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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03화 (103/139)

103화

케인도 한때는 새틴이 기억을 찾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찾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이 없었어.’

사람은 누구나 과장을 한다. 가진 것이나 가지지 않은 것, 혹은 가진 적이 있으나 이제 가지지 않은 것을.

새틴이 없는 동안 케인은 새틴과의 관계를 과장했다. 함께 보낸 시간은 반짝였고, 이별은 극적이었으며, 이별 이후는 비통했다고. 그러한 감상은 오롯이 케인의 몫이라 누구도 틀렸다 지적하지 못했다.

그런데 새틴이 나타났다. 새틴은 유일하게 케인의 감정을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새틴은 함께 보낸 시간이 그렇게까지 빛나지는 않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기억을 되찾는다면 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새틴은 케인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케인은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괜찮지 않았다.

기억이 없는 새틴은 케인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늑대 대가리가 달린 괴물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리타와 에드워드가 분전하고 있으니 새틴은 끼어들고 싶어 안달을 했다. 케인은 새틴이 쓸데없이 위험한 짓을 하는 게 싫었다.

「내가 저놈을 해치우면 넌 뭘 해 줄 건데?」

「해 주다니?」

「보상이 있어야 할 거 아냐. 일단 아무거나 말해 봐.」

「그냥 내 검이나 줘. 나서고 싶지 않으면 나서지 않아도 돼.」

그 순간에 깨달았다. 새틴은 케인이 하는 말과 행동 모두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었다. 케인의 친절을 못 이긴 체 받지 않고, 정말로 못 이겨 받고 있었다.

새틴에게는 케인보다 리타나 에드워드가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새틴이 직접 만든 인연이니까.

‘난 억지로 넘겨받은 유류품 같은 거지.’

버릴 수 없어 가지고 있고, 그럭저럭 조심스레 다루지만 실은 아무 의미 없는 것. 지금으로서는 미친 늙은이의 뼛가루보다 못하다. 그딴 걸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케인은 사라진 새틴의 유류품으로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굳이 되어야 한다면 분실물이 낫다. 새틴이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아 가기를 바란다.

‘그 시절이 별거 아니었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사실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다. 그때 케인은 늘 퉁명스러웠고, 새틴은 케인보다 다른 아이들을 더 챙겼다. 애당초 늙은이의 실험체가 될까 봐 불안에 떨던 날들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그래도 존재한 시간이다. 케인은 그때 새틴과 늘 같은 방에서 잠들었다. 소리 죽여 속삭이고, 함께 달아날 계획을 세웠다. 두 사람 사이에는 유대가 있었다.

케인은 그 시간을 새틴이 다시 기억하기를 바란다.

“이상하네.”

여태 말이 없던 부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소리를 듣고서 케인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렇게 오래 걸릴 거리가 아닌데, 이 친구가 길을 잃었나?”

케인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새틴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여기 있는 걸 눈치챘구나.’

∞ ∞ ∞

―용사님, 외람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외람된 줄 알면서 왜 물어. 이 사기꾼아.”

―저는 용사님이 왜 친구분들을 멀리하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전 사기꾼이 아닙니다.

“딱히 멀리하려는 건 아니야. 이 사기꾼아.”

―하지만 지금 친구분을 피해 도망가고 있으시잖습니까. 전 사기꾼이 아니고요.

새틴은 입을 다물었다. 혼자 중얼거리고 있으니 근처의 행인이 쭈뼛쭈뼛 멀어졌다. 로브를 뒤집어쓴 데다 걸음은 절뚝거리고 연신 혼잣말을 한다면 누가 봐도 수상쩍어 보일 만했다.

사람이 없는 곳까지 가서야 새틴은 대꾸했다.

“걔한테 말 못 한 게 있어서 그래. 이 사기꾼아.”

―잘못이라도 하셨습니까? 전 사기꾼이 아니지만요.

“잘못이라기보다는, 말할 기회가 없었어. 아니, 말하기가 좀 그랬어. 상처받을 거야. 넌 사기꾼이니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지.”

새틴의 말을 케인이 믿을 리 없다. 하지만 믿는다면 분명 상처받을 거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가 살아 있어서 그렇게나 기뻐했는데, 사실은 죽은 게 맞는다니. 차라리 죽었다고 알고 지내던 때가 나았다고 하지 않을까.

그간 모험 비슷한 여행을 하며 지낸 시간이 짧지 않다. 한 지붕 아래 산 적도 있다. 나름대로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새틴의 입장에서나 그렇다. 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새틴은 기만자에 불과하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변명이야. 나도 사기꾼이었어.”

이야기의 진행, 누나의 명작, 이 세계의 강제력. 거창한 변명거리가 많지만 실은 중요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누나가 가장 사랑한 인물이 되고 싶었다는 말은, 누나가 당연히 주인공을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할 수 있던 말이다. 새틴은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역경과 고난이 있어도 결국 행복한 마지막을 맞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더는 변명할 것도 없으니 이제 사기꾼은 떠나는 게 맞아.”

