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3부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면 모로 가도 서울은 못 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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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용사>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당대의 대신관이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용사를 일컬을 때 <악을 무찌른 자>, <위대한 사람>, <선량한 시민의 구원자>, <신에 가장 가까운 사람>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이 표현들은 당시 사람들이 용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 준다. 사람들은 용사를 보통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용사에 대한 선망은 숭배에 가까워 사람들은 용사를 존경하고 동경하면서도 감히 흉내 내지 않았다.
심지어 용사를 향해 음탕한 욕망을 품은 이들조차 섣부른 유혹을 하지 못했다. 용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최고조였던 시기에는 용사와 하룻밤을 보내게 해 달라며 신전 앞에 엎드린 젊은이가 도합 오백에 달했다. 남녀 성비는 거의 같다.
(중략)
용사의 이름과 나이, 심지어 성별까지. 용사의 신상에 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용사의 과거 행적에 관해서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용사에 관한 모든 기록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인데 정보의 의도적 누락으로 보인다. 용사의 권위가 상할까 우려한 측근들이 업적과 관련 없는 기록을 최대한 배제한 것이다. 그들은 용사의 인간적인 면이 부각되면 필시 불온한 생각을 하는 자가 나올 거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그런 숭앙도 시간이 지나며 흐려져 현재의 세대를 사는 사람들은 용사의 실존에 의심을 품는다. 용사를 위한 정보 누락이 이제는 용사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용사에 관한 기록은 신전에서 주도한 전도 활동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마저 있다.
혹은 용사라는 인물은 존재하였으되 업적은 조작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급진적인 논지를 펴는 이들은 마왕이 처단해야 할 악이 아닌 신의 계획 일부라고 말한다. 즉, 인간들에게 우상이 필요하다 판단한 신이 일부러 마왕을 내려보내고 총아와 대결하는 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말대로라면 마왕 토벌은 활극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반신전파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대개 독실한 신도이며, 사람들이 용사를 숭앙하는 동안 그 어떤 자연재해도 전쟁도 없었음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신전에서도 이들의 활동을 불쾌히 여기지 않는다. 신전은 신의 의도를 해석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이며 악하지 않은 결론을 도출하기만 한다면 죄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중략)
다양한 의견 중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정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세에 용사가 다시 한번 나타난다면 한 가지는 확실해질 것이다. 정말 용사는 평화를 가져오는가.
―용사론 중
1
“앞으로 못 보겠네.”
“그렇군요.”
“별로 아쉽진 않은데, 조금 아쉽다.”
“앞뒤를 생각하면서 말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넌 안 섭섭해? 그래도 우리가 같이 고생한 시간이 있는데.”
“섭섭하지 않다고는 안 했습니다.”
리타와 에드워드는 티격태격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기색이었다. 리타의 말마따나 같이 고생을 하느라 정이 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새틴으로서는 알 수 없다.
‘아니, 사실은 알 것도 같고.’
공주와 신관이라는 신분만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이미 사귀기로 했을 거다. 새틴은 연애라곤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만 사람이기에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둘 사이의 묘한 기류는 매분 매초 더 짙어지는 중이다. 바로 지금도.
‘동네 사람들, 공식 커플 박살 나는 거 좀 보세요…….’
왠지 언짢아서 새틴은 두 사람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훼방 놓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든다. 반면 케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묻는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케인은 어쩌면 아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과 절친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뭘 하는지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옆에 가만히 서 있기가 지루하단 속내를 표정에 그대로 드러낸 채 새틴을 채근했다.
“계속 여기 있을 거냐니까?”
새틴은 멋쩍게 웃고 대답했다.
“인사는 해야지.”
굳이 따지자면 새틴이 인사를 해야 하는 대상에는 케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케인은 마치 새틴이 자신과 당연히 함께 갈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새틴은 일단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리타와 에드워드에게 다가갔다. 새틴을 보고서야 두 사람은 지금 작별 인사를 하는 중이었음을 기억해 냈다.
“아, 새틴도 잘 지내. 저 찰거머리는…….”
리타는 케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썽꾸러기 아이를 보는 표정이지만 아마 케인 입장에서는 리타야말로 시끄러운 아이 같을 터다.
구태여 케인의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진 않았는지 리타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래도 호위 노릇 정도는 해 주겠지. 무사히 집까지 가길 바랄게.”
“응, 고마워. 너도 여행길에 별일 없으면 좋겠네.”
리타와 덕담을 주고받은 후 에드워드와도 짧게 인사했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얘기는 하지 못하겠군요.”
“아, 순례를 가야 한댔지. 건강히 잘 다녀와.”
“새틴 씨도 건강하십시오. 케인 씨도.”
예의 바른 에드워드는 케인에게도 눈인사를 건넸으나 무례한 케인은 건성으로 받았다.
