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살구가 뭐 어쨌다는 거지.
새틴은 의문을 품은 채 일단 과자를 받아서 입에 넣었다. 몇 번 씹다가 알아차렸다.
‘아, 이거 말린 살구구나.’
새틴의 표정에 깨달음이 드러났는지 케인이 설핏 웃고 조금 전 하던 말을 이었다.
“그 말 대가리들, 별로 호전적인 놈들이 아니었어. 갑옷은 입었지만 무기는 없었고.”
리타가 기억난다며 고개를 끄덕이다 킥킥 웃었다.
“바지도 없고 말이야.”
바지를 안 입은 게 그렇게 웃길까. 새틴은 바지를 안 입는 곰과 펭귄 캐릭터에 너무 익숙해서 웃음 포인트를 찾기가 어려웠다. 새틴이 알던 옷 입는 동물 대부분이 상의만 챙겨 입고 다녔다.
‘바지만 입는 쥐도 있었지, 참.’
리타의 웃음이 잦아든 후 케인이 말했다.
“전에 만난 늑대 대가리들을 생각해 봐. 말 대가리들도 괜히 그렇게 생기진 않았을 거 아냐.”
그 말을 듣고서야 새틴은 케인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았다.
‘하울링으로 동료들을 불렀지.’
늑대 인간은 공격에 앞서 늑대처럼 울었다. 진짜 늑대도 아니면서 습성만은 늑대를 빼닮았다.
그런데 역 켄타우로스들은 말을 닮았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말은 초식 동물이다. 초식 동물이라고 모두 평화주의자는 아니겠지만, 초식 동물이 지나가는 행인을 이유 없이 공격할 리도 없다.
여기 있는 모두가 품은 의문을 에드워드가 말로 꺼냈다.
“그 괴물들은 왜 우리 앞을 가로막았을까요?”
∞ ∞ ∞
파인힐을 떠나기 전 새틴 일행은 무기 상점에 들렀다. 이번엔 무기가 아니라 방어구를 찾았다.
“사실 어릴 땐 기사가 꿈이었습니다. 꿈을 이룬 기분이군요.”
에드워드는 철판이 덧대진 갑옷을 입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다 말했다. 본인은 농담이라고 한 말이겠지만 갑옷을 입은 에드워드는 정말 신관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그로 잘 끄는 탱커 같았다.
나머지 세 사람은 가죽 갑옷을 샀다. 이 정도만 되어도 날카로운 이빨 공격 한 번쯤은 막을 수 있을 거라고 가게 주인이 말했다. 두 번은 막지 못하냐고 리타가 물으니 가게 주인은 두 번 물리기 전에 달아나라고 조언했다.
‘하기야 몸통을 물릴 정도면 이미 망한 싸움이겠지.’
가죽 갑옷이라고 깃털처럼 가볍진 않았다. 셔츠 위로 입으니 평소보다 가슴이 두터워 보였다.
‘좀, 괜찮은데?’
새틴은 제 가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케인은 어떤지 슬쩍 확인했다.
‘아, 뭐야.’
로브 때문에 케인의 가슴은 볼 수 없었다. 체격이 좋으니 가죽 갑옷도 분명 그럴듯하게 어울릴 텐데.
새틴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려니 케인이 시선을 눈치채고 물었다.
“왜?”
“아무것도 아냐.”
눈을 가늘게 뜬 케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로브를 들췄다. 예상대로 번듯한 가슴이 드러났고, 새틴은 깜짝 놀라 손사래 쳤다.
“뭐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야? 보고 싶은가 했지.”
“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새틴은 입을 뻐끔거렸다. 졸지에 이상한 사람이 됐다.
그러는 동안 환복을 마치고 나온 리타가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지?”
원래도 일행 중 가장 여행자처럼 보이던 리타는 갑옷까지 갖추니 한층 더 그럴듯했다. 머리가 길고 체형이 날렵해서 꼭 엘프 같다. 인간 세상에서 70년쯤 활동한 엘프.
“그럼 이만 출발할까?”
늘 그렇듯 리타의 선언과 함께 일과가 시작되었다.
일행은 서문 앞에서 마차꾼과 만났다. 바위산을 등진 파인힐의 지형 특성 때문에 북상하려 해도 서쪽으로 돌아서 가야 했다. 인접 도시 레드우드를 거쳐 다시 북쪽으로 향할 예정이다.
말 머리 괴물에 관한 소문이 벌써 퍼진 터라 도시 밖으로 나가려는 마차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파인힐에서 레드우드까지는 마차로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아 돈만 주면 가겠다는 마차꾼이 여럿 있었다.
“이렇게 우리끼리 나갔다가 어마어마하게 센 괴물하고 마주치면 어쩌지?”
리타가 짐을 실으며 하는 말을 들은 마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드워드가 리타의 옆구리를 툭 치고 대답했다.
“별일 없을 겁니다. 겨우 반나절밖에 안 걸리는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아, 근데 이런 얘기 하면 꼭 무슨 일이 생기더라.”
마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리타는 마부를 등지고 있어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에드워드가 급히 새틴에게 눈짓했다. 새틴은 서둘러 리타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타. 이러다 저녁 되겠다.”
