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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63화 (63/139)

63화

새틴은 먼저 걸음을 뗐다. 깨어난 자리를 지나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발을 옮겼다.

‘가지가 많아서 걸리적거리네.’

미처 보지 못한 잔가지들이 얼굴과 상체 곳곳에 걸렸다. 긴소매 셔츠를 입고 있어 다행이었다. 반소매였더라면 맨살에 생채기가 여럿 생겼으리라.

퉁명스럽던 태도와 달리 케인은 곧바로 따라왔다.

“너도 혹시…….”

케인이 무어라 말을 하다 말았다. 새틴이 돌아보자 고개를 젓는다.

“아무것도 아냐.”

“뭐야, 싱겁게.”

새틴이 웃으며 타박하자 케인은 멋쩍었는지 괜히 인상을 쓰며 말을 돌렸다.

“내가 먼저 갈 테니까 뒤에서 따라와.”

케인은 걸으면서 걸리적거리는 잔가지를 툭툭 꺾어 버렸다. 덕분에 그 뒤를 따라가는 새틴은 한결 편했다.

다행히 예상이 맞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리타와 에드워드를 발견했다. 리타가 불화살을 만들어 램프 대신 쓰고 있던 까닭에 찾기가 쉬웠다.

“새틴! 무사했구나!”

리타가 새틴을 보고 격하게 반가움을 표했다. 새틴은 리타에게 환영의 목 조르기를 잠깐 당한 후 물었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이 있었어?”

“예, 제가 눈을 뜨니 바로 근처에 리타 씨가 쓰러져 있더군요.”

그렇다면 홀에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숲에 떨어진 걸까. 홀에서 리타와 에드워드는 가까이 있었고, 새틴도 케인과 멀지 않은 데에 있었으니.

일단 모두가 무사함을 확인했으니 이제 상황에 대해 알아볼 차례였다.

“근데 이상한 꿈을 꿨어.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꿈.”

리타가 먼저 말하니 에드워드가 약간 놀라서 말을 받았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꿈에서 여자가 되었는데…….”

말을 하다 말고 에드워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새틴은 왜 그런가 했는데 어째 리타는 이유를 아는 듯했다. 두 사람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을 교환했다.

“왜 그래?”

새틴이 물으니 리타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서로가 되는 꿈을 꾼 모양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진짜 신기하다. 넌 무슨 꿈 꿨어?”

“나? 나는…….”

새틴은 곰곰이 기억을 떠올렸다. 숲에서 눈을 뜨기 전 꿈을 꾸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꿈속의 자신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그냥 가만히 누워 있는 꿈이었는데.”

굳이 부연하자면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그저 시커멓기만 한 어둠은 아니었다. 갈고리처럼 구불거리는 희미한 빛이 사방에 뻗어 있었다. 그리고 뺨과 손등이 쓰라릴 정도로 공기가 뜨거웠다.

아마도 그곳은 화재 현장이 아니었을까. 불길 속에 갇힌 맹인이 된 꿈을 꾼 거지.

그러나 새틴은 불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깨어나서는 그냥 그런 꿈이라 생각했는데 리타와 에드워드의 얘기를 듣고 생각하니 꿈의 정체가 짐작되었다.

‘케인의 기억이었구나.’

리타와 에드워드는 우연히 서로가 되는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는 눈치지만 새틴의 생각은 달랐다.

원래 새틴은 꿈을 잘 꾸지 않았다. 꾸더라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까 꾼 꿈에서 느낀 감각들은 생생히 기억난다. 꿈이 아니어서겠지. 이를테면 근처에 있는 타인의 과거를 보여 줬다든지.

‘이런 건 클리셰지.’

트라우마를 보여 주는 함정이나 다른 사람의 기억을 엿보는 마법은 예전 판타지 소설에 흔히 등장했다. 요즘 판타지 소설에서도 찾으려 하면 얼마든지 찾는다. 던전 페널티니 시스템 보상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서 여전히 잘 써먹는다.

그렇다면 그 불길은 4년 전 학교를 태우던 그 불일까. 무력하게 누워 있던 케인은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보다…….’

케인은 무엇을 봤을까.

새틴이 예전의 새틴, 진짜 새틴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새틴은 케인이 기억하는 그 사람이 아니다. 다른 세계의 풍경을 봤는데 그것이 새틴의 기억이라고 하면 의심스럽겠지.

‘내 기억이 아닌 척해야지.’

새틴은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케인에게 물었다.

“넌? 너도 이상한 꿈 꿨어?”

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떤 꿈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새틴은 일부러 묻지 않고 지나가려 했는데 리타가 물었다.

“무슨 꿈?”

“……살인마의 아들이 되는 꿈.”

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드워드도 약간 놀란 기색을 보였다. 새틴은 슬쩍 눈치를 보고 입을 벌렸다. 이러면 대충 놀란 얼굴로 보일 테지.

로브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 낸 케인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중얼거렸다.

“정말 기분 나쁜 꿈이었어.”

∞ ∞ ∞

골렘과 싸우며 무기를 잃지 않은 리타와 에드워드가 가장 앞에서 걷고, 새틴은 중간에서 좌우를 살폈다. 케인은 새틴의 바로 뒤에서 뒤쪽을 경계하며 따라왔다.