새로운 친구들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뭐 해. 가자.”
케인만 빼고.
∞ ∞ ∞
리타가 마차를 대절해 준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주 쾌적했다. 처음 클로버랜드에 갈 때처럼 비좁은 자리에서 타인의 쿰쿰한 땀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었다.
‘이래서 다들 차를 사나 봐.’
새틴이 작고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는 동안 케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창밖을 보고 있었다. 눈썹 사이가 깊게 팼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새틴이 물으니 케인이 창에 걸치고 있던 팔꿈치를 내렸다. 묘한 시선이 새틴을 바라본다.
“아까 걔네 헤어지는 거 보니까 예전 일이 생각나서.”
“응, 그랬구나.”
저와 관계없는 추억일 줄 알고 새틴은 그냥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데 케인이 아련한 표정이 되어선 이어 말했다.
“그때 그런 일이 없었으면 우리도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을까.”
‘그거 나 아니라니까.’
“그랬다면 지금 이런 생각도 들지 않았을까.”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거 나 아니야.’
“개가 된 기분이야.”
‘넌 고양이를 닮았대도.’
새틴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니 케인은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찍이 클로버랜드를 떠난 마차는 해 질 무렵에 마을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이 마을에는 여관이 없어 마부는 가까운 다른 마을에서 묵은 후 돌아간다고 했다.
“그 전에 식사를 좀 하고 싶은데 식당이 있을지 모르겠구려.”
마부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걱정했다. 이 마을 주민인 새틴이 나서 식당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저기 저 나무 옆이 식당이에요.”
마을의 유일한 식당은 간판이 안 걸려 있어 외지인이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마차가 슬금슬금 방향을 틀어 식당으로 향하는 모습을 잠깐 보다가 새틴도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쩐지 옆에서 걷는 케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피곤한가?’
꽤 편하게 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해서 피로가 아예 안 쌓인 건 아니다. 새틴은 오늘 밤 케인에게 침대를 양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새틴의 생각도 모르고 케인이 불만을 토로했다.
“후졌어.”
“으응?”
“마을이 후졌다고.”
그야 클로버랜드와 비교하면 그렇겠지. 신전처럼 큰 건물도 없고 길엔 반질반질한 돌도 안 깔려 있으니. 게다가 사는 사람이 적어 지금처럼 식사 시간 즈음이면 길이 텅 빈다.
그래도 새틴은 이곳을 꽤 좋아했다. 여기는 다소 비현실적일 정도로 긍정적인 형태의 시골 마을이다.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고, 사계절이 뚜렷하면서 폭설이나 폭염은 없다. 마을 사람들은 다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데 그렇다고 외부에서 물자가 아예 안 들어오진 않는다. 조미료나 향신료는 충분히 수급된다.
아무래도 케인은 내내 도시에서만 살아 시골의 낭만을 모르는 모양이다.
‘심지어 여긴 모기도 없는데…….’
새틴은 이 마을에서 처음 여름을 맞을 때 아주 걱정했다. 숲에 사는 손바닥만 한 모기가 달려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파스도 없는데 가려우면 어쩌나.
모두 기우였다. 이곳엔 모기가 없었다. 벌레는 있지만 사람을 물지는 않았다. 어쩌면 무는 벌레를 새틴이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지금까지는 벌레 피해를 입은 적이 없다. 오히려 클로버랜드에서 날벌레를 여러 번 봤다.
새틴은 속으로만 툴툴거렸다.
‘여긴 모든 현대인의 시골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곳이라고. 귀촌 희망편!’
언젠가 케인도 이곳의 매력을 알게 되겠지.
‘아니, 그 전에 떠나려나.’
지금이야 예전에 안 좋게 헤어졌던 기억 때문에 예민하게 굴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리는 없다. 시간이 지나 새틴의 존재가 당연하고 익숙해지면 바로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봐야 한다는 강박도 사라질 거다.
그때까지만 함께 지낸다고 생각하면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쩌면 그보다 먼저 질려서 떠날지도 모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골 마을 생활에 말이다. 케인은 이제 막 스무 살, 한창때 청년이다. 사건이라곤 사슴(혹은 고라니)의 텃밭 습격뿐인 생활이 지루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뚱한 표정의 케인을 데리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새틴이 지내는 오두막은 다른 집들과 약간 떨어져 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숲에서 야영이라도 하려고?”
“하하, 그럴 리 없잖아.”
새틴이 멋쩍게 웃자 케인은 정말로 못마땅하다는 듯 연신 주위를 살폈다.
“정말 집이 있기는 한…….”
케인의 중얼거림은 오두막을 보고 끊겼다. 입을 벌린 표정은 아무리 봐도 긍정적인 감정 표현 같지 않았다.
몇 초의 침묵이 이어진 후에야 케인은 물었다.
“……저게 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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