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한식 세계화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세계 어느 나라의 요리든 한국에 들어올 땐 현지화를 거친다. 한식도 세계로 나갈 때는 현지화 될 수밖에 없었다.
‘치즈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참 좋아하지.’
치즈 닭갈비, 치즈 핫도그, 치즈 떡볶이. 치즈만 들어가면 어떤 음식이든 불티나게 팔렸다.
‘그냥 사람들이 먹는 걸 좋아했던 거 같기도 하고…….’
치즈가 안 든 음식도 불티나게 팔렸으니.
아무튼 올리버(치즈 상인의 이름이다.)와의 협업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어쩌면 치즈 때문이 아니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춤을 추는 케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올리버의 등쌀에 못 이겨 케인은 아까부터 자동차 와이퍼처럼 두 손을 흔들고 있었다. 춤이라기보다는 인사처럼 보였으나 어쨌든 미남이 그러고 있으니 눈길을 끌긴 했다.
행인들은 잘생긴 바람 인형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왔다가 올리버에게 덥석덥석 붙잡혔다.
“아이고, 그렇게 보지만 말고 먹어 봐요. 이게 파전이라는 건데, 저쪽 남쪽 나라에서 먹는 거예요. 이 근방엔 이거 파는 데가 없어. 지금 아니면 못 먹는다니까?”
굉장한 사기였다. 새틴은 남쪽 나라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나라 사람들이 파전 비슷한 걸 먹는지 역시 모른다.
“치즈를 올리면 더 맛있어. 치즈는 소한테서 나잖아? 고기나 다름없지. 고기랑 채소를 같이 먹으면 얼마나 맛있어. 자자, 듬뿍 올려 줄게.”
순식간에 치즈가 고기가 됐다. 둘 다 단백질이긴 하다만 그렇다고 치즈가 고기라니. 완전히 궤변 아닌가.
근질근질한 입을 꾹 다물고 새틴은 부지런히 파전을 부쳤다. 올리버의 허풍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 이 미남도 어릴 때부터 파전을 많이 먹었대요. 그래서 이렇게 잘생긴 거지. 이야, 피부 좀 봐. 아주 갓 태어났네!”
케인의 눈동자가 마구 요동쳤다. 그러나 올리버의 말에 반박하진 않았다. 한 번도 상대해 본 적 없는 유형의 사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계획에 없던 조력자 덕분에 준비해 온 재료가 순식간에 동났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올리버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아니, 겨우 그만큼을 팔겠다고 나왔어?”
새틴은 겨우 삼십 분 남짓의 피크 타임 동안 진이 다 빠졌는데 올리버는 아닌 모양이다. 여전히 생생한 얼굴이다. 자기 장사도 하고 왔을 텐데 땀 한 방울 안 났다.
그 차이가 민망해서 새틴은 괜히 코를 문지르며 대꾸했다.
“이렇게 잘 팔릴 줄 몰랐죠…….”
큰돈을 벌 욕심은 없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 새틴도 못내 아쉬웠다. 더 많이 팔았다면 닭이 아니라 염소도 살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물론 염소를 키울 곳은 없으니 쓸데없는 욕심이다.
“다음엔 더 제대로 준비를 해 오라고. 알겠지?”
치즈값을 챙기며 올리버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새틴의 등을 두드렸다. 하마터면 장기가 튀어나올 뻔했다.
“자네는 춤 연습 좀 더 하고!”
올리버가 와하하 웃으며 케인의 등짝도 한 대 때렸다. 케인이 엉덩이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인 줄 몰라서 가능한 친교 행위였다.
올리버가 수레와 함께 자리를 뜬 후 새틴과 케인도 뒷정리를 했다. 케인은 가판을, 새틴은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맡아 치웠다.
“그래도 재밌었던 거 같아.”
새틴이 뒤집개를 닦으며 말하자 케인은 대꾸하지 않고 눈을 굴렸다. 순순히 재미있었다고 하기엔 뭔가가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말로 하기 싫었다면 진작 성을 냈을 테다.
‘귀여워라.’
새침데기처럼 구는 케인이 귀여워서 새틴은 픽 웃었다.
아무튼 장사를 잘 마친 덕에 새틴은 기분이 좋았다. 여태 제대로 보지 못한 다른 음식들이 궁금해졌다. 평소 팔지 않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근처에서 뭐 좀 먹고 들어가자.”
“배고파?”
케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바로 집으로 갈 줄 알았나 보다. 새틴은 배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파전을 부치는 동안은 기름 냄새에 질려서인지 배가 고픈 줄도 몰랐는데 일이 다 끝나고 나자 뒤늦게 허기가 몰려왔다. 늦은 시간이니 간단하게 무언가 먹으면 좋을 성싶었다.
두 사람은 야시장을 둘러보며 주전부리를 조금 사 먹었다. 아까 보지 못했던 꼬치구이가 있기에 그것도 먹었다.
슬슬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즈음 올리버를 발견했다. 또 다른 가판에서 춤을 추며 호객을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체력도 열정도 범상치 않았다.
‘치즈 요정인가.’
세상 모든 음식에 치즈를 넣겠다는 포부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저 열정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저거 먹을래? 오늘 도움도 많이 받았고 하니까.”
새틴이 올리버를 가리키며 묻자 케인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질색하는 케인에게 억지로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싫으면 말고.”
