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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07화 (107/139)

107화

“해야 할 이야기?”

그런 게 있었나?

―소원 말입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애초에 여기에 온 이유가 바로 소원 때문이었는데.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하세요. 우리는 바로 이곳에서만은 거의 전능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시는 게 아니었나요?”

새틴은 자신이 무얼 바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놀라운 존재는 무의식 또한 읽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미처 깨닫지 못한 소원을 이루어 준다면 정말로 좋을 텐데.

―알지만 과연 그것이 소원일까요?

‘무슨 말이지?’

―바라는 것은 때로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건 모순인데요.”

―인간의 마음은 원래 그렇습니다. 바라면서 동시에 바라지 않을 수 있고, 바라지 않는데 실은 바라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언어를 쓰는 것이겠죠.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새틴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겠지만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드는 지금 같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려니 했다.

―천천히 생각해도 됩니다. 이곳은 그대의 의식 세계.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야 사양하지 않았다. 새틴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의 끝에서 소원으로 빌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새틴은 그간 간절히 바라 온 소원이 없다. 무언가를 바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제 와 소원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이미 크나큰 선물을 받았는데 여기서 무얼 더 바랄까.

문득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죠? 다들 저처럼 당신, 그러니까 그쪽, 신님을 만나고 있나요?”

새틴은 신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표현을 여러 차례 바꿨다. 다행히도 신은 개의치 않았다.

―그대는 아주 특수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대를 편애하기에 예외의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약간 미안하면서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 친절한 신은 묻는 말에 모두 대답을 해 주니 케인이 행여 알아서는 안 되는 사실을 알까 걱정이었다.

―그대는 불필요한 걱정을 하고 있군요.

“예? 저, 혹시 다른 사람들이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새틴은 다른 사람들의 소원이 궁금했지만 여기서 물어도 되는지 몰라 머뭇거렸다. 케인이 무엇을 빌지는 이미 알고 있지만 리타나 에드워드는 비밀로 하고 싶을지도 모르니.

―우리가 알려 주지 않아도 이곳을 떠나면 자연히 알게 될 겁니다.

모든 질문에 답을 해 주는 친절한 신이라고 조금 전에 생각했는데. 새틴은 약간 멋쩍어졌다.

―하지만 하나는 말해도 되겠군요. 그대에 관한 소원이니.

“제 기억을 찾아 달라는 소원이군요.”

―그대에게 선택지를 주겠습니다. 그대가 만약 기억을 찾고 싶지 않다는 소원을 빈다면 우선해서 이루어 주겠습니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상냥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드는 말이었다.

새틴은 의문을 곧바로 입 밖에 냈다.

“꼭 저에게, 되찾을 기억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네요.”

―우리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기에 모든 것을 알기도 하고 모든 것을 모르기도 합니다.

되찾을 기억의 유무에 관해서는 알려 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미 앞의 말에서 새틴은 답을 알았다. 새틴이 잃어버린 기억이 없다면 굳이 소원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케인의 소원은 물에 쏟아부은 물처럼 사라질 테니.

이런 힌트 또한 이 친절한 신의 의도일 테지.

“제가, 알지 못하는 게 정말로 있다면, 그 사람이 정말로 나였다면…….”

새틴은 말을 멈췄다. 여기에서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무한하다 했다. 그간 구태여 생각하지 않던 일들까지 헤아려도 된다.

이를테면 어떤 가정. 일부러 모른 체한 어떤 가능성. 내심의 바람.

‘나는 진짜 새틴이 되고 싶었을까?’

다크에이지에서 새틴은 악당의 하수인이었다. 어쩌다 그런 역할이 되었는지, 왜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는지는 묘사되지 않는다. 그런 인물이다.

누나는 그 인물을 가장 사랑한 모양이지만 사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누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과 별개로.

그런데 이 세계에 도착해 만난 새틴은 알던 것과 달랐다. 물론 직접 만나진 않았으나 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악역 새틴은 자신의 역할을 벗어나 다른 사람을 구했다. 케인은 그 새틴으로 인해 살아나고, 달라진 삶을 살게 되었다. 그 달라진 삶이 좋은지 나쁜지를 떠나 케인에게 새틴은 기억해 마땅한 사람이었다.

인생의 전환점, 목적, 구원자. 꼭 누나와 같지 않은가.

‘나는 새틴이 부러웠을지도 몰라.’

있어야 한다고 정해진 자리. 결코 씻을 수 없는 업. 케인이 기억하는 새틴은 그걸 모두 벗어던졌다. 운명을 거스르고 자신의 의지로 좋은 사람이 되었다.

