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69화 (69/139)

69화

케인은 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긴장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심해지던 긴장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을 보고 단숨에 해소되었다.

대문을 지나며 텃밭을 흘끔 보니 귀퉁이가 비었다. 아침에 나갈 땐 무성했는데 새틴이 다 자란 잎을 뜯은 모양이다. 저 이름 모를 잎채소는 저렇게 뜯어도 사흘쯤 지나면 다시 자랐다.

‘물도 제대로 안 주는 거 같은데 어떻게 저게 되지?’

농사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케인의 눈에는 참으로 신비로운 텃밭이다.

‘사람만 홀리는 게 아니라 식물도 홀리나? 빨리 자라라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문을 두드리니 곧 새틴이 나왔다. 부엌에 있다 나왔는지 손이 젖었다.

“왔어?”

어쩐지 다른 날보다 새틴의 표정이 밝았다. 벙싯거리는 눈과 입이 케인을 불길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 있었어?”

“응?”

케인은 새틴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며 곧바로 주위를 살폈다. 일단 현관에는 별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곳은 더 살펴야 알겠지만.

케인은 새틴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려다 어깨를 얻어맞았다.

“야, 먼지투성이로 들어오지 마.”

“쯧…….”

케인은 작게 혀를 찼지만 새틴의 말에 거역하지는 못했다. 서둘러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오니 부엌에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났다. 그사이 저녁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뭐 거들 거 없어?”

“식탁이나 좀 닦아.”

새틴에게 행주를 받아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탁을 쓱쓱 문질러 닦고 있으니 새틴이 음식을 내왔다. 낯선 음식이 그릇에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다진 채소와 처음 보는 곡물을 볶은 요리다.

“뭐야, 이건.”

“쌀이란 거야.”

그런 이름의 곡식이 있다고 얼핏 들어 본 것도 같았다. 설마하니 새틴이 못 먹을 음식을 주진 않았으려니 싶어 케인은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학교에서 함께 지낼 땐 요리를 할 일이 없었다. 당연히 새틴이 요리를 잘할 거라는 생각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인지 새틴은 털북숭이만큼이나 요리를 잘했다. 요리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는데 재료 손질은 물론이고 불을 쓰는 데도 능숙했다.

‘이것도 그 늙은이 때문인가?’

늙은이의 수발을 드느라 가사 노동을 잘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속이 뒤틀린다. 하지만 새틴이 요리를 좋아하는 기색이라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그 늙은이는 어차피 죽었으니까.’

케인은 새틴이 권하는 대로 요리를 먹었다. 당연히 맛있었다. 먹으면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왜?”

“기분이 좋아 보여서.”

“아니, 기분이 좋을 일은 아니고.”

그렇게 말하지만 새틴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아마도 웃고 싶은 거라고 케인은 짐작했는데 새틴은 애써 웃지 않고 이어 말했다.

“이상한 소문을 들었거든.”

“소문?”

진지한 표정을 보니 흥미가 생겼다. 소문의 내용이 아니라 새틴이 그 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 무척 궁금해진다. 케인은 이 주변에 알고 지내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새틴은 그새 누구와 친해졌기에 소문까지 듣고 온단 말이지.

케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새틴은 약간 들뜬 기색으로 말했다.

“아까 쌀 사러 갔다가 들은 얘긴데, 신전에 신탁이 내려왔대.”

“오, 신탁.”

절로 시큰둥한 반응이 나왔다. 신전에서 나오는 얘기 중 반은 거짓말이고 반은 허세다. 치안청에서 나오는 이야기의 5할이 거짓말이고 5할이 허세이듯.

애초에 신탁이라는 것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 신전이 말하는 신탁이란 그저 예감이다. 대신관이 어느 날 갑자기 “신께서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 하셨습니다.” 하면 그 말은 신탁이 된다. 정말 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웃기지도 않아.’

그 후 정말로 나쁜 일이 일어나면 신탁이 맞은 것이고,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신탁 덕분에 피해 간 것이다.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데 믿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케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무슨 신탁인지도 들었어?”

“마신이 강림한대.”

“……하.”

케인이 무심코 비웃자 새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멋쩍어했다.

“좀 황당무계하게 들리긴 하지?”

“넌 그 소문을 믿어?”

“아니, 뭐 믿는다기보다는 그냥 재미 삼아 들은 거지.”

“안 믿는다는 말이야?”

“꼭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깊게 생각하진 않았는지 새틴은 어깨를 으쓱이며 얼버무렸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함께 뒷정리를 하고 잠깐 응접실에 앉았다. 새틴은 허황된 소문에 관해서는 더 얘기하지 않고 텃밭 이야기만 조금 하다 침실로 올라갔다.

케인은 따라 올라가지 않고 응접실에 머물렀다.

2층에는 두 개의 방이 있다. 예전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부부여서 각각 침실과 서재로 썼다고 들었다.

지금은 새틴과 케인이 각자의 침실로 쓰고 있다. 문이 마주 보고 있어 세 걸음이면 서로의 방에 갈 수 있지만 이제껏 케인은 새틴의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지만.’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케인은 매번 새틴의 침실 앞까지 갔다가 돌아서곤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방에서 잘만 잤는데.