치즈 요정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구태여 새틴이 팔아 주지 않아도 금세 매진될 기미다.
두 사람이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야시장에 가져갔던 집기들을 씻어 제자리에 넣고 나니 딱 자정이 되었다.
새틴은 몹시 피곤해 곧바로 올라가 눕고 싶었지만 내내 불 앞에서 기름으로 조리를 했더니 영 찝찝했다. 땀도 좀 났고.
케인과 함께 부엌을 나서며 새틴은 별생각 없이 물었다.
“나 먼저 씻어도 되지?”
주택이라 늦은 시간에 샤워를 하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평소 케인은 새틴이 뭘 한다고 했을 때 하지 못하게 한 적이 없다. 집 안에서 하는 일이라면.
그런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어?”
전에 없던 일에 놀라 새틴은 잠깐 생각하는 법을 잊었다. 새틴이 멈칫한 사이 케인이 한 발 성큼 앞서가더니 앞을 가로막았다.
케인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내가 먼저 씻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아까 야시장에서 공기 부족한 바람 인형처럼 손을 흔들던 사람과는 분위기가 딴판이다. 뭔지는 몰라도 분명 꿍꿍이가 있었다.
새틴은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다 대답했다.
“그럼 뭐, 네가 먼저 씻는 거지. 나는 기다려도 되니까.”
“피곤하지 않아? 빨리 눕고 싶을 텐데.”
“그야 그렇지. 네가 양보를 해 주면 고맙겠.”
“나도 피곤한데.”
“그러니까 네가 먼저 빨리 씻.”
“쉬고 싶잖아.”
어쩌라는 걸까.
새틴이 인상을 썼지만 케인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웃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려는데 새틴의 주머니에서 마신이 소리쳤다.
―용사님, 친구분이 용사님께 파렴치한 짓을 하고 싶은가 봅니다! 그것도 욕실에서요! 아주 음탕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분의 열렬한 우정을 응원하고 있으니 못 본 체하겠, 아앗!
새틴은 황급히 성물을 집어 던졌다. 날아간 성물은 설거지통에 처박혔다. 풍덩!
∞ ∞ ∞
이 세계의 많은 부분이 그렇지만 욕실도 상당히 현대식에 가깝다. 편리하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 이유를 새틴은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첫 번째는 누나가 판타지 세계의 위생을 매우 걱정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원래 이 나라가 고대 로마처럼 목욕을 중시한다는 거다. 정답이 어느 쪽일지는 모른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하는 새틴으로서는 이 위생적이고 편리한 욕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케인은 또 다른 이유로 욕실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소리가 울려.”
소리가 울리는 게 왜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케인의 입꼬리가 둥그렇게 올라가 있었다. 새틴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모자란 숨을 들이쉬기 급급했다.
새틴의 숨이 차는 데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샤워를 함께 했을 뿐이다. 마신의 말대로 파렴치한 짓이 조금 더해지긴 했지만.
‘아니, 이 정도면 아무것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지.’
번식에 필수적인 행위는 전혀 하지 않았는걸.
‘근데 이걸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하면 너무 문란한 거 아니야?’
수도 영빈관에서 선물로 받은 비누는 거품이 아주 부드럽고 풍성하게 일었다. 그렇다 한들 거품은 거품이다. 거품을 사이에 두고 온몸의 피부가 맞닿았는데 이걸 아무것도 아니라 하기는 좀.
“숨 참지 마. 왜 또 숨을 참고 있어.”
케인이 미끄러운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물론 본인의 옆구리는 아니다.
새틴은 케인의 말 때문이 아니라 놀라서 숨을 터뜨렸다.
“아, 이상하게 만지지 말라니까……, 흐익!”
“어떻게 이상한데?”
“왜 알면서, 아니, 아니, 손 내려가지 마. 아, 자, 잠깐, 윽…….”
“여기가 이상해?”
“흐읍……!”
“그냥 허벅지잖아. 엉덩이도 아니고.”
“야, 너는, 아……!”
새틴은 더 이상 항의를 그만두었다.
누나와 살던 아파트 욕실에서는 종종 노랫소리가 들렸다. 같은 라인에 사는 누군가가 샤워하며 노래 부르는 습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단한 실력자여도 거슬렸을 텐데 그 사람은 심지어 음치였다.
그 사람을 반면교사 삼아 누나와 원오는 절대 욕실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욕실은 언제나 용도에 맞게 사용했다.
이곳에 와 이렇게 불결하게 욕실을 쓰게 될 줄 몰랐다. 위생이 아니라 도덕적 측면에서.
‘여기서 좀 시끄럽게 굴어도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없겠지.’
새틴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숨소리를 낮추려 애썼다. 참지 못해 튀어나오고 마는 신음들은 도통 제 목소리 같지 않았다. 너무나 민망하고 창피했다.
‘얘는 이런 게 정말 좋나.’
새틴은 입을 꾹 다물고 케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본래 키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케인의 어깨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갑작스레 진도를 뺄 생각이 아니었다. 애당초 진도를 뺀다는 생각도 안 해 봤다. 새틴은 그다지 성적인 욕구가 크지 않았고, 이런 상황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이런 공부를 과연 어디서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야, 거기는, 읏…….”
“좋은 거 같은데 왜?”
“으흐으르읍…….”
“……이상한 소리 내면서 참지 말고 편하게 소리 내. 듣기 좋으니까.”
“끄흡.”
“고집 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