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에드워드가 되물으니 리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클로버랜드의 포상금에 관한 소문이 마신이 나타날 거란 소문하고 합쳐져서 말이야.”
리타는 누가 들을까 봐 소리를 낮춘 게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굉장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 탓인지는 모르나 내내 듣는 시늉도 하지 않던 케인이 몸을 살짝 일으켰다. 조금 흥미가 생긴 얼굴이었다.
리타는 모두의 주목 속에서 약간 우쭐해하며 마저 말했다.
“마신을 물리치면 대신전이 굉장한 포상을 줄 거래.”
잠깐의 침묵 후 에드워드가 핀잔했다.
“헛소문이잖습니까.”
“어, 그렇지. 근데 이 소문이 대세가 되면 대신전도 그냥은 못 넘어갈걸. 한탕 할 수 있겠어.”
신관 앞에서 신전을 등쳐 먹겠다는 얘기를 하다니.
새틴도 어이가 없지만 에드워드는 더 어이가 없어 보였다. 질색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리타 씨는 그 굉장한 포상이 탐나는 겁니까?”
“당연히 탐나지!”
“리타 씨는 어차피, 아니, 그러니까 포상 같은 거 안 받아도 부자 아닙니까.”
에드워드가 뭔가 말을 하려다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새틴은 생략된 말이 무언지 기민하게 눈치챘다.
‘뭐야, 공주라고 커밍아웃한 거야?’
새틴은 아직 리타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낌새조차 느낀 적이 없다. 그런데 이미 에드워드에겐 털어놓았다니.
두 사람이 생각보다 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러다 마신을 무찌르고 나면 정말 결혼이라도 하는 거 아닐까.
새틴은 클로버랜드에서 마왕 토벌 기념 행진을 하던 용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만약 마신 토벌 기념으로 수도에서 대대적인 결혼식이라도 열린다면.
‘심각한 문제 아니야? 공주와 신관의 결혼이라니. 제정일치 사회로 회귀하는 꼴이잖아.’
사실 새틴이 정말로 걱정하는 부분은 이 나라의 정치가 아니다.
‘진짜 결혼이 가능한 거야?’
이 세계의 강제력은 메인 에피소드에만 작용하나? 주인공과 히로인의 결혼 같은 서브 에피소드는 중요치 않은 거야? 그쪽에 더 관심 있는 독자도 있을 텐데?
새틴이 딴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케인이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마왕 토벌 포상금에는 별 관심이 없더니 이번엔 흥미가 생겼을까.
“대신전의 포상이라면 겨우 돈은 아니겠지?”
케인까지 그리 말하니 에드워드가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신전이 돈을 밝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이잖아.”
에드워드의 말을 케인이 툭 끊었다. 에드워드는 재차 한숨을 쉬며 머리를 넘겼다.
“신전은 번 돈을 사리사욕을 위해 쓰지 않습니다. 지역 사회를 위해 순환하고.”
“대신전이 줄 만한 포상이 뭘까?”
이번엔 리타가 에드워드의 말을 끊었다. 에드워드는 신전을 위해 변명하기를 포기하고 대답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주겠지요.”
“이를테면?”
리타가 눈을 반짝이자 에드워드는 곰곰이 생각하다 의견을 내놓았다.
“기도라든지?”
리타는 오, 하며 감탄했지만 새틴은 그러지 못했다. 기도라면 번호표를 뽑아 창구에 가도 해 주지 않던가. 그건 무료던데. 기껏 마신을 무찌르고 받는 대가가 무료 기도라니.
새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에드워드가 살짝 웃고 부연했다.
“보통의 기도와 다릅니다. 대신관의 기도는 정말로 신께 닿으니까요.”
부연 설명을 들어도 잘 와닿지 않았다. 새틴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눈만 끔벅이자 에드워드가 다시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될까요? 신께 소원을 빌어 주는 겁니다. 이루어질 확률이 아주 크죠.”
“오…….”
이제 새틴도 리타처럼 감탄할 수 있었다. 반면 케인은 시큰둥했다,
“이루어 줄 수 없는 소원도 있단 말이군.”
“죽은 사람이 살아나게 해 달라거나, 누군가의 마음을 조종하는 그런 종류는 안 되겠지요. 금기니까요.”
신전에서 말하는 금기는 마법사들의 규칙과 좀 비슷하게 들렸다. 하기야 흑마법사를 처단하는 일이 본래 신전의 역할이었다 하니 신전과 마법사들의 윤리가 비슷할 만도 했다.
뒤이어 에드워드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사람들에게 소원을 빌라 하면 대부분 신의 힘이 필요치 않은 소원을 빌 겁니다.”
“엥, 무슨 말이야?”
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타와 달리 새틴은 에드워드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ㅇㅇ는 천사가 나타났을 때 누나를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것이 불가하다 하니 별다른 바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나 만약 누나가 살아 있었다면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누나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 금기를 제외한 바람은 대부분 세속적이다.
