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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15화 (115/139)

115화

표정은 분명 웃고 있는데 눈빛이 음산하다. 여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라 눈치채지 못했을 뿐 케인은 상당히 예민한 상태였다.

말없이 도망친 전적이 있는 새틴이 또 사라졌는데 불길 속에서 팔다리가 묶인 채 발견됐다. 심지어 케인은 전에도 화재 사고로 새틴을 잃은 적이 있다. 예민하지 않다면 도리어 이상한 상황이다.

‘불은 자기가 낸 거지만.’

새틴은 소리 내 말하지 못할 불만을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케인을 달랬다.

“클로버랜드에만 가면 이런 일은 없을 거야. 어차피 네가 옆에 있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 안 그래?”

케인은 뚱한 표정으로 쳐다볼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래도 눈빛은 조금 유순해졌다. 새틴의 말을 믿기로 했는지, 아니면 옆에 있을 거란 말이 마음에 들었을 뿐인지.

새틴은 케인을 보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계속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뭐?”

“다 왔나?”

새틴은 케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의문사를 못 들은 체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 ∞ ∞

두 번째 여관은 처음 간 곳보다는 못했으나 객관적으로는 좋았다. 객실의 꾸밈새는 오히려 덜 화려해서 세련된 느낌도 들었다.

‘……라고 새틴이 말했지.’

화려하지 않은 게 세련된 거랑 무슨 상관이지?

케인으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됐지만 그러려니 했다. 여관에 대한 새틴의 감상은 지금 당장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까 그건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얼버무리듯 짧게 말했지만 분명히 들었다. 케인이 계속 새틴의 옆에 있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새틴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데이지랜드에 도착하기 전에도 새틴은 그런 뉘앙스로 말을 했다.

자꾸만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케인을 자극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나쁜 의도가 아니리라 짐작하면서도 분명한 답을 알 수 없으니 케인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목욕은 내일 하는 게 낫겠지.”

새틴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상념을 깨고 케인의 귀에 들어왔다. 케인이 반사적으로 쳐다보자 새틴이 어깨를 으쓱였다.

“목욕하러 가다가 그런 꼴이 됐잖아.”

그런 꼴이란 납치를 뜻했다. 새틴은 구태여 흉흉한 단어를 입에 담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다. 케인이 대꾸하지 않으니 새틴은 멋쩍어하며 덧붙여 말했다.

“먼지를 좀 뒤집어쓰긴 했는데, 그냥 내일 집에 도착해서 씻는 편이 안심될 거 같아.”

“……그렇지.”

“그래도 세수는 하고 와야겠어. 바닥에서 뒹굴었더니 영 찝찝하네.”

“그래.”

침착하게 대답하고 있는데 왜인지 새틴의 표정이 묘했다.

“왜?”

케인이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새틴이 웃었다. 그리고 아래쪽을 눈짓했다. 뭘 가리키는가 싶어 고개를 숙인 케인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이게 왜.”

저도 모르는 사이 새틴의 팔을 쥐고 있었다. 살며시 잡은 것도 아니다.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단단히도 움켜쥐었다. 케인은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둥지둥 손부터 뗐다.

잡힌 데가 아팠는지 새틴이 팔을 슬슬 문지르다 물었다.

“걱정돼?”

“그야…….”

“그럼 같이 가면 되지.”

“뭐?”

“왜 그렇게 놀라? 세수 정도는 같이 해도 되잖아.”

“……그렇지.”

목욕도 아니고 얼굴에 물을 좀 묻힐 뿐이니 굳이 번갈아 갈 이유가 없다. 케인은 제가 다소 과하게 반응했음을 깨닫고 민망해서 고개를 숙였다. 새틴은 놀리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창피함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추가적인 대화 없이 함께 세수를 하러 가기로 결정이 났다.

문을 열고 나가니 호위를 서던 두 명의 성기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앗, 어딜 가십니까?”

“저희가 동행하겠습니다.”

“아까도 갑자기 사라지셨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혹시 길을 잘 못 찾으십니까? 역시 저희가.”

새틴이 황급히 둘을 진정시켰다.

“세수만 하고 올 거예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가서 쉬세요.”

“아닙니다. 내일이면 저희 임무도 끝일 텐데요. 휴식은 그 후에 취해도 괜찮습니다. 어서 다녀오십시오!”

새틴이 납치됐던 사실도 모르는 주제에 성기사들은 씩씩하게 말했다. 더 얼러 봐야 통하지 않을 걸 알았는지 새틴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멍청한 놈들, 빈방을 지켜서 뭘 하겠다고.’

케인은 속으로 빈정거리며 새틴의 뒤를 따랐다.

여관의 종업원은 대형 목욕탕도 있다고 했지만 새틴은 사양했다. 종업원은 질기게 목욕을 권하지 않고 세면장으로 안내했다.

늦은 시간이라 세면장을 이용하는 다른 투숙객은 없었다. 새틴은 들어서자마자 작게 감탄했는데 케인은 그 의미가 무언지 바로 알았다.

‘옛날 생각이라도 났나.’

학교에도 이런 넓은 세면장이 있었다. 아이들이 열 명이 넘다 보니 세면대도 여럿 필요했다.

