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되찾은 것이 어쩌면 제가 알던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확인하지 않으면 누가 알까. 어차피 더 나은 대안은 없다. 그러니 불명을 미지로 남겨 둔 채 안도하는 시늉을 하고, 시늉하는 자신에게 속아 넘어간다.
지금은 그래도 괜찮다. 새틴은 케인이 별로 귀찮지 않고 오히려 여기에서는 의지가 된다. 본인도 새틴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며 만족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들뜬 기분이 가라앉고 나서도 괜찮을까.
“알았어.”
아무 말 않고 흘끔흘끔 쳐다보기만 했는데 케인이 인상을 쓰더니 옆으로 물러났다. 두 걸음을 사이에 두고 짜증을 냈다.
“이 이상은 안 돼. 알겠어?”
“응, 그래…….”
∞ ∞ ∞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족히 5층 높이는 되는 거대한 골렘을 보며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리타가 곧장 타박했다.
“갑자기 뭔 소리야! 어떻게 할지나 생각하자니까?”
“마왕을 물리친 용사가 대접을 받았다는 기록은 몇 장이나 되는데, 그 마왕이 대체 어땠는지에 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니. 이상하잖습니까.”
“아, 뭐야. 아까 신전에서도 한 얘기잖아.”
오늘 오전 신전에서 제레미를 만나고 성물을 받으러 가기 전에 에드워드는 신전의 기록 보관실에 들렀다. 나머지 일행은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기다렸다. 에드워드는 과거 마왕이 나타났을 때의 기록을 확인하고 나왔다.
「마왕에 관한 기록은 없었습니다. 마왕을 물리친 이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얘기만 잔뜩이더군요.」
기록의 내용에 실망한 사람은 에드워드뿐이었다. 다들 그러려니 했다. 애당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도움 될 만한 내용이 없다면 굳이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신전의 기록에 관해서는 그 후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 에드워드가 그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뭘까?
새틴은 궁금했지만 캐물을 때가 아니었다.
골렘이 쿵쾅거리며 홀을 돌고 있었다. 움직임은 느리나 보폭이 어마어마해서 전력으로 달리지 않으면 뿌리칠 수 없었다. 그나마 가끔 멈춰 서는 덕에 숨 돌릴 시간은 벌었다.
리타와 에드워드는 골렘의 왼쪽에, 새틴과 케인은 골렘의 오른쪽에 있었다. 사실 새틴은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죽자 사자 뛰었는데 숨을 돌릴 때마다 케인이 함께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키링남…….’
가만 생각하니 이런 의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새틴은 스스로 저지른 오류를 정정하고 조심스레 어깨로 손을 뻗었다. 일단 검이라도 뽑아 볼 생각이었는데 케인이 대뜸 으름장을 놓았다.
“칼 뽑을 생각은 하지도 마.”
뽑기도 전부터 이런 소리를 들으니 약간 억울해서 새틴은 볼멘소리를 했다.
“들고 있는 정도는 괜찮잖아. 달려들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야 모를 일이지. 위급하다 싶으면 달려들지 누가 알겠어.”
“내가 그렇게까지 대책 없이 행동하지는 않아.”
“글쎄, 사람은 자기를 잘 모르는 법이더라고.”
“그건 내가.”
“아무튼 뽑지 마.”
새틴은 한숨을 쉬며 도로 손을 내렸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 되면 케인도 뭐라 하지 못할 테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오지 않는 편이 더 좋겠지만.
골렘은 원숭이 떼가 처음 나타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일행은 넓은 홀에 이르렀다. 보랏빛 불이 타오르는 화로는 이곳에서 또 무언가 시험이 일어날 거라 예상하게 했다.
일행은 일부러 흩어지지 않고 벽을 살폈다. 먼저 들렀던 홀에서처럼 문구를 발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문구를 찾긴 했는데, 먼저 본 것과 내용이 달랐다. <시험을 거쳐라>
대체 무슨 뜻일까. 일행이 그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쿵, 쿵,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골렘은 천장이 아닌 벽에서부터 나타났다. 단단한 석벽이 울룩불룩하더니 불쑥 골렘이 몸을 일으켰다. 문구가 적힌 곳의 바로 지척이었던지라 모두 혼비백산했다.
리타는 우박을 뿌리고 케인은 불의 벽을 세웠지만 골렘은 대수롭잖게 뚫고 움직였다. 원숭이는 불을 겁내고 뱀은 우박을 싫어했는데 골렘은 아무래도 둘 다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다. 여태 골렘을 향해 제대로 된 공격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중이다.
쿨타임인지 밸런스 패치인지 뭔지는 몰라도 골렘이 멈춰 있는 동안 새틴은 머리를 굴렸다.
‘뭔가 석연치가 않은데.’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시험을 거쳐라>
곰곰이 생각하니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 처음엔 원숭이 떼만으로 시험이 끝나지 않음을 암시하는 거라고 짐작했는데 아닐지도 모르겠다.
‘여길 먼저 왔어야 했나?’
하지만 애당초 그럴 수 없었다. 일행은 마왕성에 들어온 후 줄곧 직진했다. 마왕성에서 시험의 순서를 거꾸로 두지 않았다면 일행도 시험을 거꾸로 치를 수 없다.
설마 마왕성이 그런 실수를 하겠냐 싶지만.
‘여긴 할 수도 있을 거 같아…….’
새틴이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케인은 골렘을 주시하고 있었다. 새틴 쪽을 보지도 않고 경고했다.
“슬슬 움직이려는 모양이야.”
“아, 응.”
