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대신전이라고 하지만 크기가 커서 대신전일 리는 없다. 이를테면 프랜차이즈 본점 같은 게 아닐까.
그리 생각했던 새틴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입을 쩍 벌렸다. 그야말로 큰 신전이었다. 클로버랜드의 신전도 작지 않았는데 여기는 그보다 컸다. 첨탑이 구름이라도 찌를 듯하다.
‘이게 바로 사우론의 눈…….’
넋을 놓고 있다 그만 다른 소설의 영역을 침범해 버렸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여행자님.”
어린 신관이 재촉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새틴은 정신을 차렸다. 이미 리타는 카트린과 함께 저 앞에 걷고 있었다. 에드워드와 케인도 그 뒤를 따라가다 멈춰서 새틴을 돌아보았다. 촌스럽게 신전의 규모에 넋을 빼고 있는 사람은 새틴뿐이었다.
‘내가 제일 현대인인데.’
이게 다 해외여행을 안 가 봐서다. 이런 커다란 종교 시설을 볼 일이 있었어야지. 새틴은 멋쩍게 웃고 신관의 뒤를 따랐다.
대신관이 어디에서 기다리는지는 듣지 못했으나 아무튼 안쪽인지 한참을 걸었다. 카트린이 대동한 아랫사람들도 중간부터는 따라오지 않았다. 쉼 없이 걷는 행렬 중 신관이 아닌 사람은 리타와 카트린, 에드워드, 케인, 그리고 새틴뿐이다.
‘에드워드는 신관이지, 참.’
긴 복도. 높은 천장. 상앗빛 기둥. 빛이 어디서 들어오는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눈 닿는 데마다 영롱한 빛이 어룽거렸다.
‘여기도 기도 창구가 있으려나.’
마차를 타고 들어온 터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 있겠지.
‘이렇게 근사한 신전인데 번호표를 뽑아야 기도를 할 수 있다니.’
이게 안타까워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새틴이 온갖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드디어 행렬은 목적지에 닿았다. 가장 앞에서 안내를 하던 신관들이 전동 커튼처럼 좌우로 갈라섰다. 이전에도 와 본 적이 있는지 리타와 카트린은 자연스레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바로…….”
아직 아무도 이곳이 어디라 설명해 주지 않았는데 에드워드는 약간 감동한 기색이다. 케인은 그런 에드워드가 조금 기분 나쁘다는 듯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두 걸음.”
“어…….”
이제 보니 에드워드에게서 물러난 게 아니라 새틴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순간적으로 눈이 부셔 새틴은 무심코 손을 들었다. 빛의 정체는 금방 알았다. 그리 넓진 않으나 깊이가 있는 방 가장 안쪽에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에 잠시 눈이 팔리는 바람에 새틴은 그 아래 노인이 한 사람 서 있다는 사실을 몇 초 후에나 깨달았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전하.”
단 위에 올라서 있던 노인이 천천히 다가오며 물었다.
“즐거울 뻔했지요. 성하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리타가 고상한 말씨로 인사했다. 다소 낯선 모습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마저 명랑한 반말을 쓰면 그건 그것대로 충격이었으리라.
“너희들은 잠시 나가 있으렴.”
노인이 말하자 여태 일행을 안내한 신관들을 비롯해 문을 열어 준 신관들까지 쪼르르 방을 나갔다. 다들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였는데 아마 수습 신관이 아닐까. 새틴은 얼마 전 수습을 마치고 정식 신관이 되었다던 에드워드의 말을 떠올리며 짐작했다.
문이 닫히고 나자 노인은 지그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으니 긴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짧은 이야기라도 앉아서 하면 더 좋을 텐데 말이에요.”
보는 눈이 줄어서인지 리타의 말투가 조금 가벼워졌다. 노인 대신 카트린이 작은 헛기침으로 리타를 꾸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타는 용건부터 물었다.
“이리 저희를 부르신 걸 보면 급한 사안일 테지요. 무슨 일입니까?”
“전혀 짐작 가는 것이 없으십니까?”
“있긴 한데 기왕이면 확실히 듣고 싶어서요.”
노인은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으나 이미 여기 있는 모두가 노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대신관이다. 직접 신탁을 받았고, 어쩌면 그 신탁을 퍼뜨리라고 명령한 사람. 그런 사람이 일부러 이리 불러서 할 이야기가 평범할 리는 없다.
노인은 스테인드글라스 쪽으로 잠시 눈길을 주었다. 정말로 잠깐이었다. 시급한 사안을 가지고 오래 뜸을 들일 생각은 없는지 곧 리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나라를 구하셔야 합니다.”
지나치게 간략했다. 리타는 물론 나머지 일행들까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다행히 노인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실 꼭 전하께서 구하셔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하께서 함께하시는 편이 좋겠지요.”
“좋다니요?”