“돈이나 명예에 관한 소원은 신의 힘 없이도 이룰 수 있지 않습니까. 아마 정말로 기도가 필요한 경우는 사람에 관한 소원이겠지요. 병을 낫게 해 달라거나, 머리털이 나게 해 달라거나.”
“아니, 전자는 이해했는데 후자는 뭐야?”
“탈모 때문에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시는군요.”
덤덤한 에드워드의 말에 리타가 입을 벌렸다. 이번엔 새틴도 놀랐다. 이 세계에서도 대머리는 많은 사람의 고민거리구나.
‘모두의 행복을 위해 세상에서 대머리가 사라지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면 세계적 영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자라나라, 머리머리. 새틴은 무심코 제 머리를 한번 만졌다. 미역처럼 굽슬굽슬한 검은 머리는 다행히 풍성했다.
“금기만 아니면 다 이루어 줄 거라고 장담해?”
가만히 듣고 있던 케인이 물었다. 새틴은 케인의 머리를 슬쩍 보았다. 딱히 숱이 부족해 보이진 않았다. 케인이 새틴의 시선을 알아채고 인상을 썼다.
“머리털 얘기 아니야.”
“응, 그래.”
하긴 주인공에게 대머리 유전자가 있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겠지.
새틴은 어색하게 웃고 에드워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담은 하지 못합니다. 저는 대신관도 아니고, 실제로 대신전이 포상을 내릴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만약 포상을 내린다면 말이야.”
어쩐 일로 케인이 진득하게 화제를 물고 늘어졌다.
“그럴 겁니다. 실제로 대신관의 기도로 기적을 행했다는 사례가 있습니다. 불치병을 낫게 하고, 다리를 잃은 자에게 다리가 생겨나게 했지요.”
“그렇다면 기억은 어떨까.”
케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드워드가 새틴을 쳐다보았다. 케인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한마디 안에 내포된 의미를 곧바로 알아차린 기색이다.
에드워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일이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건 정신을 조종하는 일이 아니야?”
“없던 것을 생기게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흠.”
케인은 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에드워드는 설핏 웃었지만 새틴은 함께 웃지 못하고 모포 안으로 파고들었다.
‘야단났네.’
행여 정말로 케인이 소원을 빌 기회가 생긴다면, 그래서 새틴의 기억을 찾아 달라고 빈다면.
‘내가 걔가 아닌 게 들통나잖아.’
∞ ∞ ∞
미들랜드를 떠나며 리타가 했던 말 때문은 아니겠지만 둘째 날 저녁, 괴물들이 나타났다. 이번엔 늑대 인간들이 아니었다.
“와, 역 켄타우로스……”
새틴은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케인이 쳐다보자 아무것도 아니라며 입을 다물었다. 케인은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일단 지금은 저 괴물들을 처리하는 일이 더 시급했다.
괴물은 겨우 세 마리였다. 대신 덩치가 컸다. 한 마리가 어지간한 늑대 인간의 두 배는 됐다.
‘말은 초식 동물 아니었나.’
케인은 인상을 쓰고 괴물의 생김을 살폈다. 두 발로 서 있지만 머리가 말 대가리였다. 커다란 입을 벌릴 때마다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는데 아무리 봐도 초식 동물에게 어울리는 모양은 아니었다.
‘애초에 동물이라고 하기도 어렵긴 하지.’
말 대가리 세 마리는 저번 날 만난 늑대 인간 무리보다 영리하게 움직였다. 삼각형 대형으로 서서 개체 간 간격을 유지한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반면 마차에서 내린 여행자들은 서로 눈치부터 봤다. 썩 영리한 대처는 아니었다.
그나마 마부들이 가장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말들이 행여 동지인 줄 알고 아는 척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데리고 뒤로 몸을 피했다.
어수선하게 흩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모험가 연합의 인솔자가 소리쳤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무기를 확인하세요, 여러분.”
괴물들을 자극할까 걱정이 되었는지 그 외침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도 모두가 듣기에는 충분했다.
전투에 능숙한 여행자라면 인솔자가 하는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을 터다.
무기 간에도 상성이 있다. 다 똑같은 무기를 들고 있다면야 주의할 필요도 없지만 단검을 쓰는 사람의 옆에 창을 붕붕 휘두르는 사람이 있다면 곤란해진다.
대충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졌다. 강해 보이는 사람의 주변은 유독 붐볐는데 케인과 일행의 주변으로 오는 사람은 없었다. 마법사와 신관이 누구인지 인솔자가 알려 주지 않은 모양이다.
‘이편이 낫지.’
누군가 위급한 상황에 새틴을 방패로 삼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물론 더 걱정되는 일은 남을 구하겠답시고 새틴이 스스로 방패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지만.
케인이 속으로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새틴은 자꾸만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왜 자꾸 나와?”
“쟤네들 좀 똑똑해 보이지 않아?”
케인의 타박에 새틴은 대답 대신 딴소리를 했다. 케인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옷을 입었잖아. 바지는 안 입었지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