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며칠 전부터 케인은 어느 부유한 사업가의 호위를 맡고 있었다. 케인의 말에 따르면 마왕이 남쪽 숲에 다녀간 후로 호위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새틴으로서는 조금 의아하다.
‘실제로 마왕하고 맞닥뜨릴까 봐 걱정인가?’
마왕이 두 번이나 나타날 리 없는데.
‘이제 마신 차례란 말이야.’
마신은 다크에이지 3부의 최종 보스다. 물론 새틴은 3부는커녕 2부조차 안 봤다. 그래도 스포일러를 봐서 대강 내용은 안다. 마신은 마왕과 같은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
일종의 규칙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은 강해지고, 그에 걸맞게 악역도 더 악랄해진다. 배경 역시 점점 거창해진다.
마을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대륙, 대륙에서 우주!
‘물론 이 장르에서 우주는 안 나오지만.’
마왕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마신은 클로버랜드보다 커다란 볼모를 원해야 한다.
‘이를테면 수도라든지.’
3부의 배경은 클로버랜드가 아니다. 주인공 일행은 마왕을 물리친 후 수도로 향한다. 마신이 나타날 줄은 모르고 시작한 여정이다.
그런데 수도에서 셀럽의 여유를 누릴 새도 없이 마신이 나타난다.
‘여기서도 비슷한 흐름으로 가겠지.’
어제 식자재상에서 엿들은 이야기가 새틴의 추측을 뒷받침했다.
새틴이 알기로 현재 클로버랜드에는 별다른 소문이 없다. 어제 이야기 중 언급된 이상한 소문의 출처는 수도의 대신전이다.
뭘 바라서 마신이 강림하는지는 몰라도 수도의 일이 여기까지 여파를 미치진 않을 것이다.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고.
“클로버랜드는 이제 살기 좋은 곳이 된 거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새틴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틴은 아무것도 아니라 대꾸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두 사람은 함께 모험가 연합에 가는 중이다. 수행 중인 의뢰가 있는 케인은 바로 의뢰인에게 가도 되지만 새틴이 혼자 모험가 연합에 간다니 걱정된다며 따라왔다.
‘걱정할 일이 뭐가 있다고.’
아마도 케인은 소매치기나 강도보다는 새틴이 일을 하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는 것일 테지만, 새틴은 애써 모른 척했다. 주인공이 그런 의처증 같은 짓을 한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말이야.’
곧 새틴은 모험가 연합의 간판을 발견했다.
“저기야?”
새틴이 길 건너를 가리키자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가 연합은 꽤 변변한 건물을 쓰고 있었다. 드문 3층짜리 건물은 모험가 연합의 재정이 탄탄하다는 증명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람은 별로 없다. 원래 한적한 건지 아니면 오늘따라 유독 한적한 건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한산하네?”
“마왕 사태 이후로 여행자들이 많이 떠났어.”
“저런.”
클로버랜드 주민들뿐 아니라 여행자도 줄었다니. 하기야 생각해 보면 재난이 일어난 지역은 한동안 관광객이 줄기 마련이다. 마왕 강림도 따지자면 이곳 사람들에겐 재난 비슷한 것이긴 했다.
길을 건너던 새틴은 슬쩍 케인의 옆얼굴을 살폈다. 별다른 표정은 떠올라 있지 않다. 새틴은 살그머니 입을 열었다.
“어제 그 소문 있잖아.”
“신탁이 내려왔다는 소문?”
“응, 만약 그게 진짜여서 마신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거야?”
새틴이 오늘 갑자기 모험가 연합에 방문하는 이유는 그 소문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다. 외지인들이 많이 다녀가는 곳이라면 소문에 관해서도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까.
케인은 관심 없는 이야기를 들은 듯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무것도 안 할 건데.”
“전혀 관심이 안 가?”
“응.”
“마왕 물리친 사람들은 포상금 엄청 많이 받았잖아. 마신을 물리치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마신이 진짜 있는지도 모르겠고, 있다 해도 그런 존재한테 포상금을 거는 미친놈들이 여기 말고 다른 데도 있다면 그야말로 큰일 아닌가?”
듣고 보니 그건 그렇다. 국가 존망의 위기를 포상금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이 나라는 이미 끝장이란 뜻이니.
“난 이 나라가 어떻게 되든 관심 없어.”
“……그러니.”
케인의 대답은 곧 새틴의 결정이 되었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 하지 않던가. 누나의 명작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케인을 억지로 떠밀어서야 의미가 없다. 끼워 맞춘 이야기가 될 뿐이다. 누나도 그러길 바라지 않을 거다.
‘누나가 이 상황을 알 때의 얘기지만.’
새틴은 롤러코스터에서 하차 벨을 눌렀다. 이제 이야기의 변방에서 주목받지 않는 삶을 살 때가 됐다. 아쉽지만 이야기와는 작별이다.
‘사실 이런 삶이 나한테는 어울리지.’
또 모르지 않나. 저번처럼 누군가 마신을 해치우고 용사가 될지. 어쩌면 마왕을 토벌한 용사들이 이미 수도로 가는 중일 수도 있고.
새틴은 가만히 앉아서 신문으로 소식을 전해 들으면 된다. 그것도 어찌 보면 다크에이지 아닐까. 주인공이 바뀌어도 명작은 명작이니까.