케인의 말에 새틴도 바짝 긴장했다. 골렘을 피해 달아나는 데는 이제 대충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한 번만 멈칫해도 깔려 죽을 테니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턱이 없다.
우워어어어! 골렘이 난데없이 괴성을 내질렀다. 생김이 투박해 입이 있는 줄도 몰랐던 터라 일행은 모두 깜짝 놀랐다.
“입이 있었어!”
리타가 소리치자 골렘의 머리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리타가 우거지상을 했다.
“귀도 있었어…….”
“헛소리 말고 뛸 준비나 하시죠.”
“으악, 온다!”
골렘은 리타와 에드워드가 막 달리기 시작했을 때 걸음을 뗐다. 그 순간 케인도 말했다.
“우린 뒤를 밟자.”
“어쩌려고?”
“저 정도로 거대하면 어딘가 약점이 있을 거야. 아까 그 뱀처럼.”
케인은 말을 하면서 움직였다. 리타와 에드워드의 반대 방향이었다. 일단 새틴도 그 옆으로 따라가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시험이라잖아. 시험이라면 해결할 방법이 있겠지. 단순히 힘으로 싸우라고 할 거였다면 저렇게까지 거대한 놈일 필요가 없어.”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새틴은 잠깐 눈을 굴렸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의 말마따나 약점이 없다면 절대 이기지 못할 크기다. 뱀은 유기체이기라도 했지 골렘은 바위다. 날붙이와 상성이 안 좋다. 그렇다고 마법이 통하는 것도 아니고.
‘마법사가 둘이나 되는데 아무 쓸모가 없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 다 실패했나?’
그때 리타가 꽥 소리를 질렀다.
“뭘 던지는 거야!”
새틴은 깜짝 놀라 그쪽을 보았다. 골렘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조그만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리타는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달리는 중이라 골렘이 제게 자갈을 뿌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죽을 땐 죽는다고 소리치고 죽을 것 같네.”
케인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새틴은 픽 웃었다. 리타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태어났을 땐 태어났다고 외쳤을지도. 공주 탄생!
골렘이 홀의 가운데를 지날 때쯤, 케인이 멈춰 섰다. 골렘의 바로 뒤편이었다.
“저거 보여?”
케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새틴은 바로 알았다. 골렘의 뒤통수에 길쭉한 무늬가 보였다. 얼핏 보면 그림자 같은데 또 다르게 보면 패인 자국 같았다. 그런데 골렘이 몸을 틀자 무늬가 사라졌다.
“어, 없어졌어.”
케인은 당황하지 않고 옆으로 움직였다. 새틴은 엉겁결에 케인을 따라 뛰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사라졌던 무늬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도 골렘의 바로 뒤편이었다.
“바로 뒤에서만 보여. 조금만 옆으로 가도 안 보여.”
“뭘까.”
“뭔지는 몰라도 확인해 볼 가치는 있지.”
그리 말한 케인이 새틴의 등에서 검을 쑥 빼 갔다. 새틴이 당황해 손을 뻗었지만 돌려줄 셈이었다면 가져가지도 않았을 터.
“뭐야, 내 거야.”
“뽑을 생각 하지 말랬잖아.”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케인은 골렘을 향해 달려갔다.
“아니, 저 미친놈…….”
새틴의 입에서 다시금 험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까 뱀을 상대할 때도 그러더니 도통 설명을 하질 않고 위험한 데로 달려간다. 말로는 새틴이 할 일을 대신한다지만 실제로는 새틴이 할 수 없는 일만 골라서 하고 있지 않은가.
당황했다 해서 새틴이 케인을 쫓아갈 수는 없었다.
‘쟤가 아니라 내가 키링이네, 내가 키링이야.’
아무 쓸모 없이 안전한 데에 보관해 둔다는 점에서는 키링보다 더 애물단지 같기도 하다. 새틴은 약간의 자괴감을 등에 지고서 일단 몸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 쿨타임이 되었는지 골렘이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낌새를 채고 뒤를 살피던 에드워드가 케인을 발견했다.
케인이 무얼 하려는지 짐작한 에드워드가 리타를 향해 외쳤다.
“리타 씨, 조금 더 뛰어요!”
“뭐?”
“시선을 끌어야 합니다!”
“왜?”
“모릅니다!”
리타가 무어라 못 알아들을 단어로 욕을 했지만 에드워드는 그저 달릴 뿐 더 말하지 않았다.
“에잇, 받아라!”
리타가 우박과 불화살을 번갈아 뿌리며 골렘을 도발했다. 그러자 멈출 듯하던 골렘이 조금 더 움직였다. 우워어어! 유쾌하지 않은 고성이 공동을 울렸다.
이윽고 골렘이 걸음을 멈췄다. 리타와 에드워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사이 케인은 골렘의 머리를 노리고 훌쩍 뛰어올랐다. 새틴에게서 빼앗은 검을 골렘의 무릎 뒤에 박아 넣으며 반동을 이용해 한 번 더 뛰었다. 그리고 골렘의 팔꿈치에 돌출된 부분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니, 마법사면서 왜 저렇게 육탄전을 좋아하는 건데.’
새틴의 속이 탔다. 당장에라도 골렘이 팔을 휘두르면 추풍낙엽처럼 팔랑팔랑 날아가고 말 텐데 무슨 배짱이란 말이지.
걱정은 불필요했다. 놀랍게도 케인은 골렘이 오금의 칼을 뽑으려 몸을 굽힌 틈을 타 골렘 등에 올라탔다.
“체조 선수야,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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