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아니, 이 녀석이 왜 자꾸 일어나지? 눕혀 놓으면 일어나고, 눕혀 놓으면 일어나고. 무슨 힘이 이렇게 좋아?”
눈을 감고 들으면 다소 오해할 여지가 있지만 실은 그냥 머리카락에 관한 얘기일 뿐이다.
“그냥 잘라 버릴까요?”
정수리 위로 비죽 솟은 머리카락을 붙잡고 이발사가 물었다. 새틴은 그러라고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아뇨, 그냥 두셔도 돼요.”
잘 서는 게 죄도 아닌데 자르는 건 좀 너무하니까.
……머리카락 얘기다.
케인과 재회하기 전까지 새틴은 주기적으로 머리를 잘랐다. 그때 지내던 마을에는 이발소가 없었지만 머리를 제법 잘 자르는 사람이 있었다. 새틴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머리를 맡겼다.
케인과 리타, 에드워드와 함께 다니는 동안에는 머리를 자를 새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훌쩍 자라 버렸다. 조금만 더 두면 묶을 수 있을 정도다.
‘묶는 건 좀 쑥스러워.’
머리를 기르는 남자는 종종 봤다. 지금 새틴의 머리를 만지는 이발사도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있다. 새틴이 머리를 기른다고 이상하게 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새틴은 그러기가 쑥스러웠다. 긴 머리는 아주 잘생긴 사람이나 하는 머리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자리 잡은 편견을 깨기는 쉽지 않았다.
‘좀 어이없긴 하다.’
살면서 새틴은 남자와 연애를 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맹세코 단 한 번도 없다. 머리를 기르는 상상은 그래도 한두 번은 해 봤을 거다.
그런데 정작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된 지금 여전히 머리는 기르지 못한다니. 열린 인간이 되기엔 아직 멀었다.
새틴이 자신의 편협한 사고를 반성하는 사이 머리 손질이 끝났다. 이발사는 다듬은 머리를 한 번 흐트러뜨리더니 부드러운 수건으로 목덜미를 탁탁 털어 냈다.
“이제 어디 가요?”
이발사의 질문을 듣고 새틴은 눈을 끔벅였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집에서 예비 방화범이 기다리고 있는데.
“애인 없어요? 어디 간다고 하면 멋들어지게 만져 주려고 했지.”
“아.”
새틴은 뒤늦게야 질문의 뜻을 알아들었다. 작게 헛기침하며 요청했다.
“해 주세요. 그, 멋있게.”
∞ ∞ ∞
새틴은 이발소에 다녀오겠다며 나갈 때 케인에게 두 가지 일을 맡겼다. 하나는 지난 밤 결국 더러워진 이불을 빨아 두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허수아비가 자꾸 옆으로 기울어지니 반듯하게 때려 박아 두라는 것이었다.
‘허수아비가 기울어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얼굴이 비뚤어져 있던데.’
케인은 생각한 바를 말하지 않고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새틴을 배웅한 후 케인은 이불 빨래부터 해치웠다. 어제도 한 작업이라 요령이 붙었는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허수아비는 뽑아서 다시 박는 대신 머리를 돌렸다. 얼추 반듯해 보였다.
‘더 손댈 필요는 없겠어.’
―용사님이 안 계시니 하는 말입니다만 용사님의 그림 솜씨는 상당히 허접한 것 같습니다. 눈코입이 모두 제자리에 없군요.
새틴이 두고 나간 성물은 케인이 가지고 있었다.
전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던 놈이 요즘 들어 말이 많았다. 흙에 파묻거나 물에 빠뜨리면 몹시도 서러운 체를 하는데 그런 것치고 한 번도 우울해하질 않았다.
‘마신이 우울해하면 그편이 이상한 일이긴 하지.’
여느 때보다 케인의 마음이 너그러웠다. 마신의 방해도 거슬리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줄곧 발이 둥둥 떠 있는 느낌이다.
