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얘네 또 왜 이래?’
케인과 함께 약속 장소에 도착한 새틴은 곧바로 의심부터 했다.
왜인지 리타와 에드워드가 아까보다 서먹해 보였다. 내내 잘 지내던 두 사람이 갑자기 서먹하게 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이를테면 낯부끄러운 짓을 했다든지.
‘손이라도 잡았나?’
미심쩍지만 새틴이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사실 이제는 둘이 썸을 타든 뭘 하든 언짢지도 않았다.
‘내 코가 석 자인걸.’
새틴의 두 걸음 옆에서 케인이 뚱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예상보다 사람이 더 모인 상황이 그리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대강 주변을 파악한 케인이 새틴에게 주의를 주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쓸데없이 말 붙이지 마.”
“응.”
과보호하지 말라거나, 저 사람들은 적이 아니라는 말을 하기도 귀찮아 새틴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두 사람이 온 걸 알아차린 리타가 타박했다.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왜 멀뚱멀뚱 보고 있어?”
“사람이 많길래. 몇 명이나 모였어?”
새틴은 슬쩍 웃으며 얼버무리고 물었다. 리타의 옆에서 에드워드가 대신 대답했다.
“스물여덟 명입니다. 다행히 마차가 부족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까지 합치면 서른두 명이구나.”
고개를 끄덕인 새틴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생김은 저마다인데 반해 분위기는 비슷했다. 옷차림이나 짐을 꾸린 모양새가 다들 단기 여행보다는 장기 여행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저들에게는 새틴 일행도 그렇게 보일까. 새틴은 스스로의 복장을 점검했다. 나름대로 행장을 차리고 있지만 어딘지 어설펐다. 하기야 새틴은 아직 장기 여행자라고 하기엔 짬밥이 부족하다. 반면 리타는 꽤 그럴듯한 행색이다.
슬슬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자 어느 여자가 손뼉을 치고 외쳤다.
“자, 다들 모여 주세요!”
제법 풍채가 좋은 여자는 모험가 연합의 직원이었다. 함께 다음 도시까지 갈 사람들을 모집하며 인솔자로 고용했다. 여행자들로만 이뤄진 집단을 인솔해 본 적은 없지만 상단에서 용병들을 인솔한 경험이 여러 번 있다고 했다.
“일정이 길지 않으니 간단한 규칙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싸우지 마시고, 훔치지 마시고, 새치기하지 마세요.”
정말로 간단한 규칙이었다. 동시에 유치하기도 했지만 누구 한 사람 웃거나 야유하지 않았다. 친분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과 어울릴 때 꼭 필요한 규칙이었다.
“괴물이 습격했을 때는 각자의 일행을 중심으로 움직이시되, 다른 일행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세요. 고의로 방해를 해 피해가 발생했을 때는 함께 치안청에 가게 될 겁니다.”
상당히 자율성이 높다. 군대가 아니니 저마다에게 분명한 역할을 배부하느니보다 이편이 안정적이긴 할 터다.
모두가 억지로 친분을 쌓을 필요는 없기에 일행별로 마차에 올랐다. 마차를 따로 수배하지는 않았으나 눈치 빠른 마차꾼들이 모여들어 탈것은 부족하지 않았다.
인솔자는 새틴 일행이 마차에 오를 때 리타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리타는 마치 심복을 치하하듯 손짓으로 화답했다.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리타가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네.”
“무슨 소립니까?”
짐을 내려놓던 에드워드가 물었다. 새틴도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다 말고 리타를 쳐다보았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건 분명 사실이지만 갑자기 그 얘기를 왜 했을까.
리타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니, 위험할까 봐 이렇게 사람들을 모은 거잖아. 근데 사람들을 보니까 또 이런 생각이 드네. 기껏 모였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아쉽겠다고…….”
“확실히 간사하군요.”
에드워드가 너무 산뜻하게 수긍해 버리자 리타가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아, 생각만 한 거야. 내가 이런 생각 좀 한다고 진짜 무슨 일이 생기겠어?”
∞ ∞ ∞
새틴 일행과 인솔자를 포함한 서른세 명이 현재 향하는 목적지는 파인힐이다. 미들랜드의 바로 위쪽에 있는 도시다.
미들랜드와 파인힐을 잇는 도로는 거의 직선이라 어지간해선 길을 잃을 우려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길을 지나기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데 중간에 마을이 없는 까닭이다.
에드워드는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근방의 땅이 경작하기에 좋지 않다더군요. 그래서 옛날부터 내내 비어 있던 땅이라고 합니다. 이십 년 전에 도로가 생기면서 사람들이 그나마 오가게 된 거죠.”
“오…….”
리타는 감탄하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얘긴 어디서 들었어?”
“출발 전에 들었습니다. 리타 씨가 갑자기 양말을 사야겠다며 달려갔을 때요.”
“앗, 그랬구나.”
“결국 양말은 안 사 오셨죠.”
“아니, 생각해 보니 양말은 여러 켤레 있더라구…….”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일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새틴은 괜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들쑤시지 않고 슬쩍 화제를 이어받았다.
“도중에 야영을 할 만한 곳이 있을까?”
에드워드는 언제 리타를 괴롭혔냐는 양 차분해져서 대답했다.
