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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54화 (54/139)

54화

새틴이 하려다 만 말을 대충은 짐작했을 텐데도 에드워드는 별로 불쾌해하지 않았다. 원래 그런 모양이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합니다. 가지고 있으면 신께서 우리를 인지하시거든요.”

“원래는 인지를 못 해, 그럼?”

어이가 없어서 새틴은 그만 따지듯 묻고 말았다. 에드워드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지는 합니다만 관심이 없으시죠. 인간이 워낙 많아야지요. 어떻게 하나하나 신경을 쓰시겠습니까.”

이해가 될 듯 말 듯 하다. 아무리 성실한 농부라도 1만 평 배추밭의 모든 배추를 하나하나 기억하긴 어렵겠지.

에드워드가 덧붙였다.

“하지만 성물을 가지고 있으면 지켜보시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축복을 베풀어 주실 수도 있어요.”

“……확신이 아니네?”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베풀지 않으시거든요.”

새틴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의 신은 정말 계산이 철저하구나.’

∞ ∞ ∞

새틴 일행이 성물을 받은 후 치안청에 들러 명부에 이름을 적고 나니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마왕성이 나타났다는 남쪽 숲으로 가려면 남문을 지나야 하기에 그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북적였다. 아까 신전 앞에 줄 서 있을 때 본 얼굴도 여럿이었다. 새틴은 깨작깨작 식사를 하며 속으로만 한탄했다.

‘무슨 마왕 토벌이 이래…….’

도시가 검은 안개에 둘러싸이고 노약자가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지고 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지극히 평범한데, 사람들의 대처가 이 세상 대처가 아니다.

‘이세계 판타지인 줄 알았는데 저 세계 판타지…….’

여하튼 식사를 마친 후 식당을 나섰다. 이제 정말로 출발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생각과는 좀 다른 모양새로 진행되었다.

“아, 무기 정도는 사야지.”

리타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마법사가 둘, 신관이 하나, 무직이 하나. 이 일행은 무기가 전혀 없었다.

다행히 성문 근처에는 온갖 가판이 열려 있었다. 급조된 용사 일행을 위한 무기를 저렴한 값에 팔고 있어 개중 괜찮아 보이는 것을 몇 개 샀다. 대충 새틴이 눈치를 보아하니 이 세계에 전설의 검 같은 건 없는 모양이다.

무기 정비가 끝나자 마음이 급해졌는지 리타가 걸음을 서둘렀다.

“리타 씨, 마왕성은 어디 도망 안 갑니다.”

“그래도 빨리빨리 가야, 아이코!”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달리듯 걷던 리타가 마주 오던 사람과 부딪쳐 나동그라졌다. 똑같이 나동그라진 상대가 먼저 사과했다.

“이런, 미안합니다.”

상대의 심약해 보이는 얼굴은 그다지 마왕 토벌과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얼굴만 보고 강한지 아닌지 파악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만.

몹시 미안해하는 사람을 보며 리타도 사과했다.

“저도 미안해요.”

“제가 더 미안합니다.”

“제가 더 미안하거든요?”

두 사람은 얼른 일어나서 서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거의 사과 경쟁이었다. 그러다 멋쩍었는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둘 다 광대 같군.”

케인이 심드렁히 하는 말에 새틴은 동의했으나 일단 주의를 주었다.

“조용히 해.”

실은 정체를 감춘 공주인데 광대라니.

곧이어 어색한 작별 인사가 이어졌다. 벽을 피하는 팬터마임이라도 하듯 두 사람이 반대 방향으로 게걸음 쳤다.

“그럼 이만.”

“네, 잘 가요.”

“미안했습니다.”

“저도요.”

두 사람은 떨어뜨린 물건을 챙긴 후 다시 한번 사과하고 헤어졌다. 배낭을 추스르던 리타는 뒤늦게야 아차 했다.

“헛, 성물이 바뀐 거 같아. 우리 건 옆에 긁힌 자국이 있었는데 이건 없네. 빨리 쫓아가야 하나?”

그 말에 새틴은 깜짝 놀랐지만 에드워드는 태연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다 똑같으니까요.”

“아, 그래? 다행이다.”

리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새틴은 어이가 없었다.

다행은 무슨 다행. 똑같은 성물을 대량 생산해서 여태 돈 받고 팔아먹었단 뜻인데.

새틴의 표정을 본 케인이 픽 웃었다.

“너도 웃기지?”

“……솔직히 웃기긴 하다.”

“신이라는 건 그냥 환상이야. 사업에 붙은 이름일 뿐이지.”

신을 믿지 않는 새틴이 듣기에도 너무 냉정한 소리지만 이곳에서는 정말 저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정말 신이 있는데 저런 장사를 두고 보는 거라면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보다 인간적인 신이다. 세속적이라는 면에서.

이제 정말로 토벌을 떠날 때가 되었지만 새틴은 더 이상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성문을 나오자마자 펼쳐진 풍경을 보고도 그러려니 했다. 마왕성 앞까지 직통으로 간다는 마차가 줄줄이 서 있었다. 호객꾼이 “치안청 인가받은 마차입니다! 합리적인 가격에 이용 가능하십니다!” 하고 외쳤다.

‘주말 아침에 도봉산 가는 지하철 풍경 같지만 신경 쓰지 말자.’