―왜 멀뚱멀뚱 계십니까? 간밤에 정력을 다 소진하여 움직일 힘이 없으십니까? 그런 것치곤 얼굴이 반질반질하십니다. 친구분께선 정말로 음탕한, 앗, 뭘 하려고 그러십니까?
하여간 가만히 놔두면 정도를 모르고 기어오른다.
케인은 성물을 허수아비의 셔츠(새틴이 이웃의 안 입는 옷을 얻어 왔다.) 앞주머니에 넣었다.
―혼자 들어가시려는 건 아니지요? 저를 여기 두고?
처량한 물음을 무시하고 케인은 텃밭을 둘러봤다. 쪽파를 수확하고 텅 빈 고랑에 그새 잡초가 몇 가닥 자라 있었다. 그것들을 뽑아 치우고 처마 아래 시금치 종자를 살폈다.
성질 급한 종자 몇 개는 밤사이 벌써 눈이 나와 있었다. 하루 정도 더 두었다가 심으면 될 성싶었다.
―제 주인님께서 제가 이렇게 홀대 받고 있는 줄 알면 어떻게 될까요? 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으십니까?
허수아비의 옷 안에서 마신이 위협과 하소연이 반반 섞인 소리를 나불댔다. 저래서야 밤에 마주치면 귀신 들린 허수아비로 오해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낮이고, 귀신 따위 무섭지도 않아서 케인은 계속 무시했다.
‘울타리는 괜찮고, 배수로도 괜찮고.’
전에 새틴이 말하길 자긴 집안일에는 꽤 일가견이 있지만 건물을 손보고 고치는 데는 서투르다고 했다. 전에 지내던 오두막에 비해 이 집은 너무 커서 신경이 쓰인다며 웃었다.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새틴이 서투르다면 케인이 하면 된다. 행여 케인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도 일할 사람을 잡아 오면 되니 새틴은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좋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전엔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사람들이 말하는 평범한 삶이 무언지도 잘 몰랐다.
지금껏 케인이 거쳐 온 곳은 저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꼬질꼬질한 아이들로 붐비는 고아원, 정신 나간 부부의 먼지 하나 없는 집, 싸우고 뺏는 일이 일상이던 거리, 미친 늙은이의 흑마법 실험장. 공통점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
고아원에 있을 땐 그곳이 평범한 줄 알았다. 입양된 집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그곳이 평범했다. 떠돌아다닐 땐 그 생활이 평범했고, 숲속 외딴 학교에서도 적응해서 지냈다.
케인에게 평범함이란 그런 거였다. 내일은 그곳에 없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오늘 당장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늘 그래 왔기에 그런 상황이 두렵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마 새틴은 늦기 전에 돌아올 것이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이 집을 떠나야겠단 생각도 하지 않겠지. 겨울이 오기 전 시금치를 수확하고 나면 또 무얼 심을지 고민하고, 어쩌면 아주 소박한 일탈을 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새틴의 옆에서 케인은 진정으로 평범한 것이 무언지 배우고 있다. 새틴이 그렇다고 말하지 않아도, 여러 단어로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살인마의 아들이, 사실은 자신도 평범한 게 무언지 모를 사람이 케인에게 이런 삶을 가르친다.
케인은 새틴을 만나기 전까지 두려움을 알지 못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잃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언제나 케인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분노와 저항감, 그리고 알량한 자존심뿐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중 무엇도 중요치 않다.
이제 케인은 두려움을 안다. 두려움을 알기에 현재의 소중함 또한 안다. 내일도 새틴이 곁에 있을 거라 기대하고, 오늘 하루가 지나가는 것이 아쉽다.
‘언제 오는 거지.’
케인이 문간을 기웃거리자 마신이 또 방정을 떨었다.
―아, 바람이 붑니다. 제가 날아가기라도 하면 용사님께서 정말로 슬퍼하실 텐데 절 계속 여기에 두실 겁니까! 친구분께서 아주 큰 원망을 들으실 겁니다!
