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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17화 (117/139)

117화

창문이 닫히자 마차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케인은 아까처럼 풍경 구경을 하는 대신 새틴을 보고 있었다. 이 부담스러운 시선을 모른 체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새틴은 슬쩍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봐?”

“아까 하던 얘기 말이야.”

“아까?”

무슨 얘기를 말하는 거지.

새틴이 고개를 갸웃하자 케인이 살짝 미소 지었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기묘한 긴장감이 마차 안을 메웠다.

“네 성격은 타고났을까?”

데이지랜드를 떠나기 전에 이런 얘길 잠깐 하긴 했다. 하지만 새틴은 케인이 왜 이 얘기를 하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성격이 뭐 어땠다는 거지.

새틴이 눈만 끔벅이니 케인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긴장감도 더 무거워졌다.

“성격이라는 건 타고나기도 하지만 학습되기도 하잖아. 이건 성격보다는 습관인가?”

케인의 어조는 전혀 거친 데가 없었다. 그럼에도 새틴은 움찔 놀라서 몸이 튀어 오를 뻔했다. 다행히 기지개를 켜는 척하며 무마했는데 케인이 보기에 자연스러웠을지는 모르겠다. 목을 주무르는 척 시선을 피하자 케인의 말이 이어졌다.

“난 네가 기억을 찾기를 바라서 소원을 빌었는데, 생각해 보면 내가 좋아한 너는 이미 기억을 한번 잃은 후였잖아.”

“……그렇지.”

“그 전의 기억까지 모두 되찾아 버린 너도 내가 좋아한 사람일지 궁금했어. 걱정도 되고.”

“그럴 만, 하지.”

“그런데 별반 다르지 않단 말이지.”

대꾸할 말이 없어서 새틴은 잠자코 있었다. 기지개 시늉을 더 하기도 어려워 슬그머니 팔도 내렸다. 벌 받는 아이처럼 어깨가 저절로 처졌다.

“그 전의 기억은 여전히 없어?”

케인은 질문을 했으면서 대답할 시간은 주지 않고 또 의문을 표했다.

“없다고 하면 사실 이상하잖아. 기억을 되찾아 준 게 사람도 아니고 신인데 말이야. 왜 그건 찾아 주지 않았을까?”

기억을 모두 찾았다고 말하기도, 찾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수도를 떠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별말이 없기에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은 줄 알았다. 케인은 언제부터 의혹을 품고 있었을까.

‘땀나네, 진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땀방울이 등줄기를 가로질렀다. 이리 땀이 나는 이유가 그저 날씨 때문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4년 전 케인과 처음 만났을 때 새틴은 기억 상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억 상실이라는 핑계가 먹힌 것은 그 전의 새틴이 당연히 알아야 할 일들을 알지 못해서다. 기억을 모두 되찾은 지금은 먹히지 않을 핑계다.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골머리를 싸매던 새틴은 불현듯 떠올렸다. 케인이 한 말에 어떤 표현이 두 번이나 들어갔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지.’

새틴은 결심을 다잡고 입을 뗐다.

“좀 전에, 나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무슨 의미인지 일단 물어도 될까?”

유감스럽게도 공격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이미 방어할 준비가 다 된 모양이다. 케인은 당황한 기색 없이 새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가족도 아니지. 그럼에도 좋아한다는 말을 한다면 남은 건 하나 아니야?”

방어를 가장한 공격이었다. 케인과 달리 새틴은 아직 방어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그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이런 거.”

뻔뻔한 표정인 주제에 직접 낯간지러운 단어를 입에 담기는 싫었을까. 케인이 손을 쭉 뻗어 새틴의 멱살을 잡았다.

‘아니, 멱살이 아니라 이건.’

옷깃을 말아 쥐고 당기더니 그대로 고개를 가까이 했다. 그리고 입술이 거의 닿기 직전에 멈췄다. 새틴은 너무 놀라 눈을 치떴다. 가까워서 케인의 표정은 식별되지 않지만 아무튼 불그스름한 뺨은 보였다.

그 상태에서 케인이 이어 말했다.

“할 수 있는 사이.”

말하는 도중 입술이 가볍게 스쳤다. 워낙 미미한 접촉이었던 터라 새틴은 바로 인지하지도 못했는데 케인이 확 밀치는 바람에 알았다.

‘닿았구나.’

치명적인 바람둥이인 척해 봤자 이제 겨우 스무 살. 그간 복수니 마왕 소환이니 음침한 생각만 하며 사느라 풋풋한 연애 경험 따위 없겠지. 첫 키스에 관해서도 물론 상상해 본 적이 없을 거다.

얼굴이 온통 시뻘게진 채 케인은 창밖만 노려보았다. 새틴은 반대쪽 창을 보며 속으로 안도했다.

‘한숨 돌렸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나도 첫 키스잖아.’

∞ ∞ ∞

오랜만에 보는 클로버랜드는 그리 달라진 데가 없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마왕 토벌 영웅 배출>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모험가 연합 앞에 걸려 있었다는 점이다.

‘저런 건 언제 걸었대.’

