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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34화 (134/139)

134화

문을 열자 예상대로 케인이 서 있었다.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침에 봤을 때보다 행색도 꼬질꼬질하고.

새틴이 이유를 묻기 전에 케인이 불쑥 다가왔다. 곧바로 입술이 맞붙었다.

‘아이고.’

키스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하는데 키스가 뭐 그리 대수겠는가.

다만 오늘은 난처하다. 오랜만에 만난 로저스에게 아직 케인과 이런 사이가 되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내심 꼭 할 필요는 없는 얘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 엎질러진 물이다. 새틴은 이 상황을 수습할 방법을 찾으며 케인의 어깨를 떠밀었다.

“이건 나중에 하고.”

“왜?”

케인은 제가 왜 떠밀렸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 평소 없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입술을 슬슬 문질러 닦으며 새틴은 뒤쪽을 고갯짓했다. 케인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새틴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케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뭐야, 이 새끼는.”

부끄러워할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새틴은 얼른 케인의 팔뚝을 때렸다.

“이 새끼라니. 로저스잖아.”

“로저스?”

로저스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케인은 의심하는 눈초리로 로저스를 살폈다. 실은 알아봤는데 그냥 기분이 나빠서 저리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새틴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이러니까 로저스가 성격 얘기를 하지…….’

로저스가 벌게진 얼굴로 어색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케인.”

열여덟 소년에게는 다소 보기 민망한 광경이었던지 로저스는 시선을 한군데 고정하지 못하고 연신 눈을 굴렸다. 덩달아 새틴까지 민망해졌다.

새틴은 크게 헛기침하고 케인과 로저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식사부터 하자.”

말해 놓고 나니 케인의 행색이 신경 쓰였다.

“아니, 그 전에 너는 좀 씻어야겠다.”

케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로저스를 흘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때라면 알아서 씻고 왔을 텐데 오늘은 뭐가 그리 거슬리는지 표정이 뚱하다.

케인이 몸을 씻는 동안 새틴은 식사 준비를 마무리했다. 로저스는 묻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쉬이 말문을 열지 못하고 눈만 되록되록 굴렸다.

그러다 겨우 로저스가 입을 열었을 때, 케인이 돌아왔다.

“왜 이렇게 빨리 씻었어? 제대로 씻었어?”

새틴이 미심쩍게 쳐다보자 케인은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응. 당장 물고 빨아도 될 만큼 깨끗이.”

“조용히 해.”

황급히 케인의 말을 막았다. 그사이 로저스는 다시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어휴.”

새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제 음식을 내오기만 하면 되는데 케인이 굳이 따라오려 해 내쫓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둘이 얘기나 해.”

“왜?”

“왜는 왜야. 반갑지도 않아?”

“왜?”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미취학 아동처럼 왜만 반복하던 케인은 입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 로저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새틴이 접시를 꺼내는 동안 케인은 로저스에게 말을 붙였다.

“오랜만이야.”

진심이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인사였다. 시키니 하는 것뿐이라는 속마음이 훤했다.

케인에 비해 착한 로저스는 타박도 하지 않고 인사를 받았다.

“그러게.”

새틴은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 귀를 기울였지만 식당은 고요했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둘이 생각보다 더 안 친했나.’

그래도 셋이서 얼굴 맞대고 탈출 계획을 세운 적이 있는데 저렇게까지 어색할 수가 있나.

새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서둘러 음식을 옮겨 담았다. 저 썰렁한 분위기를 계속 저리 뒀다간 집에 고드름이 맺힐지도 모른다.

새틴이 부엌에서 나오자 그제야 케인과 로저스도 입을 뗐다.

“그러게 같이 하자니깐.”

“내가 뭐 도울 일은.”

동시에 튀어나온 말은 새틴으로 하여금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게 했다. 새틴은 둘 중 한 사람에게 대답하는 대신 부엌으로 돌아가며 혼잣말했다.

“아차, 후추를 안 뿌렸네.”

거짓말이다. 뿌렸다. 잠깐 숨을 돌릴 셈으로 한 말이다.

다시 식당으로 나가자 이번엔 둘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눈으로만 새틴을 좇았다.

‘맞선 보니…….’

새틴은 숙련된 서비스업 종사자처럼 웃으며 음식을 옮기고 자리에 앉았다.

“그럼, 먹을까?”

식사를 시작하고부터 분위기는 한층 풀렸다. 어쩌면 음식이 아니라 새틴 덕일 수도 있다. 새틴은 셋뿐인 모임에서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아이를 가르친다고? 선생님이 된 거야?”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일은 아니고, 그냥 간단한 공부 정도 봐주는 거야.”

“새틴은 친절하니까 아주 잘할 거 같아. 전에도 아이들을 잘 도와줬지.”

“하하, 기억이 너무 미화됐네.”

로저스의 진심 어린 칭찬에 새틴이 쑥스럽게 웃고 있자니 케인이 퉁명스레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왜 오늘은 그렇게 멀리까지 갔어?”

“응?”

“원래 다니던 서점이 닫았어?”

“아니, 소개를 받았어. 그쪽에 책이 더 많대서…….”