아이들은 아침이면 세면장 앞에 옹기종기 모여 인사를 나누곤 했다. 물론 그 시절의 케인은 그다지 붙임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그 무리에 한 번도 끼지 않았다. 반면 새틴은 야무지지 못한 아이가 있으면 슬그머니 손을 보태기도 할 정도로 친절했다.

새틴이 레버를 당기자 곧바로 물이 쏟아졌다.

“물 잘 나오네.”

딱히 감탄할 부분도 아닌데 새틴은 어딘지 만족스러워 보였다. 요즘 시대에 물 안 나오는 데가 어디 있다고.

잠시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얼굴을 씻었다. 어쩐지 바로 옆에서 세수를 하기가 껄끄러워 케인은 일부러 세면대 하나를 사이에 뒀다. 두어 걸음 거리를 두니 그나마 좀 편했다.

케인이 새틴의 동태를 살피느라 늦어진 사이 새틴이 먼저 세수를 마쳤다. 비치된 수건에 얼굴을 닦다 말고 말했다.

“천천히 씻어. 기다릴 테니까.”

세면장에는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아 새틴은 세면대 위에 올라앉았다. 어차피 다른 사람도 없고 세면대는 넓었다.

케인이 세수를 하는 동안 새틴은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 하듯 말을 꺼냈다.

“네가 좀 과민하다는 건 알고 있지?”

케인이 인상을 쓰고 고개를 들자 새틴이 곧바로 덧붙여 말했다.

“나에 관해서 말이야. 다른 일에는 무관심한 편이지, 너는.”

슬쩍 케인의 얼굴을 살핀 새틴은 다른 데를 보며 눈썹을 문질렀다. 젖은 앞머리도 쓸어 넘겼다.

“나를 찾을 셈으로 불을 질렀잖아. 앞뒤 생각도 못 하고.”

“생각은 했어.”

“그래도 침착하지 못했던 건 인정하지?”

케인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이 안 떨어졌다. 세수를 마저 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대답을 회피하고 있으니 새틴이 이어 말했다.

“그 사람들이 만약 나를 가둬 놓고 다른 데 가 있었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몰라. 화재가 나면 불에 직접 닿지 않아도 연기를 마시다가 죽는 사람도 많거든.”

“그래서.”

케인은 벌컥 고개를 들었다. 새틴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훈계를 하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말을 하려는 건지. 꼭 지금 해야 하는 말인지.

지금이야말로 침착한 척을 하기가 어려웠다. 케인은 멋대로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간신히 폈다. 새틴은 저보다 커다란 사람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 겁을 집어먹었다. 별말은 하지 않지만 몸이 움츠러드는 꼴을 보면 모를 수 없었다.

“내가 하려는 말은, 네가 내 일에 관해서 좀 이성을 잃는 경향이 있다는 거야.”

“그게 나빠?”

순간적으로 욱해서 되물었다. 새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 성급하게 굴지 마. 나쁘다고는 안 했잖아.”

그리 말하며 새틴은 목에 걸친 수건으로 뺨을 문질렀다. 거긴 물기도 없는데.

케인은 무심코 벽을 보았다. 램프가 여러 개 걸려 있어 세면장은 환했다. 노란 불빛이 닿은 새틴의 뺨이 약간 불그스름했다.

‘덥나?’

케인은 금세 생각을 정정했다. 더워서 얼굴이 달아올랐을 리 없다. 덥지 않아도 가끔 사람은 얼굴이 뜨거워질 때가 있다.

“다 씻었어? 그럼 올라가자.”

새틴이 세면대에서 내려오더니 성큼 입구로 향했다. 케인은 급히 수도를 잠그고 뒤를 쫓았다.

“잠깐만.”

젖은 손으로 새틴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새틴은 살짝 찡그린 얼굴로 돌아보더니 가지고 있던 수건으로 케인의 얼굴을 닦았다.

“내 건 축축하니까 새로 하나 챙겨 와.”

케인은 새틴의 손에서 홱 수건을 빼앗으며 몰아붙였다.

“너 무슨 말 하려고 했잖아.”

“으음.”

새틴은 여유로운 태도를 가장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발이 그 증거다. 새틴의 뒷걸음질은 문턱에 뒤꿈치가 툭 부딪치고서야 멈췄다. 새틴은 발치를 흘끔 보고 작은 한숨을 쉬었다.

문은 아까 열어 둔 채지만 너머는 고요했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한다고 무어라 할 사람은 없었다.

기 싸움이라도 하듯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케인은 도통 열릴 기미가 없는 새틴의 입술을 바라보다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일에 과민한 건 맞아.”

새틴이 찰나 간 케인의 눈을 보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거리가 가까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선명하게 보였다. 앞머리 끝에 매달린 작은 물방울 또한.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나쁘지 않다는 말이 꼭 좋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순간 케인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막연히 낙관했다. 잠든 새틴을 보다 얼굴이 뜨거워졌을 때처럼, 지금 새틴도 비슷한 이유로 얼굴을 붉히고 있다면. 충분히 낙관할 만한 상황이었다.

새틴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케인은 시간이 느려지는 마법의 공식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만약 그런 마법이 있다면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러나 새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신비롭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았다.

“개연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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