분명 클로버랜드를 떠날 때는 보지 못했으니 그 이후에 걸렸을 테다. 그나마 <마신을 물리친 용사 배출>이라고 적혀 있지 않아 다행이다. 새틴은 클로버랜드에서 모쪼록 평안하게 지내고 싶었다.

성기사들은 새틴을 집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했다. 새틴은 데이지랜드에서 그랬듯 오해를 살까 봐 사양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차에 실린 짐이 많았다. 케인과 나눠 지고 가려다가는 허리가 짜부라질지도 모른다.

‘차라리 마차로 가는 편이 눈에 덜 띌 수도 있어.’

여하튼 마차는 금세 클로버랜드 시가지를 가로질러 새틴과 케인이 사는 동네에 이르렀다. 평소 보이지 않던 커다란 마차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다행히 유심히 보는 사람은 없었다.

“와, 텃밭이 괜찮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새틴은 감탄부터 했다. 이웃에게 부탁했던 텃밭이 예상외로 멀쩡했다. 정말 꾸준히 와서 살펴본 모양이다.

‘선물로 뭐라도 갖다 줘야겠는데.’

싣고 온 물건 중에 나눠 줄 만한 게 뭐가 있을지 생각하며 새틴은 일단 감사 인사부터 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편하게 여기까지 왔어요.”

무난한 인사말일 뿐인데 성기사들의 눈이 글썽거렸다. 덩치는 커다랗지만 표정만 봐선 순진한 아이들 같았다. 아마 다들 케인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 어쩌면 새틴보다도.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면 신전으로 찾아와 주십시오.”

“모든 이들이 새틴 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저희는 언제나 새틴 님께 은혜를 갚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말입니다.”

주변 눈을 신경 쓰는 새틴을 배려해선지 성기사들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래 봤자 내용이 너무나 광신도 같아서 새틴은 기쁘기보단 난감했다. 그래도 고맙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늘은 신전에서 머물고 내일 출발한다는 성기사들은 짐까지 모두 옮겨 준 후 떠났다. 새틴이 대문에 나와 배웅을 하는 동안 케인은 안에서 짐을 분류했다.

새틴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자 케인이 흘끔 돌아보며 물었다.

“그놈들은 갔어?”

“그놈들이라니, 우릴 여기까지 데려다준 사람들인데.”

“아, 그래. 그분들은 갔어?”

집에 도착해서인지 케인의 태도가 좀 너그러워졌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빈정대는 걸로 보일지 모르나 새틴은 오해하지 않았다.

“오늘은 신전에서 자고 내일 돌아간대.”

“어쨌든 이제 볼 일 없겠네.”

“그렇겠지. 근데 지금 정리하려고?”

케인은 꽤 본격적으로 정리를 할 기세였다. 부지런해 나쁠 건 없다만 귀가 첫날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 새틴이 떨떠름하게 보고 있으니 케인이 픽 웃었다.

“내일은 할 일이 있어.”

“무슨 일?”

방금 집에 돌아왔는데 내일의 일정이 있다니. 새틴은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케인은 대답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피곤하면 쉬어.”

“너 정리하는데 어떻게 나 혼자 쉬냐…….”

새틴은 미심쩍은 속내를 굳이 숨기지 않고 케인의 옆에서 손을 더했다.

‘내일 뭐 하려고 그러지?’

공개 프러포즈?

‘그건 아니겠지.’

정리를 대강 마친 후 새틴은 잠깐 외출하기로 했다. 외출이라 해도 대단찮았다. 텃밭을 돌봐 준 이웃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선물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케인이 생각하기엔 그 외출이 위험한 작전처럼 느껴지기라도 했을까.

“……따라온다고? 바로 옆인데?”

“가면 안 돼?”

“아니, 안 될 건 없는데.”

새틴은 영 떨떠름한 기분이었지만 더 막아서지 못했다. 작은 선물을 달랑달랑 손에 들고 집을 나섰다. 케인은 보호자보다는 감시인 같은 태도로 뒤를 따라왔다.

새틴과 친분이 있는 이웃은 머리가 반백인 부인이었다. 부인의 이름은 새틴도 모르고, 그 부인 역시 새틴의 이름을 모른다. 이름을 몰라도 얕은 교류를 하는 데는 아무 지장 없었다.

문을 두드리자마자 나온 부인은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어머, 이제 돌아온 거야?”

“네, 생각보다 늦었네요.”

취미라던 종이 공예를 하다 나왔는지 앞치마에 작은 종잇조각 따위가 붙어 있었다. 이 동네에는 나이 든 부부가 많이 사는데 대부분 취미 생활에 골몰했다.

‘이 동네에서 우리가 제일 이질적이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부인의 시선이 새틴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새틴은 얼른 케인을 소개했다.

“제 동거인이에요.”

새틴이 케인의 등을 툭 쳤다. 케인은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한국이었다면 무례하단 소리를 들었을 행동이지만 다행히 여긴 유교의 나라가 아니다.

“아주 훤칠한 친구네.”

부인은 그저 케인의 얼굴을 보고 감탄할 뿐 언짢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케인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친구는 아니지만.”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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