―용사님이 사기꾼인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말하는 건 괜찮은데 네가 말하니까 재수 없다.”

―외람되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나 외람되는지 들어 볼게.”

―아무것도 모른 채 버려지는 것도 상처가 되지 않을까요?

“그만 들을래.”

이미 도망쳤다. 그렇다면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가죽 공방 거리를 나와 바로 역마차를 탈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큰 도시라 그런지 클로버랜드보다 역마차 삯이 비쌌다. 아낄 수 있는 돈은 아껴야 했다.

‘케인은 어떻게 거길 알고 찾아왔을까.’

수도가 초행이기는 케인도 마찬가지일 텐데.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다니나.’

약간 반성한 새틴은 갈림길에서 멈춰 섰다.

표지판을 보니 왼쪽은 관문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거리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알 턱이 없다.

―정말 도망칠 생각이면 왼쪽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관문에 나를 찾으러 온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 돈도 없고.”

가장 미안한 상대는 역시 케인이지만 리타나 에드워드에게도 조금은 미안하다. 오늘의 일정을 어그러뜨렸으니. 물론 그런 일로 화를 낼 만한 성격들은 아니지만 난처하긴 했을 터다.

리타라면 수도의 모든 관문에 사람을 보낼 수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옆을 지나는 사람도 새틴을 찾으러 나온 리타의 심부름꾼일지 모른다.

―제 주인님께서는 용사님이 겨우 돈 따위에 구애받지 않기를 바라셨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팔자라는 게 원래 그래. 근데 주인님이라니?”

―고귀하신 우리 신 말입니다.

마신은 한때 제가 신의 대적자라느니, 악의 주인이라느니 떠들었던 일은 까맣게 잊은 양 뻔뻔하게 신을 입에 올렸다.

‘아니, 입은 없지.’

아마 마신이라던 자기소개도 거짓말이었겠지. 일행을 위험하게 만들었던 저번 날의 전투가 정말로 사기극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되었다. 그리고 그 사기극이 모두 새틴을 위해 짜였다니 기분이 이상하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예? 뭐가 말입니까?

“나를 용사님이라고 부르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계획하고…….”

―저야 모릅니다. 제 주인님께서 원하신 일일 뿐입니다.

“지금은 왜 나한테 붙어 있는 건데.”

―붙어 있는 게 아닙니다, 용사님. 용사님께서 저를 신전에 반납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아, 내 탓이야?”

―그럼 누구의 탓이겠습니까.

“진짜 기가 막혀서, 윽.”

새틴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대화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뒤에서 오는 마차를 보지 못했다. 다행히 마차에는 부딪치지 않았으나 마차를 피하던 행인과 부딪치고 말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할 새도 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불편한 발목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했다. 하마터면 뒤이어 지나간 마차의 바퀴에 손이 깔릴 뻔했다. 한 끗 차이로 간신히 피했다. 놀란 가슴이 펄떡거렸다.

불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나운 행인이 새틴의 멱살을 붙잡아 일으켰다.

“이 절름발이가 지금 누구한테 부딪치는 거야!”

‘누구신데요…….’

몸이 훅 끌려가며 후드가 벗겨지고 얼굴이 드러났다. 새틴은 허둥지둥 로브 자락을 여몄지만 이미 가까운 데 있던 몇 사람과 눈이 마주친 후였다.

“내가 말을 하는데 어딜 보는 거냐, 이 무례한 놈!”

“죄송해요. 근데 저, 이렇게까지 할 일은…….”

“죄지은 놈이 무슨 혓바닥이 이렇게 길어?”

새틴은 특별히 제 혀가 길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아무튼 입을 다물었다. 대여섯 사람이 근처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못 알아봤겠지? 진짜 잠깐이었으니까.’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 못한 인물을 만나면 순간적으로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다. 어디서 본 사람인 건 아는데 누구인지 바로 매치가 안 된다. 이를테면 동네 식당에서 연예인을 봤을 때라든지.

‘그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오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야.’

행인이 딴생각에 빠진 새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감히 내 앞에서 딴생각을 해?”

행인이 입을 열 때마다 코끝이 시큰해지는 냄새가 났다. 어째 쓰는 표현이 하나같이 이상하더라니.

‘술 마셨구나, 이 사람.’

아직 오전이다. 그런데도 이리 술 냄새가 나는 이유는 뻔하다. 어젯밤에 마신 술이 여태 깨지 않았거나,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술을 마셨거나.

아무튼 난처한 상황이었다. 주정뱅이를 상대하기도 곤혹스럽지만 주변 사람의 시선이 모여드는 것은 더 곤란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알아보지를 못하고.”

“시끄러워! 말로만 죄송하다면 다야?”

새틴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정뱅이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그에 비례해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커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당장 네놈을 끌고, 치안청에, 어억!”

순식간에 주정뱅이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새틴이 얼떨떨해하는데 품 안에서 마신이 외쳤다.

―용사님, 친구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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