“완전히 엉뚱한 데로 이동해 버린 건 아니겠지?”

리타가 의심과 불안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때였다면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고 타박했을 에드워드가 어쩐 일로 아무 말 없다. 조금은 리타와 같은 의심을 했을까.

마왕성의 위치를 생각하면 지금 이 숲은 클로버랜드 남쪽의 숲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마왕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 거대한 규모를 생각하면 숲 어디에 있어도 보이지 않을 리 없는데.

곧 에드워드가 잡풀을 헤치며 의문을 표했다.

“이상한 일입니다. 분명 나오는 사람들을 보지 않았습니까.”

앞서가는 에드워드에게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새틴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성에 들어가기 전에 문지기 와이번들에게 들었다. 시험을 모두 거치지 못한 자들이라고 했다.

“우리는 왜 성의 출입구가 아니라 이런 데로 떨어졌을까요.”

새틴은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첫 번째는 이 또한 시험의 하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마왕성이 사라졌다는 것. 하지만 사라졌다면 왜일까?

새틴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려는데 에드워드가 재차 물었다.

“아까 제가 한 이야기 기억하십니까?”

“무슨 이야기?”

리타가 불화살을 에드워드의 얼굴 바로 앞으로 보냈다. 에드워드가 움찔 놀라 물러났다.

“조심 좀 하시죠. 꿈에서도 그러더니.”

“무슨 소리야?”

“꿈에서 리타 씨가 창문을 깨 먹었습니다. 바람 마법이었는데.”

새틴은 에드워드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좀 전에 하던 얘기부터 하자.”

“아, 엉뚱한 이야기를 할 뻔했군요. 오늘 아침에 신전에서 본 기록 말입니다.”

잠시 경로를 이탈했던 에드워드의 이야기가 원래의 경로로 돌아갔다. 리타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리타는 다소 엉뚱한 성격이긴 해도 경중을 파악하지 못할 만큼 천둥벌거숭이는 아니다.

새틴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리타가 하려다 만 말이 뭔지는 모르나 꿈에 관한 내용이라면 그 화제는 피하고 싶었다.

‘케인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

슬쩍 뒤편을 보니 케인은 이쪽의 이야기에 별 관심 없어 보였다. 뒤쪽을 경계하느라 신경이 곤두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에드워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왕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고 마왕을 물리친 자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이야기만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응, 맞아. 그랬지. 그런데?”

리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에드워드가 지금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는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그 시절에 기록을 남긴 사람이 보기엔 마왕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 아닐까요?”

“마왕이 어떻게 안 중요해. 도시가 망해 없어질지도 모르는 판에.”

에드워드가 걸음을 멈췄다. 얼결에 모두가 이동을 중지했다. 에드워드는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처럼 턱에 손을 얹고서 말했다.

“전 마왕이 사람들을 괴롭게 하려고 나타난 존재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저번에도 이야기했듯 말입니다.”

새틴이 없는 사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모양이다. 새틴은 끼어들지 않고 일단 가만히 있었다.

리타가 재깍 반문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해쳤잖아.”

“엄밀히 말하면 아직 아니죠. 잠들어 있을 뿐이니까.”

“그럼 뭘 하려는 건데.”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저도 모르겠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마왕이란 이름에 매몰되지 말자는 겁니다.”

일리가 있다. 이름이 꼭 실제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새틴 역시 사실은 새틴이 아니지 않은가.

에드워드가 모두를 보며 말했다.

“동화에서 묘사하는 마왕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상상일 뿐이니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 않습니까.”

“오, 동화책 좀 봤나 봐?”

“크흠, 아무튼 우리가 본 마왕성을 근거로 추측해 보자고요.”

리타가 깐족거리자 에드워드는 민망했는지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침 눈이 마주쳐 새틴은 엉겁결에 의견을 냈다.

“어, 마왕성은 어쩌면 시험장일지도 몰라. 마왕성 안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잖아.”

리타가 새틴을 쳐다보았다. 주목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새틴은 괜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을 이었다.

“그 말을 그대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골렘을 상대하며 케인은 당연히 약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시험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해결할 방법이 있지 않겠냐고 했다.

새틴도 그렇게 생각해 봤다.

“마왕성이 시험장이고 그 괴물들과의 싸움이 시험이었다고 가정하면 마왕의 목적은 이거지.”

“뭐?”

리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험을 쳐 본 적이 없나 보다. 반면 새틴은 시험에는 익숙했다. 9년이나 학교를 다녔으니.

“선별.”

마왕성 내부는 지나치게 안정적이었다. 물론 원숭이 떼며 거대한 뱀, 골렘이 위협적이긴 했지만 그들은 모두 시험을 치르는 홀에서 나왔다. 홀에 이르기 전까지는 아무런 위협이 없었다.

위험한 함정도 없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괴수도 없는 마왕성. 인디아나 존스가 왔더라면 여긴 통 재미가 없다고 돌아갔을 정도로 평탄했다. 이름이 아깝다.

그러나 마왕성이 용사라는 존재를 선별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험장이라고 하면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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