답 없는 고민에 빠져 있던 케인은 자정 무렵, 침실로 올라가지 않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 ∞ ∞

새틴과 함께 온 적이 있는 조그만 가게에는 간판이 없다. 새틴은 대충 집이나 일자리 따위를 소개해 주는 곳이라 짐작하는 눈치지만 실은 아니다. 이 가게의 늙은 주인은 팔지 않는 것이 없다.

‘수상쩍은 영감이야, 정말.’

그리 생각하면서도 케인은 매번 영감의 가게를 이용했다. 어차피 클로버랜드의 인간들은 모두 못 믿을 종자들이다. 그나마 이용 가치라도 있는 영감이 낫다.

케인이 노크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자 영감은 식어 빠진 차를 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능글맞게 웃으며 묻는다.

“이 밤에 어쩐 일이야? 형이랑 보금자리 꾸려서 행복하게 살 것 같더니.”

“형 아니야.”

“아니면 말고.”

맞은편 자리에 케인이 털썩 앉자 먼지가 난다며 영감이 눈살을 찌푸렸다. 먼지가 나는 것이 싫다면 청소를 제때 했어야지. 손님을 타박할 게 아니라.

“요즘 형 눈치 보느라 착한 체하고 산다며. 푼돈 받으면서 건실하게 일한다고 소문이 아주 자자해.”

“누가 그래.”

“그게 중요한가.”

영감이 킬킬 웃었다. 케인은 더 캐묻지 않았다. 영감에게 정보를 물어다 주는 정보원은 클로버랜드 어디에나 있다.

‘하여간 음침한 노인네.’

전 같았으면 그냥 대놓고 험담을 했을 텐데 지금은 속으로만 했다. 영감의 정보원이 있어야 새틴이 낮 동안 무얼 하는지 알 수 있다. 영감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현명하다.

케인이 군소리하지 않으니 영감은 명랑한 낯짝으로 물었다.

“그래서 이 밤에 또 무슨 일로 왔어?”

“이상한 소문이 돈다고 해서.”

“소문? 아, 신탁 말하는 게야?”

“맞아. 무슨 신탁이었는지 영감은 알지?”

“알지.”

이 빠진 찻잔을 들고 영감은 약 올리듯 웃었다.

‘참아야지.’

새틴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클로버랜드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었을 늙은이다. 케인은 괜히 열 내지 않고 차분히 다시 물었다.

“무슨 내용이야?”

영감은 케인을 더 놀리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별 내용이랄 건 없고 더한 시련이 올 테니 대비하라는 얘기였어. 이 정도는 우리 친분을 생각해서 공짜로 알려 줄게.”

“고마워. 그 시련이 마신 강림이란 얘긴 왜 나온 거야?”

감사 인사를 건성으로 흘리고 캐묻자 영감이 “으이구.” 하고 작게 탄식했다.

“얼마 전에 마왕이 나타났잖아. 그보다 더한 시련이라면 마왕의 뒷배가 나타난다는 거 아니겠어?”

“별로 시련은 아니었지 않나?”

“자네야 가족이 없으니 그렇지. 애랑 노인 있는 집들은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니까.”

케인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이야 늙은이들이나 애들이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라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닐 거다. 새틴만 해도 생판 남이 걱정돼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사태가 며칠만 더 갔으면 정말로 큰일이었을 거야. 인간이 생각만큼 강하지가 않거든. 물을 며칠만 못 마셔도 죽는다고.”

“아, 그래.”

“아무튼 간에 그때보다 더한 시련이 온다니 신전에서는 큰일이 났지. 그래서 조용히 대책을 마련하고…….”

이쯤 되었으면 들을 내용은 다 들었다. 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감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올려다봤다.

“더 안 듣고 가려고?”

“들을 건 다 들은 거 같은데.”

퉁명스러운 대꾸에 영감이 푸시시 웃었다.

케인은 대충 인사하고 가게를 나오려다 멈칫했다. 영감이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왜. 또 할 말 생각났어?”

“편지 말인데.”

“편지? 아직 보낼 때 아니잖아.”

“이제 그만 보내도 돼.”

“왜? 그거 쓰는 거 재밌었는데.”

“……클로버랜드가 평화로워 보였으면 좋겠으니까.”

“허이구, 그거 하나 끊긴다고 평화로워지겠어? 이 동네가 얼마나 개판인 줄 뻔히 알면서.”

영감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케인은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저번에 얘기한 거까지만 처리해 줘.”

“직접 안 해?”

“나랑 상관없는 일처럼 보여야 돼.”

“참 나, 자기가 다 계획해 놓고 마지막에만 손 안 대면 남의 일이 돼?”

케인은 영감의 구시렁대는 소리에 대꾸하지 않고 빤히 쳐다만 보았다. 영감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어차피 그놈 죽어 봐야 다 천벌이라고 하겠지. 더 잔소리할 거 없으면 이제 가.”

확답을 들은 후 케인은 가게를 나왔다. 컴컴한 골목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왔다.

새틴의 침실은 문이 닫혀 있었다. 케인은 새틴이 정말 안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지만 참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마신이든 뭐든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새틴과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다면 다른 일이야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