복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성물까지 마다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 말은 성물을 주는 걸로 신전도 공을 나눠 먹겠단 뜻 아니야?”
인사를 한 후로 내내 잠자코 있던 리타가 불쑥 에드워드의 어깨를 당기며 물었다. 제레미는 수염을 만지다 말고 당황해 리타를 쳐다보았다.
제레미와 달리 에드워드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뜻입니다. 치안청이라면 분명 포상금만 주고 업적은 지워 버릴 텐데 그 꼴을 그냥 둬서야 되겠습니까.”
리타는 무언가 생각하는지 턱을 만지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에드워드가 제레미에게 다시 말을 하려는 차 케인이 또 웃었다. 아까보다 소리가 커서 이번엔 모두가 들었다.
“케인.”
저도 모르게 새틴은 타박하듯 이름을 불렀다. 케인은 전혀 민망해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핑계를 댔다.
“아니, 진짜 웃기잖아.”
“웃기기는 한데 그렇다고 여기서 웃으면 안 되지.”
새틴은 말하고 나서야 뭔가 실수했다고 깨달았다. 졸지에 케인과 같은 생각임을 고백하고 말았다.
살그머니 분위기를 살폈다. 제레미는 난색이 되어 어색하게 웃고 있고, 에드워드는 이마를 짚었다. 리타는 입꼬리를 비죽거렸다. 웃음을 참는 표정이다.
한숨을 쉰 에드워드가 말했다.
“새틴 씨는 외지인이라 모르시겠지만 클로버랜드 상황이 복잡합니다. 우습게 보여도 이게 최선입니다. 신전도 발을 걸쳐 두는 편이 그나마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을 방법입니다.”
“응, 그렇구나…….”
새틴은 대충 대꾸하며 뒤로 물러났다. 신전과 치안청 사이에 무슨 알력 다툼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새틴은 알지 못하니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케인은 아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여기서 비판할 마음은 없는지 새틴을 따라 뒤로 빠졌다.
∞ ∞ ∞
신전의 일 처리는 아주 빨랐다. 한국형 판타지 세계라서인지 아니면 사안이 시급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잘된 일이었다. 제레미를 만나고 나온 지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아 신전 앞에 공고가 붙었고, 신전이 후원하는 크고 작은 단체들이 그 내용을 곳곳에 알렸다.
“벌써 이렇게 줄을 섰네. 더 빨리 나올 걸 그랬나 봐.”
신전 앞에 늘어선 인파를 본 리타가 발을 동동 굴렀다. 꾸준히 줄어들고는 있으나 그래도 족히 삼십 분은 기다려야 성물을 받을 수 있을 성싶었다.
“네가 가서 받아 오면 안 돼? 신관이잖아.”
리타가 직원 할인이라도 청구하듯 새치기를 제안했다. 당연하게도 에드워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신관에게 신전에서 공중도덕을 어기라니, 못 하는 말씀이 없으시군요.”
“아, 알았어. 기다리면 되잖아.”
에드워드가 무어라 훈계를 할 듯하자 리타는 재빨리 두 손을 들고 줄 꽁무니에 섰다.
여름이 코앞인 시기다 보니 줄 선 사람들은 간혹 손부채질을 했다. 새틴은 그 모습을 보다 무심코 “덥네.” 하고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케인이 곧바로 반응했다.
“더워?”
“좀. 넌 안 더워?”
“별로.”
새틴이야 가벼운 차림이지만 케인은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여름에 검은 옷을 입으라는 말이 있긴 해도 저 정도로 꽁꽁 싸매란 뜻은 아닐 텐데. 새틴은 저보다 케인이 더 더울 듯해 약간 민망해졌다.
줄이 줄어드는지 안 줄어드는지 목을 빼고 감시하던 리타가 돌아보며 대뜸 자랑했다.
“난 얼음 마법을 하나 쓸 줄 알아.”
“아, 그래.”
새틴은 일단 대답했지만 리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얼음 마법을 쓸 줄 아는 것이 지금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리타가 씩 웃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무어라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무튼 짧은 단어들이었다.
“오…….”
새틴은 리타의 손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마력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곧 새틴의 주변으로 우박이 쏟아졌다. 3초 정도.
“……대단하네.”
우쭐거리는 리타를 보며 일단 칭찬을 했지만 솔직히 별로 시원하지는 않았다.
“움직입시다.”
에드워드가 발치에 굴러다니는 조그만 얼음을 툭툭 차 내고 앞으로 이동했다.
줄은 순조롭게 줄었다. 마왕성이 있다는 남쪽 숲으로 가기 전에 챙겨야 할 물건이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하다 보니 차례가 되었다.
암묵적 동의로 일행의 리더가 된 리타가 나서서 성물을 받았다. 성물을 처음 보는 새틴은 약간 실망했다.
“기념품처럼 생겼네.”
성물은 신전의 문양이 새겨진 방패 모양의 조그만 펜던트였다. 엄지와 검지로 동그란 원을 만들면 그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새틴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에드워드가 픽 웃었다.
“원래 기념품입니다. 꽤 비싸요. 그러니 토벌 후에 반납하라는 거죠.”
“성물이란 게 원래 그렇게 좀…….”
새틴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성물만이 아니라 신전 전체가 지나치게 장사꾼 집단 같았다. 이 세계에서 신전은 원래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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