지금의 새틴이 바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

―기억을 찾으시겠습니까?

“저에게 되찾을 기억이 있다면, 그런 게 있다면.”

‘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상위 차원의 존재여. 이곳에서 그대는 결코 불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 ∞ ∞

태어나 한 번도 케인은 기도를 해 본 적이 없다. 눈을 감고 손을 모은 후 소리를 내서, 혹은 소리를 내지 않고 바람을 읊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케인은 신을 믿지 않았고, 신을 믿는다 말하는 인간들을 믿지 않았다. 바람이 있다면 스스로 이루어야 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 들어와 본 사람보다 들어와 보지 못한 사람이 월등히 많은 공간에서 생애 첫 기도를 하게 되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케인의 기도는 기도보다 채권 추심에 가까웠지만.

‘정말 신이 있다면, 진짜 있으면 주기로 한 걸 줘. 내가 한 일은 없지만 그래도 준다고 한 건 그쪽이니까 들어줘.’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기억을 되찾은 새틴은 케인에게 왜 그런 소원을 빌었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새틴에게는 잃어버린 기억이 케인의 생각만큼 소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쁜 기억을 다 잃는 편이 좋았다고 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케인은 새틴에게 기억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행여 그 시간들이 즐겁지 않았다 하더라도 의미가 있었다. 새틴은 자신이 누군가를 구했고 그 인생을 바꾸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만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는 걸 꼭 알아야만 한다.

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지는 모르지만, 몰라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는 편이 낫다.

‘이게 내 소원이야.’

―이런.

케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금 누군가 말했다. 눈을 뜨고 주위를 살피려 했지만 가위라도 눌린 듯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 상황에?’

눈도 뜨지 못하고 선 채로 굳어 버렸는데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가장 큰 신전의 가장 성스러운 공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우리가 바로 그 성스러운 존재이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무슨 소리야, 그게.’

―너의 소원을 들어주러 왔다는 뜻이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케인은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 순간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한마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네 소원은 들어주기 어렵게 되었다.

‘무슨 소리야?’

격노가 치솟음과 동시에 생각이 돌아왔다.

‘내 소원을 들어주러 왔다고 했잖아?’

―그렇다. 다만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뭐?’

―물을 물로 만들고, 불을 불로 만들어 달라 하면 무얼 해 줄 수 있겠느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가 바란 소원이 이미 다른 이로 하여금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그게 무슨.’

―그러니 다른 소원을 빌도록 해라.

갑자기 그렇게 말해 봤자 대뜸 생각이 날 리 없었다. 케인은 새틴의 기억을 되찾는 것 외에 무엇도 바란 적이 없었다.

―거짓말하지 말거라.

‘아니, 그러니까 계속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너는 운명을 타고났다.

목소리는 도통 의미 모를 소리밖에 하지 않았다. 정말 신일까? 환청을 듣고 있는 건 아닐까?

케인의 의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런데 그 운명을 벗어났지. 어느 존재로 하여금.

‘어느 존재?’

―그리고 그 운명을 다시 손에 넣었다. 신기하지 않으냐?

‘그 운명이 대체 뭔데.’

―너와 어느 존재의 사랑.

‘뭐?’

―사랑할 운명을 타고났는데, 전혀 다른 과정을 통해서 결국 같은 결과가 되다니. 이것까지도 그분께서는 생각을 하셨을까?

‘혼잣말할 거면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말씀의 방에서 신탁을 듣는다는 얘기는 역시 모두 거짓이었을지 모른다. 실은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환각을 일으키는 향이나 연기를 들이마신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괴이한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다느니, 사랑할 운명을 타고났다느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이야.

―불필요한 생각은 그만두어라. 그저 바라면 된다. 무엇을 바라지?

‘내가 바라는 건.’

새틴의 기억을 찾는 것 외에 무얼 바랐지. 어느새 목소리에 휩쓸려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케인은 이내 또 의심에 빠졌다.

정말 새틴은 기억을 찾았을까?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이 목소리가 저를 현혹하려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믿음을 시험하는 악마 역시 있을 수 있지 않나?

―확인하는 것이 네 소원이냐?

‘내 눈으로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믿어.’

―의심이 많구나. 다른 어떤 소원을 빌어도 될 텐데 겨우 확인이 하고 싶다니.

케인은 이제 소원이고 뭐고 상관없으니 눈을 뜨고 싶었다. 몸을 움직여 지금 곁에 있는 새틴을 확인하고 싶다. 아직 거기에 있을까? 분명히 거기 있을까?

―너의 소원을 받아들였다.

‘정말로?’

―이제 준비되었느냐?

‘뭐가?’

―확인할 준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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