어설픈 협박은 흘려듣고 빨래 널어놓은 자리를 살폈다. 바람에 빨래가 날아가 텃밭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아까 널어놓은 이불은 아직 축축해 마르려면 멀었지만 어제 널어놓은 것들은 이제 제법 말라 바람을 따라 가볍게 나부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들떴다. 여름 끝물이건만 마치 봄바람이라도 맞은 듯했다.
케인이 때아닌 낭만을 즐기는데 마신이 한층 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용사님께서 돌아오고 계십니다! 친구분께 줄 선물을 들고 있네요. 간밤의 봉사에 아주 만족하신 모양입니다!
“진짜 말을 좀…….”
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나 행동과 달리 입꼬리는 절로 올라갔다.
케인이 막 이불자락 사이를 빠져나왔을 때 새틴이 울타리 너머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발견했다.
다녀왔다는 인사 대신 새틴이 작은 꽃다발을 흔들었다.
“내 선물이야?”
마신이 한 말을 떠올리며 묻자 새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글쎄, 선물이랄까…….”
새틴은 대답을 얼버무리며 웃었다. 머리를 말끔히 넘겨서인지 평소보다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곧 새틴은 울타리를 모두 돌아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텃밭을 가로지르던 새틴이 케인을 보며 다시금 웃었다.
“너 거기 서 있으니까 무슨 광고 같다.”
“광고?”
“보기 좋다는 얘기야.”
의미는 잘 모르겠으나 좋은 말이라니 케인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슬쩍 눈을 굴리다 한마디 했다.
“너도 아주, 보기 좋아.”
빤히 바라보기가 멋쩍어 케인은 괜히 발치를 보았다. 아까는 미처 보지 못한 조그만 잡초 싹이 보였으나 뽑아야겠단 생각은 안 들었다. 가슴만 쿵쿵 뛰었다.
‘머리 좀 넘긴 거 가지고 왜 이래.’
저런 모습을 처음 본 것도 아니다. 수도에서 몇 번인가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며 몸단장을 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이런 사이가 아니었을 뿐이다.
케인은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
“줄 거면 빨리 줘.”
“어, 어.”
새틴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화려한 꽃은 아니었다. 새틴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차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마신이 끼어들었다.
―이게 바로 인간들이 한다는 언약식입니까? 제가 지금 증인이 되어야 합니까? 증인으로 삼는다면 저만 한 존재가 없겠지요.
성물이 지척에 있는 줄 모르던 새틴이 움찔 놀라더니 이마를 짚었다.
“저 사기꾼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튼 들어가자. 얼굴 타겠어.”
“응.”
케인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새틴의 뒤를 따랐다. 새틴이 흘끔 돌아보더니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그거 먹는 꽃이야.”
“꽃을 왜 먹어?”
“샐러드에 넣을 수 있대.”
“굳이?”
“아니, 꽃을 사러 갔는데 먹을 수 있는 꽃도 있다는 거야. 기왕이면 먹는 게 좋을 거 같더라고.”
기껏 근사한 머리를 하고는 선물로 채소를 사 온 꼴이다. 어이가 없어서 케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새틴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근데 지금 생각하니까 좀, 안 멋있네.”
“아니야. 멋있어.”
“그래?”
현관문 앞이었다. 늘 무심히 여닫던 하늘색 문이 오늘따라 특별하게 보였다. 케인은 새틴이 문을 열기 전에 붙잡아 세웠다.
“꽃을 받았으니까 나도 뭘 주고 싶은데.”
새틴은 케인이 뭘 주려는지 바로 눈치챈 기색이다.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후 새틴이 속삭였다.
“이런 건 똑같네.”
“뭐가?”
“꽃하고 키스 말이야. 그러니까, 연인들의 보편적 정서는 어디나 똑같다고.”
“다 똑같고 다 특별하겠지.”
케인이 문을 열자 새틴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가는 케인의 뒤에서 마신이 소리쳤다.
―제가 증인입니다! 이제 두 분은 친구 아니에요! 그런데 저 안 데려가십니까? 저 증인인데요! 저기요! 야, 이 불신자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