“누구한테?”

“콜 아버지. 누군지 알지?”

일이 없는 날이면 케인은 새틴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장 볼 때도 예외는 아니다. 새틴이 가게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케인은 의심 많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빤히 바라봤다.

맥스의 얼굴을 떠올렸는지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틴이 왜 멀리까지 다녀왔는지 이제 납득한 모양이다.

케인과 달리 로저스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다.

“……서점 갔다 왔다는 얘기를 언제 했어?”

로저스의 의구심 가득한 얼굴을 보며 새틴은 아차 했다. 새틴이 아직 말하지 않은 일을 케인이 이미 알고 있다니. 그것도 당연하게. 누구라도 이상하다 생각할 만했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새틴이 잠시 고민하는데 케인이 빙긋 웃었다. 산뜻한 미소인데 보고 있자니 가벼운 오한이 들었다.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하려고.’

케인은 새틴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지켜보고 있어야지.”

가끔 케인은 새틴이 아무 짝에 쓸모없는 소리를 한다며 핀잔했다. 새틴이 보기엔 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슨 금송아지도 아닌데.’

새틴은 열없이 웃었으나 로저스는 웃지 않았다. 포크를 쥔 채 잠깐 얼이 빠졌다가 되물었다.

“……감시를 한단 얘기야?”

왜인지 아주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새틴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감시라는 단어는 대체로 좋지 않은 의미로 쓰였다.

로저스가 오해하지 않도록 새틴은 차분히 설명했다.

“케인이 걱정이 많아서 그래. 내가 안 좋은 일을 당할 뻔한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계속 옆에서 지켜볼 순 없으니까.”

“계속 지켜보고 있는 거잖아?”

로저스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다. 새틴은 머쓱하게 웃었다.

“직접 지켜보진 않고 다른 사람들 통해서 보는 거야.”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이제 새틴도 헷갈렸다.

‘어, 그런가?’

케인은 새틴을 걱정한다. 다소 과할 정도로 걱정한다. 휴대폰이 있다면 수시로 전화를 해 별일 없는지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 세계엔 휴대폰이 없다. 적어도 새틴이 살아 있는 동안은 발명되지 않을 거다.

무슨 수로 새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지는 몰라도 새틴은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좋은 의도니까.

‘아닌가?’

새틴이 눈을 껌벅이니 로저스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케인을 쳐다보는 눈초리가 아까와 달라졌다. 어려워하는 기색은 사라지고 어쩐지.

‘징그러워하는 거 같아…….’

그 외에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외로 케인은 로저스의 반응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지그시 웃는 낯으로 물었다.

“왜?”

“왜냐니…….”

“넌 새틴이 사라져도 상관없겠지만 난 아니야.”

“아니, 나도 새틴을 다시 만나서 잘됐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건 그거랑 다른 문제잖아. 새틴은 사람이고, 그렇게 네 소유물처럼 굴면 안 돼.”

로저스는 아마도 새틴의 자유가 침해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상당히 현대인 같은 사고방식이었다.

새틴이 끼어들어 뭐라 말할 필요는 없었다. 케인은 로저스의 말을 듣고도 전혀 상심하거나 반성하지 않았다. 표정만 봐선 오히려 로저스를 이상하게 보는 눈치다.

“그러다 다시 사라지면?”

“새틴이 사라질 이유가 없잖아.”

“아는지 모르겠지만 새틴은 또 기억 상실에 걸렸었어. 납치를 당한 적도 있고, 엉뚱한 생각을 하다 도망을 친 적도 있어.”

“그건…….”

로저스는 약간 당황했다. 정말이냐고 묻듯 새틴을 쳐다봤다. 새틴은 멋쩍게 웃으며 눈을 피했다.

입을 뻐끔거리던 로저스는 결국 케인의 주장에 일부 동의했다.

“걱정하는 이유는 알겠어. 하지만 그런 일이 또 일어날까? 아무리 운이 나쁜 사람이라도 매일 그런 위기가 찾아올 리 없잖아.”

“알아. 아마 별일 없겠지.”

뜻밖에도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불안은 이성으로 통제되는 게 아니야.”

“노력해야지.”

“왜?”

“아니, 그러니까…….”

로저스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케인은 로저스가 아닌 새틴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난 내가 어디에 있든 새틴이 뭘 하는지 알고 싶어. 아무 이유 없이 새틴을 생각해. 안전한 곳에 있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내가 그곳에 있으면 좋겠어.”

“아이고, 더워라. 물을 가져와야지…….”

새틴은 괜히 손을 파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스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보다 지금이 더 부끄러웠다. 케인의 변명인지 자기 합리화인지 모를 말이 새틴에게는 꼭 열렬한 사랑 고백처럼 들렸다.

그런데 로저스에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건 불안한 게 아니라 그냥 새틴이 보고 싶은 거 아니야?”

부엌으로 향하던 새틴은 걸음을 멈추고 로저스를 돌아보았다. 로저스는 새틴과 케인을 번갈아 보더니 뺨을 긁적였다.

“아니, 그럴 수도 있잖아. 너희가 그런 사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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