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간단히 정비를 마친 후 일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언제까지 마왕성 안에 있어야 할지 모르니 오래 뜸을 들일 수는 없었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복도를 걷던 중 리타가 케인을 돌아보았다. 케인은 새틴의 바로 옆 한 걸음 거리에서 걷고 있었다.
“근데 예전에 대체 얼마나 친했길래 그렇게 떨어지질 않아? 누가 보면 새틴이 네 자식인 줄 알겠어.”
새틴도 흘끔 케인을 올려다보았다. 케인이 무어라 대답할지 궁금했다. 제대로 대답할 것 같진 않지만.
“알 거 없어.”
예상대로다. 새틴이 작게 한숨을 쉬자 케인이 흘끔 쳐다보더니 물었다.
“그렇게 궁금해?”
“그야, 뭐.”
새틴은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당연히 궁금하지.
저번 날 밤에 케인에게 들은 대로라면, 케인은 새틴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교류가 있었다. 어쩌면 그 교류는 대등한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이리 말하니 평범한 우정 같지만 결코 보편적 형태였을 리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케인은 새틴을 과보호한다. 그저 친구였다면 이렇게까지 보호하는 건 이상하다.
‘혹시 반대였을까?’
케인이 아니라 새틴이 의지하는 관계였다든지. 때로 사람들은 책임감 때문에 더 강해지기도 하니까. 케인이 과거 새틴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연연하는 거라면.
‘음, 말도 안 되지.’
본디 새틴은 케인이 아니라 흑마법사의 편이다. 흑마법사가 아닌 케인에게 의지하는 건 이상하다.
‘정말 뭐지? 새틴이 닭 다리를 두 개 주기라도 했나?’
그래서 케인이 일방적인 호의를 품고 있었을까. 이 성격에 그게 말이 되나?
새틴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려는 차 케인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를 구해 줬어.”
“구하다니? 어디서? 뭘 어떻게?”
리타가 눈을 빛내며 되묻더니 아예 새틴의 옆으로 와서 보조를 맞춰 걸었다. 에드워드는 케인의 이야기에 관심 없는 척 앞만 보고 있지만 그 역시 눈에 띄게 걸음이 느렸다.
케인이 작게 혀를 차고 투덜거렸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군.”
“우린 남이지만 새틴은 당사자잖아. 좀 알려 줘.”
리타가 넉살 좋게 채근했다. 케인은 한숨을 한 번 쉬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불이 났었어.”
“불?”
무심코 새틴이 따라 말하자 케인이 “그래, 불.” 하며 설핏 웃었다. 에드워드가 묘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케인은 일행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앞만 보며 말했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여서 새틴이 나를 업고 계단을 내려갔지.”
새틴은 잠깐 의심했다. 지금의 체격만 보면 케인을 업기는커녕 질질 끌고 갈 자신도 없다. 혹시 알려 주기 싫어서 지어낸 얘기가 아닐까.
새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고 케인이 픽 웃었다.
“그때는 내가 너보다 작았어. 네가 아주 크다고 생각했는데…….”
케인이 말꼬리를 흐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새틴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의외인데.’
불 속에서 케인을 구했다니. 전에 에드워드에게 들은 얘기대로라면 학교가 전소했을 정도로 큰불이었다. 혼자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와중에 케인을 구했다고?
문득 새틴은 스스로가 의심스러워졌다. 혹시 다크에이지 때문에 만난 적도 없는 누군가를 편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던 게 아닐까.
리타는 다크에이지에서 읽은 묘사보다 시끄럽고 명랑하다. 에드워드는 친절하나 조금 염세적이고, 케인은 완전히 원작을 벗어던졌다. 그런데 새틴이라고 그대로일까.
새틴이 고민하는 동안에도 케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계단이 무너지는 바람에 헤어졌어. 다행히 나는 문 쪽으로 떨어졌지만.”
케인의 시선이 새틴을 향했다.
“넌 불길을 피해서 안으로 들어갔지.”
‘그건 내가 아닌데.’
“불이 꺼진 후에도 너를 찾을 수가 없었어.”
‘그건 내가 아닌데.’
“믿고 싶지 않아서 그곳에 여러 번 갔는데,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복도를 울리는 목소리가 새틴의 어깨를 불편하게 짓눌렀다.
“네가 나를 구하고 죽었다는 걸.”
‘그건, 내가 아닌데.’
케인의 회상이 새틴에게는 그저 낯설었다. 그리고 새삼 몹시 껄끄러웠다.
지난 며칠간 케인이 제게 한 모든 말과 행동이 사실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있음을 오직 새틴만이 알고 있었다.
차라리 원래의 새틴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정말로 케인의 은인이었다 하니 죄책감이 든다. 소설의 등장인물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말했을 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실은 내가 아니라고 말할까?’
바보 같은 생각이다. 말해 봤자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몸뚱이만은 케인이 아는 그 사람이니까. 아무리 진지하게 사실을 털어놓아도 죽은 흑마법사 때문이라고 믿겠지.