‘그럼 여긴 괜히 왔네. 온 김에 알바 자리나 좀 알아보고 갈까?’
마침 전단 한 장이 새틴의 눈에 띄었다. 모험가 연합의 문에 붙은 전단 중 제일 커다란 것이었다. <평화의 밤 축제에서 일할 사람 모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역 축제 봉사자는 무슨 일을 하지?’
날짜는 두어 달쯤 후. 자세히 보니 아래쪽에 이런 문구도 있다. <사랑의 터널 우선 이용권 증정!>
‘사랑의 터널은 또 뭐야? 이 동네 장사꾼들도 제법 하잖아.’
야시장도 있을까. 뭔가 팔아 볼까. 이야기의 변방에서 파전을 좀 판다고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것 같은데.
새틴이 때 이른 고민을 하는데 앞서 들어간 케인이 혀를 찼다.
“왜 그래?”
“직접 봐.”
케인이 안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의아해하며 그쪽을 본 새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타가 있었다. 직원과 무언가 얘기 중이었다.
“리타?”
새틴이 무심코 부르니 리타도 이쪽을 보았다. 리타의 얼굴에 반가움이 번졌다.
“새틴!”
끌어안을 기세로 달려온 리타는 케인에게 막혀 멈춰 섰다. 케인이 쌀쌀맞게 경고했다.
“불결한 접촉 하지 마.”
“뭐? 친교 행위거든?”
“접촉 없이도 얘기할 수 있잖아.”
리타는 기가 찼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찰거머리는 아직도 이 모양이구나. 아니, 더 심해진 거 같아.”
괜히 제가 민망해서 새틴은 멋쩍게 웃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왜 여기에 있어? 다른 도시로 간다더니.”
“아, 벤스야드까지 갔어. 근데 거기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거든.”
“혹시 신탁에 관한 소문?”
새틴이 슬쩍 되묻자 리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알았어? 벌써 클로버랜드에도 퍼졌어?”
“아, 뭐. 대충 들었어.”
새틴은 대강 얼버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아무래도 소문이 생각보다 더 넓게 퍼진 모양이다. 전화도 인터넷도 없는 세계에서 소문 퍼지는 속도가 상상 이상이다.
리타는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어쩐지 마왕이 너무 허접하다 했어. 시험이었든 뭐였든 분명 뭔가 빠졌던 거야. 이번에야말로 진짜 위험한 일이 벌어지려는 게 분명해.”
“넌 그 소문을 믿는 거야?”
“넌 안 믿어?”
리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어 새틴은 슬쩍 케인의 눈치를 보고 대답했다.
“아니, 나는 뭐랄까.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
“나도 그래. 아무 일 없다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잖아. 대비를 해야지. 나라의 존망이 걸렸는데.”
과연 이 나라의 공주다운 준비성이다.
아무튼 소문이야 그렇다 치고 리타는 왜 여기로 돌아왔을까. 소문의 발원지가 수도니 서둘러 수도로 돌아가는 편이 더 적절한 대응일 텐데.
새틴의 의문은 곧 풀렸다. 리타가 고조된 목소리로 제안했다.
“저번에 우리 꽤 괜찮았잖아. 이번에도 같이 가면 어때? 이번에야말로 진짜 세상을 구해 보자!”
이런 말을 들을 만한 일을 했던가.
새틴이 잠시 회상에 빠진 동안 케인이 대신 대답했다.
“썩 꺼져.”
상당히 상스러운 대답이라 새틴은 깜짝 놀라 케인의 등을 때렸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얘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구하긴 뭘 구한다고. 허영에 차서는.”
리타가 억울해하며 반박했다.
“허영이 아니야! 이번엔 진짜 위기일 수도 있잖아.”
“진짜 위기든 가짜 위기든 난 새틴을 그런 위험한 일에 보낼 생각 없으니까 꺼져.”
케인의 태도는 몹시 강경했다. 리타는 잠깐 말을 잃었다가 이내 따졌다.
“웃긴다. 네가 새틴 보호자라도 돼?”
“그래.”
케인의 즉답에 리타가 당황해 도로 입을 다물었다. 케인은 못이라도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있는 한 새틴은 절대 위험한 데 발 들일 일 없어. 그러니까 꿈 깨고 다른 사람 알아봐.”
리타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결정은 새틴이 할 일이지. 너 새틴보다 어리지? 그런 주제에 왜 보호자 행세야?”
“스무 살이나 스물두 살이나 뭐가 그리 다르다고.”
“참 나, 새틴 나이도 잘 모르네. 새틴은 스물세 살이야.”
“잘 모르는 건 너야. 새틴은 스물두 살이야.”
아이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새틴은 이마를 짚었다.
‘따지자면 난 스물네 살이야…….’
새틴은 말하지 못할 정답을 뒤로 미뤄 두고 두 꼬마를 달랬다.
“얘들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다른 데로 가자…….”
모험가 연합의 직원뿐 아니라 몇 안 되는 방문객들 모두 이쪽을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로 다 큰 어른들이 이리 유치하게 싸우는지 궁금해하는 얼굴이다. 부끄러움은 오직 새틴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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