∞ ∞ ∞

검은 안개는 성문의 지척에 있었다. 마차가 달린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주변이 점점 시커메졌다.

“이거 들이마셔도 되는 건가?”

창밖을 보던 리타가 기겁을 했다. 케인이 반대쪽 창틀에 팔을 걸치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되겠지. 마부는 밖에서 직접 마시고 있는데.”

“당장 죽지 않는다고 괜찮은 건 아니잖아.”

리타의 반문에도 케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위험한 거면 적어도 마부가 먼저 죽을 테니 황천길이 외롭진 않겠네.”

리타는 물론 새틴도 입을 떡 벌릴 만한 막말이었다. 마부가 들었다면 그 역시 입을 벌렸으리라.

사실 걱정을 하기엔 좀 늦었다. 걱정을 할 셈이었다면 클로버랜드에서 나오기 전에 했어야지. 검은 안개를 어떻게 통과할지 알아본 후에 출발을 했어야 옳다.

리타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한숨을 쉬었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처음 마왕성의 존재를 확인하고 온 경관들도 이 안개를 지났을 터다. 하지만 그들 중 누가 죽었단 얘기는 듣지 못했다.

반면 안개에 직접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은 줄줄이 병에 걸리는 와중이다. 안개를 피한다고 괜찮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괜한 찜찜함 때문에 새틴은 창문 쪽으로 기대지 못하고 시선만 바깥으로 향했다.

안개는 한 치 앞도 안 보일 만큼 짙지는 않았다. 멀리서는 검은 연기 같았는데 안에 들어와서 보니 보통의 안개와 더 비슷했다.

다만 필터라도 씌운 듯 숲의 색이 왜곡되었다. 갈색이어야 할 줄기와 가지는 검게, 푸른색이어야 할 잎들은 짙은 회색으로. 꼭 흑백 영화를 3D로 보는 느낌이었다. 현실감이 없고 어딘지 가짜 같다.

‘이제 좀 이세계 판타지 같네.’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 근방이었습니다.”

“무엇이?”

어쩐 일로 케인이 대꾸를 했다. 에드워드는 멈칫했다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흑마법사의 근거지 말입니다. 4년 전에 치안청이 주축이 되어서 사살한 흑마법사가 이 근처에서 가짜 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신전은 아무것도 안 했나 보지?”

신관으로서 불쾌해할 만도 한데 에드워드는 쓰게 웃을 뿐이다.

“클로버랜드는 치안청의 힘이 센 곳이어서요. 사실상 관청도 치안청 밑에 있다 보니 신전이 받는 제약이 큽니다.”

“편하겠네. 기도 장사만 해도 되니까.”

“케인 씨는 신을 믿지 않으시는가 보군요.”

“믿어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에드워드는 케인을 설득하려 들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열정적인 전도사는 아니었다.

어정쩡하게 끊긴 이야기는 리타가 이어받았다.

“흑마법사의 근거지 가까운 데에 마왕성이 생긴 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으려나?”

새틴도 같은 의문이 들었다. 다크에이지에서 마왕을 소환한 사람은 새틴이다. 흑마법사의 제자이니 학교가 있던 곳에 마왕을 소환하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다. 마왕을 소환(하다 중단)한 사람은 케인이고, 케인은 흑마법사가 죽은 장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

‘케인은 나 때문이라고 했지만…….’

새틴은 슬쩍 케인을 쳐다보았다.

‘하품하고 있네?’

자기와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 같다. 새틴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는데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다.

“왜?”

“아니, 넌 어떻게 생각하나 해서…….”

“뭘?”

“이 장소 말이야. 왜 여기여야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조심스레 건넨 질문을 들은 케인은 눈썹을 살짝 문지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넓어서?”

그게 다야?

새틴이 어이가 없어 되물으려는데 리타가 오, 하며 탄성을 터뜨렸다.

“그럴 수도 있겠네. 아무래도 다른 쪽은 경작지도 있고 좀 그렇지.”

새틴은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마왕이 설마 경작지를 피해서 나타났을 리 없지 않은가.

다행히도 리타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이유야 뭔들 어떻겠어. 아무튼 경작지에 내려오지 않아서 다행이네. 농작물을 망쳤으면 큰일이 났을 텐데 말이야. 네 말대로 식자재값이 뛸 뻔했잖아.”

리타는 자기가 먼저 궁금해했으면서 실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씩 웃었다.

반대로 케인은 그다지 다행이라 여기지 않는지 시큰둥하게 한마디 했다.

“클로버랜드에는 한 번쯤 큰일이 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들어도 좋은 의미로 해석하기 어려운 말이라 모두가 케인을 쳐다보았다. 새틴도 케인의 팔을 툭 치며 타박했다.

“무슨 그런 말을 해. 지금도 큰일인데…….”

“아직은 치안청이 멋대로 굴 수 있을 정도의 일이잖아. 관청에 기사단도 있을 텐데 그쪽은 전혀 나서지 않는 걸 보면 치안청이 그러지 못하게 했겠지.”

새틴은 케인의 말을 듣고 불현듯 떠올렸다. 클로버랜드에는 기사단이 있다. 다크에이지에서 케인이 그 기사단 소속이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긴급한 사태에 기사단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치안청의 병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기사단이 나설 법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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