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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99화 (99/139)

99화

절뚝절뚝 벽을 짚고 걷다 보니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렸다. 아직 하늘은 짙은 남빛이다. 해가 뜨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무얼 하는 사람일까. 설마 영빈관에서 벌써 새틴이 사라진 걸 알아차렸을까.

새틴은 걸음을 멈추고 벽에 바짝 붙었다. 잘 정비된 길에는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도록 벽에 붙는 것이 그나마 몸을 감출 방법이었다.

새틴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가까워지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니구나.’

발소리가 하나뿐이다. 영빈관에서 새틴의 빈 침실을 확인하고 찾으러 나왔다 치면 적어도 저보단 많은 사람이 나왔을 테다.

터벅터벅 무거운 발소리는 곧 지척까지 다가왔다. 새틴은 잠자코 발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빨리 좀 가라…….’

시큰거리는 발목 통증 때문인지 신경이 곤두섰다. 힘을 빼고 발을 쭉 뻗으니 그나마 좀 낫다.

드디어 가로등 아래를 지나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였다.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뭘 하느라 이 시간에 돌아다니고 있을까.

‘밤 산책?’

어딜 둘러봐도 높은 담벼락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아주 깨끗한 도로는 어딘지 스산한 느낌을 물씬 자아냈다.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 없지만, 어디에나 괴짜는 있는 법이다.

새틴은 대충 그리 생각하며 남자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왜인지 남자가 잘 가던 걸음을 멈췄다. 새틴이 숨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나를 봤나?’

밝은 곳에서는 어두운 곳이 잘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내내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걷던 남자가 어떻게 그림자 속에서 새틴을 발견했을까.

의문은 곧 풀렸다. 새틴은 그림자 밖으로 나가 있는 제 왼발을 발견했다. 이제라도 발을 숨기는 편이 나을까, 아니면 가만히 있는 편이 나을까.

새틴이 고민하는 사이 남자는 아예 이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봐요.”

새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잘못 봤다 생각하고 그냥 가던 길을 가면 좋겠는데 남자가 성큼 다가오며 다시 불렀다.

“이봐요, 왜 거기 숨어 있어요?”

이번에도 역시 새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겨우 세 걸음 남짓을 사이에 두고 멈췄다. 이 거리라면 아무리 어두워도 상대가 사람인지 사물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새틴은 한숨을 쉬고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남자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형씨도 혹시 영빈관에 가려고 그래요?”

새틴은 순식간에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까 새틴이 나올 수 있게 도와준 침입자였다.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이해했는지 남자가 풀린 얼굴로 떠벌렸다.

“나도 갔다 오는 길이거든요. 어제랑 그제랑 용사님 얼굴 한번 보겠다고 갔는데 절대 안 된다고 하잖아요. 오늘이야말로 보려고 담을 넘었는데, 재수도 없지. 하필 경비병들하고 눈이 딱 마주쳤지 뭐요. 아주 좆 빠지게 뛰었다니까.”

이제 보니 남자의 얼굴이 약간 번들거렸다. 땀을 닦을 여유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냥 튈까.’

새틴은 아까 침입자와 경비병들이 달려간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왔다. 그런데 이렇게 마주쳤다는 건 이 남자가 먼 거리를 아주 빠르게 뛰어서 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새틴이 이 남자를 뿌리치고 달아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봐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남자는 새틴이 무어라 반응해 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새틴은 입술을 뻐끔거리다 겨우 한마디 했다.

“……고생하셨네요.”

남자가 씩 웃더니 새틴의 어깨를 두드리며 친한 척했다.

“오늘은 그른 것 같으니까 형씨도 포기해요. 하, 얼굴 한번 보게 해 달라는데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새틴은 남자가 적당히 하고 가 주길 바랐지만 남자는 한참을 구시렁거렸다. 이쪽은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상황이건만 도통 눈치가 없었다.

“그렇지, 방금 엄청 좋은 생각이 났어요.”

새틴은 그 생각이 궁금하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묻지 않아도 남자가 술술 말할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되었다.

“형씨도 나하고 같이 갑시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용사님을 보러 가자고.”

“아니, 저는 그냥.”

“아, 다리를 다쳤구나. 걱정 마요. 내가 부축해 줄 테니까.”

“이건, 아니, 잠깐.”

“내 어깨에 팔 두르고, 그렇지. 갑시다!”

이건 미처 예상을 못 했는데.

∞ ∞ ∞

새틴이 낯선 남자와 계획에 없던 동행을 시작할 무렵, 케인은 눈을 떴다.

사흘째 묵고 있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은 천장을 보며 케인은 인상을 썼다. 천장 탓은 아니었다.

‘기분이 안 좋아.’

나쁜 꿈을 꾼 것도 아닌데 왠지 기분이 나빴다. 눈을 뜨자마자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클로버랜드에서 새틴과 함께 산 며칠 동안 케인은 밤마다 새틴의 방 앞을 서성였다. 새틴이 사라졌을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불안을 잠재우지 못했다.

실제로 새틴이 없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새틴은 매일 아침 문을 열고 나와 잘 잤느냐고 인사했다. 태연히 텃밭을 살피고 신문을 가져왔다. 밤 동안 케인이 쌓은 걱정은 매일 새롭게 씻겨 내려갔다.

