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케인 씨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클로버랜드는 겉만 멀쩡하지 사실 엉망인 부분이 많죠.”
에드워드가 케인의 의견을 지지했지만 케인은 코웃음 쳤다. 케인에게는 치안청이나 관청, 신전 모두 쓸모없는 집단으로 느껴지는 게 아닌지 새틴은 조심스레 추측했다.
순식간에 심각해진 얼굴로 리타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좀 문제가 있어. 중앙에서 일일이 제어하지 못해서 이 꼴이 된 걸까.”
“중앙은 어디를 말하는 거야?”
새틴의 물음에 에드워드가 대신 대답했다.
“수도에 있는 중앙 관청을 말하는 겁니다. 수도와 각 도시의 관청들을 관리하죠.”
“중앙 관청은 누가 운영하는데? 왕실?”
“새틴 씨는 정말로 아는 게 없군요. 기억 상실은 정말 무서운 병 같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비꼬려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어 새틴은 어색하게 웃었다. 에드워드의 옆에서 리타가 타박했다.
“모를 수도 있지 뭘 그래. 일단 왕이 통수권자이긴 해. 도시 관청에 속한 기사단은 따지자면 전부 왕의 기사지.”
콧잔등을 살짝 찡긋한 리타는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행정은 거의 관리들이 실무를 보고 왕은 도장만 찍어. 그래도 무능하단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왕실 가족들도 행정 공부를 빡세게 해야 돼. 알고 찍는 거랑 모르고 찍는 건 다르잖아.”
꽤나 긴 설명이었다.
“잘 아시는군요.”
에드워드가 의외란 듯 쳐다보자 리타가 약간 쑥스러워하며 변명했다.
“난 수도 출신이라 잘 알아. 별로 관심이 있던 건 아니고.”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리타는 비장하게 말했다.
“이번에 공을 세우면 중앙 관청에 이 일을 고해야겠어. 클로버랜드의 관리자들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해야 한다고.”
그 말을 들으며 새틴은 다크에이지의 새로운 제목을 생각해 봤다.
‘히로인이 사실 암행어사인 건에 관하여?’
∞ ∞ ∞
드디어 마차가 멈췄다. 내리자마자 일행은 짧은 감상 시간을 가졌다.
오는 동안은 내내 안개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도착해서 보니 마왕성이 상상 이상으로 위용이 넘쳤다. 시커먼 외벽도 범상치 않지만 규모 면에서 특히 놀라웠다. 바로 앞에서 보니 산으로 보일 정도였다.
‘고층 빌딩이 없으니 뷰도 끝내주겠지.’
감상이 끝난 다음엔 해야 할 일을 했다. 리타가 삯을 치르는 동안 에드워드는 마차 지붕 위에 실었던 짐을 내리고 새틴은 대기 줄에 선 사람들의 숫자를 셌다. 협조성 없는 케인은 그냥 서 있었다.
‘대충 일흔 명 정도인가.’
대부분의 일행이 네 명에서 여섯 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순히 계산하면 새틴 일행의 대기 번호는 15번쯤 됐다.
이제 줄 서는 데는 익숙해졌지만 좀 황당하기는 했다. 마왕성 코앞에 와서도 줄을 서야 한다니.
“다 같이 힘을 합치는 편이 좋지 않나…….”
새틴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앞 일행의 사람이 다가와 이유를 가르쳐 주었다.
“와이번이 막는대요.”
“네?”
“한 번에 한 팀만 들어가야 한다고요.”
“아, 네…….”
이유를 듣고 나니 더 어이가 없었다. 마왕성 문지기가 놀이공원 어트랙션 관리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단 말이야? 더 나가면 노래도 부르겠네. 여기는 마, 왕, 성서러성성성성성, 마왕성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친절한 사람이 일행에게 돌아간 후 케인이 새틴의 옆에 섰다. 케인은 눈으로 대강 사람들을 헤아리고 말했다.
“생각보단 사람이 적네.”
“이렇게 많은데 무슨 소리야?”
“신전에서 우리보다 먼저 성물을 받아 간 사람들 숫자에 비하면 말이야.”
케인의 말에 새틴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확실히 신전 앞에서 본 사람의 반도 되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나 이미 마왕성에 진입한 사람을 감안하더라도.
케인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비웃음인데 아주 즐거워 보였다.
“성물만 가지고 튄 거지. 공짜라면 일단 받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그것참…….”
신전 입장에서는 손해가 막심할지 모르나 실제로 여기에 방문한 사람의 입장에선 다행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죄다 여기에 와 있었다면 내일까지 기다려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지 모르니.
“케인 씨 말이 맞습니다.”
케인의 의견에 동조하는 에드워드의 표정은 의외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새틴은 의아해져서 물었다.
“신전 입장에선 손해 아니야?”
“당연히 손해지요. 그래도 나쁘게만 볼 건 아닙니다. 아마 가족 중에 병자가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테니까요.”
새틴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해했다. 아픈 가족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성물을 받아 갔다는 뜻이다.
“성물이 있다고 병이 나을 리 없지만 다급한 사람들은 뭐라도 하는 법이니 말입니다.”
“그 사람들한테도 공짜로 나눠 준다고 하면 되지 않아? 그럼 굳이 거짓말하고 받을 필요 없잖아.”
리타가 끼어들어 물으니 에드워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렵습니다. 무료로 뭘 하면 관청에서 공문이 옵니다.”