“사람들 보기에 말입니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왕족이 한 사람쯤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신전이야 왕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 당연히 그편이 좋고……. 그런 의미에서 조합이 아주 좋습니다. 왕족과 신관, 둘뿐이면 너무 짜고 치는 것 같으니 평범한 시민도 하나 있고.”
노인은 조금 전 말을 아낀 것은 그저 장난이었다는 양 줄줄 말을 늘어놓았다. 새틴은 그 내용을 한 번에 따라가기가 다소 벅찼다.
‘왕족과 신관? 시민이 뭐 어쨌다고?’
다행히 어리둥절한 사람은 새틴만이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눈만 껌벅이고 있고 케인도 인상을 쓰고 있다.
리타만이 노인의 말을 모두 이해하고 따졌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짜고 친다니요? 조합이라는 건 우리 말하는 거예요? 우리 네 사람?”
“예,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용사님을 모셔 올 거라는 말씀을 듣고부터 줄곧.”
“용사요?”
리타가 눈을 굴렸다. 리타가 용사를 모셔 오는 역할이었다고 하면 리타는 일단 용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머지 셋 중 하나가 용사라는 건데, 에드워드가 용사였다면 리타의 역할이 딱히 필요치 않다.
“대체 누가…….”
리타의 눈이 케인과 새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케인의 등을 두드렸다.
‘당연히 얘지, 뭘 헷갈리고 있어.’
새틴의 행동을 의식한 리타의 시선이 케인에게서 멈췄다. 인상을 쓰고는 있지만 당황했는지 케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인공이라도 자기가 주인공이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사는 법이지.’
그런데 그 순간 노인이 손사래를 쳤다.
“그분이 아닙니다. 용사님은 옆에 계십니다.”
리타의 시선이 새틴을 향했다. 케인도 새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에드워드도 크게 뜬 눈으로 새틴을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일행을 데려오면서도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지 카트린도 놀란 얼굴로 새틴을 보았다.
새틴 역시 놀랐으나 눈 둘 곳이 없었다.
“……저요? 저요?”
노인이 대답하지 않고 새틴을 향해 걸어왔다. 새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다들 경황이 없어 쳐다만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내가 왜 용사야?’
아무리 전개가 비틀렸어도 이럴 수는 없다. 전개에 필요치 않은 이레귤러로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규직 전환이라니.
새틴은 저 노인이 무언가 착각했다고 확신했다. 어쩐지 나타나는 괴물마다 좀 엉성하더라.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 생각하면서도 노인에게 반박은 하지 못했다. 당황한 새틴의 언행을 보고 들었으면서도 노인은 의심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그야 대신관쯤 되는 사람이 자신의 믿음을 의심할 턱이 있나.
노인이 새틴의 앞에 멈춰 섰다. 이번만은 케인도 막아서지 않았다. 그럴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을까.
“꼭 뵙고 싶었습니다.”
노인은 리타를 대할 때처럼 존댓말을 썼다. 새틴은 땀을 뻘뻘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저, 제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신관님께서 착각을 하셨다든지…….”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인상착의를 잘못 들으셨거나.”
“용사님, 저는 착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아 때때로 신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지만 저만은 예외입니다. 저는 신의 의도 그대로 전달받으니 말입니다.”
“아니, 근데, 진짜…….”
새틴은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걸 알아 기력이 쪽 빠졌다.
새틴이 더 부정하지 않으니 노인의 표정이 한층 인자해졌다. 노인에게는 새틴이 현실을 받아들인 듯 보였을지도 모른다.
“용사님께서 홀로 이번 일을 정리하실 수 있음을 압니다. 애초에 이 모든 시련은 신께서 용사님을 피로하려 마련하신 것.”
노인이 말하는 피로는 피곤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보인다는 뜻이다. 그 말인즉, 노인은 지금 신이 새틴을 위해 이상 현상들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간 새틴이 하던 짐작과 궤는 비슷했다. 다만 새틴은 그 일들이 자신이 아닌 케인의 주변에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게 말이 돼?’
새틴이 아무 말 않는 동안 노인은 새틴이 하지 않는 말을 지레짐작했다. 아마도 그 모든 짐작이 오해일 테지만 새틴은 가만히 있었다. 이 방에 있는 모두가 놀란 눈치기는 해도 의심하는 것 같진 않았다. 심지어 케인마저 무언가 납득한 얼굴이다.
‘대체 뭘 납득한 거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아무것도 안 한 새틴이 용사라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노인이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한시가 급하니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마신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 주십시오.”
새틴은 눈을 껌벅였다.
마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게 무슨 말일까. 마신이 이미 나타났다고? 어디 있는지도 안다고?
궁금한 부분을 말로 꺼내지 않으니 노인도 설명하지 않았다.
“어서 시민들의 불안을 잠재워 주세요.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성대한…….”
새틴이 무심코 중얼거린 순간, 우연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인지 스테인드글라스가 반짝 빛났다. 공교롭게도 그 색색의 빛은 새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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