“어어, 알았어.”
갑작스러운 재촉에 리타는 어리둥절해하며 마차에 올랐다. 새틴은 에드워드에게 뒷일을 맡기고 재빨리 따라 탔다.
에드워드가 밖에서 마부에게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부의 마음이 바뀔세라 일부러 신관이라며 자기소개까지 했다.
케인은 마차에 오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쯤 되니 리타도 대충 무슨 상황인지 눈치를 챈 모양이다.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근데 진짜 그렇지 않아? 설마 하는 일이 매번 생기는 거 같아.”
새틴은 부정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그야 이야기가 굴러가야 하니까.’
어젯밤 케인과 에드워드도 의심스러워했다.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말 머리 괴물들이 무슨 이유로 마차의 앞을 가로막았는지. 물론 의심한다고 무언가 알게 될 리는 없었다.
새틴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이 세계가 실은 어떤 사람의 상상 이야기를 기반으로 탄생한 세계라고 알릴 수는 없으니.
지금까지 마주친 괴물들은 어쩌면 다크에이지 3부에서 등장하는 괴물들이 아닐까. 거기서는 물론 주인공들이 안전을 위해 사람을 모집하지 않았을 테니 좀 더 멋진 그림이 나왔겠지만.
“꼭 우리가 가는 데마다 일이 생기는 것도 같고.”
리타는 고개를 갸우뚱하다 씩 웃었다.
“왠지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지 않아?”
“참 긍정적이네.”
새틴은 피식 웃었다. 곧 에드워드가 마차에 올랐다. 주인공들, 그리고 악역이 될 뻔했던 한 사람을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
∞ ∞ ∞
마부에게는 다행히도 어마어마하게 센 괴물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범상치 않은 일은 일어났다.
정오를 막 지난 시각,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식사도 할 겸 쉬었다 가자는 의미인 줄 알고 일행은 주섬주섬 먹을 것을 챙겨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깜짝 놀랐다.
“아니, 저게 뭐야?”
리타가 목을 쭉 빼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길을 몇 번이나 오간 적이 있을 마부조차 벙하니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파인힐 북쪽의 바위산. 그 꼭대기부터 시커먼 연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래 저런 게 있었어요?”
리타가 마부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물었다. 마부석에 앉아 넋을 빼고 있던 마부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더듬더듬 대꾸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게, 저게 대체 뭔지…….”
얼핏 봐서는 클로버랜드에 나타났던 검은 안개와 비슷하지만 그 안개는 저리 역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부가 현실 도피하며 중얼거렸다.
“산, 산불일지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수상한 연기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산불로 인한 연기였다면 당연히 아래에서 위를 향했을 텐데. 그리고 주변에 불길도 보이지 않는다.
“뭐지, 대체? 저게 뭐지?”
리타가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고민하는 동안 에드워드는 좀 더 침착하게 말했다.
“일단 이동합시다. 레드우드에 저 연기에 관해 알려야 합니다. 아직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마부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고삐를 쥐었다. 새틴 일행도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점심은.”
케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새틴의 귀에 들어왔다.
“배고파?”
“아니, 내가 아니라.”
무어라 말하려던 케인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 후에야 새틴은 케인이 하려던 말을 짐작했다. 새틴이 끼니를 거르는 것이 신경 쓰인 모양이다.
“한 끼 늦게 먹는다고 죽겠어? 도착해서 먹으면 되지.”
새틴의 말에 케인은 영 탐탁잖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아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마차가 달리는 동안 새틴은 계속 창을 통해 바깥을 확인했다. 맞은편에서 리타도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중얼거렸다.
“왜 다들 저런 걸 두르고 나타날까?”
“무슨 소리야?”
“아니, 마왕이 나타났을 때도 안개가 꼈었잖아. 아마 저건 마신 때문에 나타난 거 아닐까?”
일리 있는 추측이다. 지금 일행은 마신이 나타날 거라는 가정하에 수도로 향하는 중이니까.
새틴은 3부의 내용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별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연기에 관해서도 모르겠고 마신이 어떤 방식으로 등장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주인공 일행 중 누구 하나 죽지 않고 마신을 해치웠다는 사실만 분명하다.
‘내 목숨만 챙기면 되겠지.’
어쩌면 마신을 만나기도 전에 일이 정리될 가능성도 없진 않다. 마왕성 때처럼.
불현듯 불경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그땐 정말로 일이 꼬였던 게 아닐까?’
마왕을 무찌르고 클로버랜드 시내를 행진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케인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리타와 부딪혀서 성물이 바뀐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땐 공교로운 우연이라 생각했는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에드워드에게 듣기로 신은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인지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성물을 가지고 있으면 지켜보다가 축복을 내려 줄 수 있다고 했다.
‘마왕을 무찔러야 했던 사람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혹시…….’
어처구니없는 가정인데 생각할수록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이야기를 강제하는 힘이 생각보다 대단찮은 걸까. 물론 한낱 인간이 보기엔 굉장한 힘이 맞지만 그렇다고 완전무결하진 않다든지.
‘마왕성 안에서도 좀 이상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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