“아마도요. 아무래도 사람 눈은 다 비슷한 법이라 대부분 같은 데서 쉬어 갑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그 자리가 야영지가 되지요.”
“그렇구나.”
“요즘은 밤에도 춥지 않으니 야영도 할 만할 겁니다.”
듣고 있던 케인이 픽 웃었다. 새틴과 에드워드는 무심코 케인을 쳐다보았다. 케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유를 말했다.
“노숙을 많이 해 본 사람처럼 말하기에.”
어떻게 들어도 비꼬는 말이었지만 에드워드는 화내지 않고 쓰게 웃었다. 그래서 새틴이 대신 케인의 팔을 때렸다. 마차에 오르며 로브를 벗어 둔 터라 맨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케인은 몹시 억울해하며 항변했다.
“뭐야, 왜 때려.”
“네가 빈정거렸잖아. 친구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아, 친구 아니라고.”
케인이 짜증을 냈지만 방금처럼 재수 없는 어조는 아니었다. 도리어 어린애가 투정하는 어조에 가까웠다. 새틴이 말없이 쳐다보자 더 말하지도 못했다.
결국 케인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버렸다. 팔짱을 끼고 창밖을 내다보는 자세에서 토라진 티가 났지만 새틴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 지나지 않아 풀릴 걸 안다. 조금 화가 났다고 멀어질 참이었다면 여태 함께 있지도 않았을 테니.
‘너무 친해진 거 같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빨리 헤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사람 일이란 정말 모르는 거다.
예상대로 마차가 야영지에 도착할 무렵이 되자 케인은 토라진 적 없는 사람처럼 새틴의 옆에 붙어 연신 주의를 주었다.
“모르는 사람하고 말 섞지 마.”
“얘기 정도는 해도 되잖아. 서로 돕자고 같이 가는 건데.”
“출발 전에 못 들었어?”
“뭘?”
“싸우지 말고 훔치지 말고 새치기하지 말라고. 인간들이 툭 하면 싸우고 훔치고 새치기하니까 하는 말이잖아.”
“어휴, 알았어.”
새틴이 진저리를 치며 마차에서 내리자 케인은 곧바로 로브를 걸치고 따라 나왔다.
먼저 도착한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곳곳에서 몸을 풀거나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붙임성이 좋은 사람들은 그새 친해져 일행을 합치기도 했다.
“요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나 봐.”
작은 솥을 들고 걷는 사람이 보여 새틴이 수군거리자 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요리할 생각도 하지 마.”
“요리도 하면 안 되는 거야?”
“어차피 도구도 없잖아.”
“그렇긴 한데 생각 정도는 해도 되잖아.”
예전엔 캠핑이며 글램핑 따위가 낭만적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 굳이 불편을 체험하러 가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야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이해가 된다.
모닥불을 피워 요리를 하고, 엉성한 잠자리에 몸을 묻는다. 우거진 나무 사이 새카만 하늘에 흐르는 별의 강은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아름답겠지. 누군가 나서서 악기라도 연주해 준다면 그야말로 낭만의 극치가 아닐까.
‘모기도 없고 말이야.’
새틴이 사람들을 보며 로맨틱한 상상에 빠지려 하니 케인이 옆에서 또 산통을 깼다.
“싸우지 말고 훔치지 말고 새치기하지 말라던 말 잊지 마.”
“알았다고…….”
∞ ∞ ∞
북적이던 식사 시간이 끝난 후 새틴은 케인의 감시하에 일찌감치 잠자리를 꾸렸다. 잠자리라 해도 새로 산 모포를 겹쳐 깐 것에 불과했다. 앞서 에드워드가 말했듯 날이 춥지 않아 그 정도로도 그럭저럭 포근했다.
케인은 새틴의 잠자리 바로 옆에 자리를 깔았다. 누운 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가만히 보고 있던 에드워드가 “너무 가까우면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었지만 케인은 못 들은 체했다.
민망했는지 멋쩍게 웃은 에드워드는 적당히 자리를 만들고 검 손질을 시작했다. 손질이라 해도 별다른 장비가 있지 않아 칼날을 깨끗이 닦는 정도였다.
“이렇게 평화로울 때일수록 경계를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으응, 맞는 말이야.”
이미 깨끗한 칼날을 더 깨끗이 닦는다고 공격력이 올라갈 것 같진 않지만 새틴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해서 에드워드의 마음이 편하다면야.
저녁을 먹고 내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던 리타가 돌아왔다. 리타는 당연하다는 듯 에드워드의 옆자리에 모포를 깔며 말했다.
“클로버랜드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
“무슨 소문 말입니까? 마왕성 사태요?”
에드워드가 검 손질을 잠깐 멈추고 묻자 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정확히는 마왕을 무찌른 대가에 관한 소문이라고 해야 할까.”
“대가?”
새틴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리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왕을 물리친 사람들한테 포상을 엄청나게 줬잖아. 그 소문이 퍼졌나 봐.”
과연 돈 얘기는 쉽게 퍼지는 모양이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기에 일행 중 누구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리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엉뚱한 소문까지 생겨난 거 같아.”
“엉뚱한 소문이라니, 무슨 얘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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