“왜 그런 표정이야?”
새틴이 고개를 숙인 채 쭈뼛거리고 있으니 케인이 몸을 굽히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케인은 설마 눈앞의 새틴이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을 터다.
새틴은 웃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나는 기억이 안 나니까 신기해서…….”
“괜찮아. 내가 기억하니까.”
케인의 손이 새틴의 뒷머리를 스치고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내 어깨를 감쌌다. 다소 어색한 몸짓이었다. 케인 자신도 아는지 쑥스럽게 웃었다.
‘나도 웃어야지.’
새틴은 웃지 못했다.
케인은 새틴이 지난 일을 기억해 내면 지금의 관계가 자연스러워질 거라고 했다. 과연 옳은 말이었다. 그렇기에 결코 자연스러워지지 못할 것이다.
∞ ∞ ∞
“앗!”
이번에도 가장 앞서가던 리타가 제일 먼저 함정을 밟았다. 밟았다는 말보다는 빨려들어 갔다는 말이 더 어울릴 성싶지만.
리타가 허공으로 쏙 사라진 후 에드워드가 한숨을 쉬고 돌아보았다.
“먼저 따라가겠습니다.”
아까 같은 사태를 대비해서인지 에드워드는 몇 초 정도 뜸을 들인 후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리타와 마찬가지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새틴도 속으로 숫자를 세며 넘어갈 타이밍을 재는데 케인이 불쑥 팔을 붙잡았다.
“너 지금.”
“응?”
갑자기 할 말이라도 생겼나 싶어 새틴이 쳐다보자 케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새틴의 얼굴을 관찰이라도 하듯 들여다보다 인상을 쓰며 물었다.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이상한 생각이라니.”
의미를 알 수 없어 새틴이 고개를 갸웃하자 케인은 잠시 말이 없다 물러났다.
“아냐. 아니면 됐어.”
뭐냐고 되물으려던 차 새틴은 불현듯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내내 딴생각을 하던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모를 턱이 없었다. 그런데 그리 생각하니 또 의문이다.
‘다른 위화감은 못 느끼나.’
겉모습이 같다 해도 차이점은 분명 있다. 의식하지 않고 짓는 표정, 무심코 해 버리는 습관. 이는 가장 가까운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다. 새틴의 경우엔 바로 케인이 그 사람이다.
그런데 케인은 새틴을 보며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새틴을 의심하지 않았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새틴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기분이 이상하네.’
새틴은 해소하지 못한 의문을 품은 채 한 걸음 내디뎠다. 곧바로 주위가 빙글빙글 돌았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바다 깊은 곳으로 끌려가는 물고기의 기분이 이럴까. 다행히 멀미는 나지 않았다.
긴지 짧은지 분간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새틴은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에도 엉덩이부터였다.
“아야…….”
“뭘 하다 이제 와?”
몸을 일으킬 생각도 안 하고 엉덩이만 문지르고 있자니 먼저 와 있던 리타가 다가오며 물었다. 딱히 할 말도 없어 새틴은 멋쩍게 웃고 일어나려 했다.
“윽……!”
케인이 또 위로 떨어지지만 않았더라면.
“아, 이런.”
낭패한 얼굴로 케인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아까처럼 허둥대지 않았다. 덕분에 갈비뼈는 무사했다.
케인이 뻗은 손을 잡고 일어나며 새틴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케인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내 변명을 한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혹시 다른 데로 가게 될까 봐…….”
무슨 소린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새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난할 의도가 아니었는데 케인은 더 면목 없어 했다.
“다친 데는 없어? 내가 어디 밟진 않았지?”
“어, 어.”
뒤늦게야 새틴은 케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일부러 부딪치려고 곧바로 쫓아온 게 아니란 이야기였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손을 내젓고 슬쩍 거리를 벌렸다. 케인은 새틴이 두 걸음보다 떨어져 있는데도 타박하지 않았다. 눈으로 거리를 잰 후 약간 언짢아했을 뿐. 아마도 눈치가 보여 당장은 아무 말 하지 않는 듯했다.
“그럼 가 볼까.”
리타가 먼저 걸음을 옮기고 나머지는 그 뒤를 따랐다. 긴장을 풀기 위한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리타는 원숭이와 뱀보다 덜 징그러운 괴물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에드워드는 그냥 괴물이 안 나오는 편이 더 좋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가벼운 농담이 몇 번 오간 후 새틴은 문득 깨달았다. 아까부터 케인과 자꾸 팔이 부딪쳤다. 정확히 말하면 케인의 로브가 팔꿈치를 스쳤다. 새틴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거리가 바짝 좁아져 있었다.
딱히 불편하지는 않아 새틴은 잠자코 있었다. 리타의 농담에 실없는 대꾸나 하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분리 불안이네.’
중요한 것을 한번 잃어버렸다가 되찾으면 누구나 주의하기 마련이다. 다시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소 병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새틴도 충분히 이해한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이해를 만나니 의심으로 이어졌다.
‘위화감을 못 느낀 게 아니라 모른 체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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