공문? 에드워드를 제외한 세 사람 모두 의아해하자 에드워드가 한숨을 쉬었다.
“공짜를 뿌려서 시민들을 현혹하지 말란 거죠. 민생 안정은 관청의 일이니 말입니다. 아마 치안청의 의도일 겁니다.”
클로버랜드 사람이 아닌 새틴은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대강은 유추 가능했다.
‘치안청이 악의 축이네.’
관청을 좌지우지하며 신전의 영향력이 커질까 봐 경계한다. 그렇다고 관청과 신전이 할 일을 치안청이 제대로 대신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잠시 어두운 표정으로 창밖을 보던 에드워드가 이내 희망적으로 말했다.
“이번 사태가 해결되고 나면 무언가 바뀔지도 모르지요.”
옆에서 케인이 초를 쳤다.
“이번 사태가 계속돼도 뭔가 바뀌긴 하겠지. 다 죽을 테니까.”
새틴이 툭 치자 케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마왕성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직도 클로버랜드 사람들이 다 죽길 바라나?’
예전의 새틴과 대체 무슨 관계였는지 날이 갈수록 궁금해진다.
케인의 이 과격한 면모는 오직 새틴을 위한 복수심에서 비롯했을까, 아니면 새틴이 나쁜 사상을 주입한 결과일까.
∞ ∞ ∞
새틴 일행이 마왕성에 입장할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들어갈 땐 차례로 들어간 사람들이 나올 땐 그 순서대로 나오지 않았다. 새틴이 그 이유를 물으니 문지기 와이번이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나약한 인간들, 시험을 모두 거치지 못한 자들이다.”
“그렇군요…….”
새틴은 고맙다 말하고 일행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들어섰다기보단 케인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새틴이 당황해 쳐다보자 케인은 작게 화를 냈다.
“저게 뭔 줄 알고 대뜸 말을 걸어?”
“문지기?”
“잡아먹힐지도 모르는데 겁도 없이.”
“아니, 여태 아무도 안 잡아먹었잖아.”
“모르지. 입맛에 맞는 인간 기다리고 있었을지.”
케인은 마치 어린애 겁을 주듯 타박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걱정한 모양이라 새틴은 잠자코 들었다.
“맨 앞에서 걷지 말고 내 옆에서 두 걸음 이상 떨어지지도 마.”
말로는 두 걸음이라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한 걸음 정도였다. 새틴이 거리를 재느라 대답하지 않으니 케인이 재촉했다.
“왜 대답이 없어?”
“알겠어.”
“아버님, 설교 아직 안 끝나셨어요? 슬슬 가자고.”
몇 걸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타가 짜증을 냈다.
케인은 작게 혀를 차고 걸음을 옮겼다. 새틴은 케인의 한 걸음 옆에서 걸었다.
주위는 컴컴하나 앞을 보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복도가 너무 길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복도 양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횃불이 걸려 있었는데 꼭 유도등 같았다.
‘어디로 안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왕성이란 위명에 걸맞게 불길한 복도였다.
일행은 별 대화 없이 한참을 걸었다. 아무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 복도를 계속 걷다 보니 다소 현실감이 사라졌다.
“너무 조용하니까 괜히 스산하네.”
리타가 중얼거리며 검 손잡이를 꾹 쥐었다. 염가에 산 검이지만 겉모양만은 그럴듯해 리타에게서 용사의 풍모가 느껴졌다. 일행 중 가장 용감해 보였다.
‘마법사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에드워드와 케인은 로브 때문에 검이 보이지 않고 새틴은 검이 영 거추장스러워 등에 둘러멨더니 용사다운 본새가 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할 일이야 없겠지.’
다크에이지에서도 이 셋이 마왕을 물리친다. 2부와 3부의 스포일러에서도 일행이 늘었단 얘기는 보지 못했다. 새틴은 저만 나대지 않으면 이제까지처럼 어떻게든 스토리가 진행될 거라고 믿었다.
“두 걸음.”
새틴이 딴생각을 하느라 거리가 벌어지자 케인이 인상을 쓰고 경고했다. 새틴이 움찔 놀라자 케인은 혀를 차면서도 눈은 떼지 않았다. 새틴은 허둥지둥 케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또 한참을 걸었다.
“뭔가 이상한데?”
가장 앞에서 걷던 리타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간을 확인한 리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간이 너무 안 지났어. 아직 한 시간도 안 지났다니 말이 돼?”
그 말에 새틴과 에드워드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체감상 두세 시간은 걸은 느낌인데 아직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니. 바깥이 보이지 않아 시간 감각이 사라졌을까.
리타가 시계를 다시 품 안에 넣으며 말했다.
“먼저 간 사람들하고 전혀 마주치지 않는 것도 이상해.”
“확실히 그렇군요. 어디서 소리라도 들릴 법한데.”
에드워드가 리타의 말에 동의하며 턱을 문질렀다. 리타가 눈을 부릅뜨고 재수 없는 소리를 했다.
“다 죽은 거 아니야?”
“불길한 소리 하지 마세요.”
“일단 조금 더 가 볼까?”
조금이 얼마큼일지는 모르나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는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앞서간 사람들도 아직 걷는 중일 테다. 산처럼 커다란 성이니 복도도 둘레길처럼 길지 모르지.
리타가 제안한 조금 더 가 보기는 일행의 의도와 관계없이 중단되었다.
“으악!”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