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10화 (110/139)

110화

새틴이 얼빠진 표정으로 눈만 껌벅이고 있으니 에드워드가 의아해했다.

“새틴 씨는 기억을 찾았어도 모르는 게 많군요.”

“아, 그러게…….”

어색하게 웃어도 에드워드는 별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만지지는 마세요. 만지는 정도로는 독이 옮지 않는다지만 찝찝하니까요.”

“만약 먹으면…….”

“큰일 납니다. 건강한 사람도 고생할 겁니다.”

“그래도 죽는 건 아니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노인이나 아이는 아마 확실히 죽을 겁니다.”

에드워드의 단호한 대답에 새틴은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그 갑작스러운 침묵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수습 신관 하나가 정원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오찬장으로 가시죠.”

잠깐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벌써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다. 일행은 수습 신관의 뒤를 따라 정원을 나섰다.

오찬장으로 가는 동안 리타는 신전의 음식은 왜 모두 싱겁냐며 미리 투덜거렸고, 에드워드는 소금을 가지고 다니라며 핀잔했다.

케인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미심쩍은 듯 새틴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물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케인은 새틴의 이상을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새틴은 무심코 입을 열었으나 말을 하진 않았다.

‘선생님을 실수로 죽였다고 하면 케인은 기뻐하려나.’

그렇더라도 신전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다. 고개를 한 번 젓고 살짝 웃었다.

“다음에 이야기해 줄게.”

∞ ∞ ∞

“에드워드 신관은 계속 대신전에 있을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대신관의 말을 들은 에드워드는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금세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한동안 머무르며 다른 신관님들께 가르침을 받을 예정입니다.”

차분히 말을 마친 에드워드는 물을 한번 마시고 덧붙였다.

“대신관님께도 많은 가르침을 받고요.”

신실한 태도가 미쁘게 보였는지 대신관은 지그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의 시선이 접시로 향한 사이 에드워드가 맞은편의 리타를 흘끔 쳐다보았다. 에드워드와 리타는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어이구.’

새틴은 속으로만 탄식했다. 대신관을 앞에 두고 연애질을 하다니.

뒤틀린 배알을 표현할 틈은 없었다. 대신관이 이번에는 새틴에게 물었다.

“용사님도 수도에 더 머무르면 좋을 텐데요. 용사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으니 말입니다.”

“아뇨, 저는 돌아가야죠. 저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합니다.”

“아쉽게 되었군요.”

대신관은 더 권하지 않았지만 은근한 시선은 오찬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아쉽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모시는 신이 선택한 사람이라 호의를 품었을까.

새틴은 그 친절이 감사하면서 동시에 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오찬을 마치고 영빈관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제 좀 숨통이 트이네.’

신도 만나 봤으면서 겨우 사람 만나는 일로 긴장하다니. 좀 우습지만 어쩌겠는가. 신과 달리 사람은 마음대로 배제할 수 없는 것을.

마차를 타러 가는 길에는 새틴과 케인만 있지 않았다. 안내하는 수습 신관이 몇 앞장서고, 리타와 에드워드도 잠시간 동행했다. 리타는 왕궁으로 돌아갈 예정이고, 대신전에 머무르는 에드워드는 배웅 명목이었다.

오찬장에서 하다 만 이야기를 조금 주워섬기던 리타가 일행을 둘러보며 불쑥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게 설마 오늘로 마지막은 아니겠지?”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앞으로 또 이렇게 모일 일이 뭐가 있겠어.’

에드워드와 리타는 앞으로도 만남을 이어 갈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에드워드는 리타 때문에 여기 남겠다고 했으니. 어쩌면 이곳에 아예 둥지를 틀지도 모르겠다.

반면 새틴과 케인은 수도에 별 미련이 없다. 지금 영빈관에 돌아가면 바로 행장을 꾸릴 예정이다. 여행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법이고 두 사람의 집은 클로버랜드에 있다.

수도에서 클로버랜드까지는 마차로 며칠이나 걸린다. 무리해 서두르지 않는다면 열흘을 족히 넘길 거다. 그 말은 왕복에 한 달 가까이 걸린다는 뜻이다.

‘친구 한번 만나려고 한 달을 쓰긴 좀 그렇지.’

공주인 리타는 어떨지 모르나 새틴의 입장에선 다소 버겁다. 생계도 유지해야 하고 말이다.

새틴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리타가 몹시 서운해했다.

“찰거머리는 그렇다 치고 어떻게 너까지 그럴 수 있어?”

리타가 새틴을 콕 집어 서운함을 표출했다. 말을 보태진 않지만 에드워드의 눈길도 미묘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을 보는 듯하다.

새틴은 난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현실적으로 어렵잖아. 친구 얼굴 한번 보겠다고 한 달을 쓰기는 좀.”

새틴은 눈을 도르르 굴리고 입을 다물었다. 리타와 에드워드뿐 아니라 케인까지 비난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졸지에 희대의 악당이 된 기분이다. 그저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왜, 왜들 그렇게 봐?”