아마 이번에도 그럴 거다. 새틴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쿨쿨 잠들어 있겠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케인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운도 걸치지 않고 침실을 나섰다. 한번 피어오른 불안을 가라앉히려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문 앞까지만 갔다 오자.’

어둡고 고요한 복도는 케인을 감상에 빠지게 했다. 화려한 벽과 천장, 바닥의 무늬들이 어둠에 가리자 마치 4년 전 학교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 재수 없는 학교는 이제 없어.’

바로 옆방까지 몇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아주 긴 시간이 지난 듯했다.

케인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문 앞에 잠깐만 서 있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쿵, 쿵쿵, 쿵. 그리 크진 않지만 분명한 소리가 불규칙하게 울렸다. 이 밤중에 대체 어디서 이런 소리가 나는 걸까.

케인은 기이한 불길함에 휩싸인 채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새틴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쿵, 쿵쿵, 쿵, 정체 모를 타격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불안이 점점 덩치를 불렸다.

케인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새틴?”

방 안은 서늘했다. 그저 새벽이라 기온이 떨어진 탓만은 아니었다.

케인의 목덜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침대 쪽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창문이 흔들리며 창틀을 때려 댔다. 쿵, 쿵쿵, 쿵.

∞ ∞ ∞

외국의 왕족이나 사절 등 귀빈만이 묵는 곳이다 보니 영빈관의 직원들은 다들 품위가 있었다. 큰소리를 내거나 경거망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 해가 뜨기도 전부터 영빈관 전체가 소란스러웠다. 전에 없던 일이다.

해 뜰 무렵이 되어서도 그 소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시끄러워졌다.

대신전과 왕궁, 치안청, 관청에서 급히 달려온 마차들이 포치부터 대문 앞까지 줄을 이었다. 영빈관이 한 번에 이렇게 많은 방문객을 받기는 개관 이래 처음이었다.

특히 응접실은 과장을 조금 보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자리가 부족해 앉지 못하고 선 사람도 여럿이었다. 지금껏 방문한 귀빈들은 이곳을 품격 있고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평했는데 지금은 역마차 대합실보다 어수선했다.

“당연히 납치겠죠! 얘가 자기 발로 나갈 이유가 뭐가 있다고!”

리타는 모인 사람들 중 가장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목소리가 크다 해서 대세 의견이 될 수는 없었다.

영빈관의 경비대장이 침착한 얼굴로 반박했다.

“납치라면 로프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미리 준비해서 왔겠지요.”

“하지만 침입자가 있었다면서요?”

“엄밀히 말해 침입은 하지 못했습니다. 담을 넘으려다 실패해 도망쳤으니까요.”

“여러 명이 동시에 담을 넘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중 한 명만 성공해도 새틴 같은 종이 인형 하나 집어 가는 건 일도 아닐걸요?”

경비대장이 대꾸하기 전에 카트린이 리타에게 주의를 주었다.

“용사님을 종이 인형이라 칭하시면 안 됩니다, 전하.”

“난 친구니까 괜찮아요. 일단 납치일 가능성이 없진 않으니까 수배령부터 때리죠. 무사히 데려오는 사람한테 내가 포상을 준다고 해요. 어마어마하게!”

상당히 급진적인 의견에 경비대장이 난색을 표했다. 다행히 이번에도 카트린이 경비대장 대신 리타를 제지했다.

“그건 전하께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경비대장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아, 진짜. 빨리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녜요!”

발을 동동 구르는 리타를 보며 경비대장이 상황을 보고했다. 실은 아까부터 보고 중이었는데 리타가 끼어드는 바람에 잠시 끊긴 참이다.

“일단 치안청의 협조를 받아 주변 탐문을 진행 중입니다. 각 관문에 전해 수도를 빠져나가는 사람의 신분을 철저히 확인하도록 지시도 해 두었고요.”

경비대장의 옆에 앉아 있던 치안총감이 그 말을 확인해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대처였지만 리타는 불만스레 되물었다.

“수배령은?”

이번엔 치안총감이 대답했다.

“외람되지만 수배령은 너무 이른 조치로 보입니다.”

“이르긴 뭐가 일러요. 새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은 사실 리타뿐이었다. 신에게 선택을 받아 마신을 무찌른 용사에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일단 치안청은 규정대로 행동해야 했다. 법에는 용사와 시민을 다르게 대우하라는 조항이 없으니, 용사의 실종도 보통 시민의 실종과 달리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보통 시민과 전혀 차이가 없진 않아서 귀빈이 실종되었을 때로 상정했다.

“용사님의 실종이 공식적으로 알려지면 불온한 자들이 정말로 납치를 획책할 수도 있습니다. 열렬한 신자들은 종종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니 말입니다.”

치안총감은 굳이 예시를 들지 않았다. 앞서 경비대장이 보고한 내용이 이미 충분한 예시가 되었다.

새벽에 침입을 시도한 인물은 용사님의 얼굴을 보게 해 달라며 떼를 쓰던 열성 신자였다. 그제부터 영빈관 근처에 죽치고 있는 모습을 봤다는 경비병의 증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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