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무사히 집을 구하고 잡다한 생필품을 사다 채우니 하루가 훌쩍 갔다. 저녁은 집에서 멀지 않은 식당에서 먹었다. 요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입주 첫날이라 피곤해서 미뤘다.
새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새틴은 낮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 할아버지가 일자리도 소개해 줘?”
“일자리?”
“너한테 그랬잖아. 일 찾으러 왔냐고.”
“아…….”
드물게 난색을 표하며 케인이 시선을 피했다. 새틴이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자 케인은 이내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소개해 주긴 하지만 네가 할 만한 일은 없을 거야.”
“왜?”
“……위험한 일들이라서. 그보다, 무슨 일이 하고 싶은데?”
“음, 글쎄.”
새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노인 돌봄 같은 걸 할까?’
새틴은 이지 없는 노인을 4년이나 돌본 경험이 있다. 심지어 그땐 돈도 안 받았다. 돈을 받고 한다면 훨씬 즐겁게 할 수 있을 거다.
이내 새틴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할아버지가 얌전한 편이어서 쉬웠을지도 몰라.’
활동적인 치매 노인을 돌보기는 그보단 어렵지 않을까.
새틴은 다른 잘하는 일을 생각해 봤다. 집안일에는 조금 자신이 있다. 특히 요리는 괜찮게 하는 편이라 자부한다.
‘여기도 가사 도우미는 있겠지? 부엌 하인 구하는 데를 찾으면 되려나?’
말은 하지 않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케인이 재촉했다.
“생각만 하지 말고 말을 해.”
“아, 집안일 도와주는 일을 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어.”
“무슨 말이야?”
“손이 부족한 집에 가서 요리를 해 주거나, 청소를 해 주거나…….”
왜인지 새틴의 말이 이어질수록 케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케인이 새틴의 얼굴을 보고 작게 혀를 차더니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네가 그렇게 나를 보고 겁먹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진짜.”
“알아, 그래서 더 기분이 좋지 않아.”
새틴은 괜히 미안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한숨을 쉰 케인이 물었다.
“다른 사람을 보살펴 주고 싶은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내가 잘하는 일이 그런 거니까?”
“그럼 내가 널 고용하면?”
“응?”
“내가 너한테 급료를 줄 테니까 집에만 있으라고 하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새틴은 눈썹 사이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음, 그러니까 너를 보살피라는 얘기야? 빨래나 청소를…….”
“아니, 그냥 집에 있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새틴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케인의 표정이 퉁명스러워졌다. 어린애 같지 않은 목소리로 어린애 같은 소리를 했다.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돼?”
“돈은 벌어야지.”
“내가 준다니까.”
케인의 당당한 대답이 새틴에게는 미심쩍게 들렸다. 겨우 스무 살짜리, 그것도 의탁할 어른 하나 없던 아이가 어떻게 돈을 모았을까. 그러고 보면 집을 덜컥 사는 것도 범상치 않았다.
“너 돈이 그렇게 많아?”
“아니, 하지만 돈 나올 곳은 있어.”
“어디?”
“……말할 수는 없지만 있어.”
점점 더 미심쩍다. 새틴은 잠깐 망설이다 물었다.
“너 무슨 나쁜 일 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
“왜 안 중요해? 정말 나쁜 일 하는 거야?”
충격적이다. 마왕과 마신을 무찌르고 공주와 결혼할 수도 있었던 주인공이 돈을 벌려고 나쁜 짓을 하며 아무렇지 않아 하다니. 새틴은 지은 죄도 없이 크나큰 죄책감을 느꼈다.
새틴이 찌그러진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니 케인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그딴 표정 좀 짓지 마.”
“그래, 잘 생각했어.”
“멀쩡한 일로 돈 벌어 오면 돼?”
“어?”
“그럼 집에 있을 거냐고.”
“어, 아니, 왜 그렇게 돼?”
“네가 원하는 대로 나쁜 일 안 한다고 했잖아. 너도 뭔가 내놓는 게 있어야지.”
2
‘이래도 되나?’
새틴은 반질반질한 항아리를 닦고 또 닦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최근 며칠간 새틴의 일상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평화, 좋은 단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앞에 붙은 형용사에 있다.
‘지나치게 아무 일이 없어.’
케인의 집에 얹혀 지내다 보니 예전의 생활이 얼마나 역동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남의 집 일을 돕고, 텃밭의 작물을 살피고, 계절에 따라 숲에서 산나물을 채취하고. 봄이면 봄이라서, 겨울이면 겨울이라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반면 이곳은 너무 정적이다.
좁은 뜰에 심어 둔 잎채소는 그다지 손이 가지 않았다. 외출이라곤 멀지 않은 가게로 장을 보러 가는 것뿐. 내내 새틴은 집에 틀어박혀 이미 닦은 곳을 닦고 또 닦았다.
케인은 집안일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심심해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사실은 심심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새틴은 이 평화를 누려도 되는지 불안했다.