당황한 탓에 그만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리타가 다가와 어깨에 팔을 걸쳤다. 눈이 마주치자 아주 딱한 사람 보듯 말한다.

“새틴, 누가 그걸 몰라? 그냥 말이라도 긍정적으로 하면 좋잖아. 일 년에 한 번은 꼭 보자든지, 응?”

“아…….”

“전엔 안 그랬는데 너무 쌀쌀맞아졌어. 기억을 되찾아서 그런 거 아니야?”

“그건 아니야. 나는 그냥 전이랑 다를 거 없고.”

새틴이 할 말을 찾느라 끙끙거리고 있으니 리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농담이었는데 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부정해.”

리타가 팔을 내리자마자 새틴은 괜히 옷깃을 펄럭였다. 덥지 않은데 땀이 났다.

“다음에 꼭 보자.”

리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일행은 마침 마차가 기다리는 곳에 도착했다. 새틴은 마차에 오르기 전에 대답했다.

“그래.”

새틴과 케인이 탄 마차는 황송하게도 왕실 마차보다 먼저 대신전을 떠났다.

대신전 앞은 오늘도 붐볐다. 마차의 속도는 절로 느려졌다. 어떻게든 용사의 얼굴을 보겠다고 목을 뺀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새틴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케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웃어?”

“내가 리타를 친구라고 했잖아.”

“그게 왜.”

케인은 모르겠지만 새틴은 친구다운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는.

어릴 적엔 우울한 분위기 탓에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겉돌았고, 좀 커서는 행여 실수라도 할까 봐 동급생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다 누나와 함께 살게 되고부터는 더 이상 친구를 사귀고 싶다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 와서야 새틴은 친구를 사귀었다. 리타가 아니라 케인이, 로저스가, 작은 학교 안의 아이들이 첫 친구들이었다. 새틴은 드디어 친구가 무언지 배웠다.

친구란 반드시 서로를 믿어야 하는 관계도 아니고, 꼭 비밀을 공유해야 하는 관계도 아니었다. 서로를 대신해 희생할 의무도, 함께 미래를 계획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함께 어울려 지낸다. 수많은 다름 사이에서 겨우 한두 개의 맞는 부분으로 서로를 붙잡고 지탱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어떤 아이들은 어느샌가 특별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새틴과 케인처럼.

‘레벨 업 하듯이 말이지.’

오늘이 오기 전까지 새틴은 리타나 에드워드를 친구라고 부르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엉겁결에 한자리에 모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줄곧 새틴은 다크에이지의 전개를 고려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기억을 되찾으며 새틴은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친구를 구하려고 위험을 무릅썼던 새틴은 그간 리타와 에드워드, 케인과 함께 보낸 시간을 새롭게 정의했다. 지난 여행은 그들이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친구라는 게 뭔지 잊어버려서 리타가 친구인 줄도 몰랐어.”

리타가 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마다 새틴은 혼자 어색해했다. 이제 와 그 순간들이 아쉬워졌다.

“사실은 친구가 맞았는데 말이야.”

고개를 숙인 채 살짝 웃는 새틴을 보며 케인은 고개만 끄덕였다. 새틴은 웃음이 잦아들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케인이 새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틴도 케인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에 난 너하고 친구였어. 그렇지?”

“맞아.”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

“뭘?”

“지금도 그때처럼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해?”

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응.”

새틴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케인의 앞머리를 건드렸다. 케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표정이 웃겨서 새틴은 슬쩍 미소 지었다.

“내가 남보다 앞서갈 때도 다 있네.”

“무슨 말이야?”

“아냐, 아무것도.”

케인의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못 본 체하고 새틴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모였던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거리의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결코 불행해지지 않을 거라더니.’

정말 그 말이 맞았다. 새로운 관계에 어떤 이름을 붙이게 될지 상상했을 뿐인데 새틴은 가슴이 설렜다.

∞ ∞ ∞

영빈관에 도착해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왕실에서 사자가 왔다. 빈손이 아니었다. 금박 입힌 마차를 끌고 왔다. 대단한 성의였지만, 케인은 마차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걸 타고 가면 까마귀도 달려들겠는데.’

케인이 한 생각을 새틴도 한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이런 마차는 너무, 눈에 띄니까요.”

새틴은 얼굴까지 퍼레져서 사양했다.

그동안 새틴은 어떻게 생긴 마차든 군말 없이 탔다. 사람들의 눈에 띄어도 그러려니 했다. 수도에 영영 머무를 게 아니니 잠깐의 불편은 감수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도 이렇게 화려한 마차를 탈 수는 없었나 보다.

‘클로버랜드에서 사람들이 죄다 새틴을 보러 몰려들면 재앙이 따로 없겠지.’

새틴은 그 좋아하는 텃밭을 가꿀 수 없게 될 거다. 이웃과의 교류도 당연히 엉망이 될 테고. 어쩌면 다른 살 곳을 찾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딜 가도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케인은 그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하나밖에 알지 못한다.

‘불을 지를 수밖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