다크에이지는 마왕을 물리치는 데서 끝나지 않는데, 다음 전개는 어떻게 됐단 말인가. 확인하고 싶은데 확인할 방법이 없다. 나가서 돌아다니기라도 하면 뭔가 알 수 있을까 싶지만.
‘케인은 왜 그렇게 내가 나가는 걸 싫어하지?’
케인의 분리 불안이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심해지는 것도 같다. 조금 멀리 갈라치면 어떻게 알았는지 불쑥 나타나곤 했다.
‘스파이가 있나?’
한 번은 케인이 돌아올 시간 즈음 장을 보러 나갔다. 좀 먼 곳의 가게에 갔다가 돌아오니 케인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어 깜짝 놀랐다.
새틴이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이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다는데 농담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사실 진담 같았는데 애써 아닐 거라 부정했다.
‘자긴 맨날 나가면서.’
나쁘지 않은 일을 하라는 새틴의 말을 순순히 따라 케인은 요즘 모험가 연합에서 자잘한 일을 받아 하고 있었다. 모험가 연합이라 하니 거창해 보이지만 실상은 여행자들의 단기 아르바이트 알선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지 않나? 모험가 연합에서 얼쩡거리면서 소식을 모으면.’
잠깐 건방진 생각을 한 새틴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불바다 엔딩은 안 되지.’
새틴은 닦던 항아리를 내려놓고 외출 준비를 했다. 케인이 돌아오기 전에 저녁 찬거리를 사러 다녀와야 했다. 식자재상은 새틴이 드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다.
단골이 된 식자재상에 들어서니 주인아저씨가 반갑게 맞았다.
“저녁거리 사러 왔어?”
“네.”
“저번에 말한 거 들여왔어. 한번 봐.”
“쌀이요?”
“응, 마침 취급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새틴은 신이 나서 주인아저씨가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밀 포대 옆에 정말로 쌀 포대가 놓여 있었다.
‘오늘 저녁엔 볶음밥을 할까?’
길쭉한 쌀을 종이봉투에 퍼 담고 다른 진열대를 둘러보았다. 이 가게는 곡물과 함께 건조 식품을 여럿 취급했다. 마른 새우나 조개를 살까 고민하는데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그 소문 들었어?”
대뜸 주인아저씨에게 묻는다. 흘끔 보니 손님이 아니라 이웃 가게의 상인인 듯했다.
“무슨 소문?”
“수도 분위기가 이상하대.”
“이상하다고만 하면 뭔지 어떻게 알아.”
“저번에 여기도 이상한 안개 생기고 그랬잖아.”
“분위기 흉흉했지.”
“수도도 그럴 모양이야.”
새틴은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주인아저씨가 계산대 밖으로 나오며 물었다.
“그럴 모양이라니? 마왕이 또 나타난 거야?”
“아니, 이번엔 더 심각한 일이래. 마신이 강림한다는 얘기가 있어.”
“마신? 헛소문 아니야?”
주인아저씨가 의심하자 이웃이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신전에서 처음 나온 얘기래.”
“신전에서?”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는 안 했지만 대신전에 물건 대는 상인들이 들었대. 신탁이 내린 모양이더라고. 그 내용이…….”
줄줄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이웃이 말을 멈췄다. 주인아저씨와 이웃의 시선이 동시에 새틴을 향했다.
새틴은 제가 너무 가까이서 듣고 있었음을 깨닫고 머쓱하게 웃었다.
“이거 계산해 주세요…….”
뒷내용은 결국 듣지 못하고 가게를 나왔지만 크게 아쉽진 않았다. 듣지 않아도 대충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됐다.
새틴은 서둘러 집으로 향하며 소리 없이 감탄했다.
‘와, 진짜 어떻게든 이야기가 굴러가네. 어떻게 이게 되지?’
감탄도 잠시 새틴은 이내 생각에 잠겼다. 아까 하던 고민의 계속이다.
‘다크에이지는 명작이지.’
끝까지 안 봤지만 알 수 있다. 누나가 썼는데 명작이 아닐 리 없다.
‘하지만 내가 기대한 세상은 다크에이지가 아니었어.’
천사를 만났을 때 ㅇㅇ는 좀 더 목가적인 소설을 상상했다. 평화롭고, 선량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주인공의 내면 성장을 중심으로 하는 그런 이야기.
문제는 그래서 발생했다. ㅇㅇ는 이를테면 잘못된 대기 줄에 서 버린 거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커피잔을 타게 될 줄 알았는데 웬걸. 아시아 최장 롤러코스터가 눈앞에 나타난 꼴이다.
예기치 못하게 롤러코스터에 올라 버렸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대로 계속 달릴지, 아니면 중도 하차할지.’
물론 진짜 롤러코스터라면 중도 하차는 안 된다. 그러나 다행히 이 경우엔 가능하다.
‘이야기에 간섭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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