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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35화 (135/139)

135화

작은 동창회는 아홉 시쯤 끝났다. 로저스는 내일도 하루 종일 서점을 지켜야 하니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어차피 이제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 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해도 된다.

“그럼 갔다 올게.”

새틴이 로저스를 큰길까지 배웅하는 동안 케인은 부엌 정리를 하기로 했다. 케인은 자기가 대신 배웅하겠다고 했지만 그럴 바에야 혼자 가겠다며 로저스가 질색했다. 케인은 부루퉁한 얼굴로 주어진 일을 받아들였다.

문이 닫히자마자 로저스가 픽 웃었다.

“왜?”

새틴이 고개를 갸웃하자 로저스가 코를 문질렀다. 어딘지 숫기 없어 보이는 그 행동이 예전의 로저스를 떠올리게 했다.

“저런 모습들이 너무 의외로워서. 난 사실 케인이 제대로 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랬어?”

“많이 화가 나 있었으니까 말이야. 내 말은, 세상에 대해서.”

“아, 좀 그런 면이 있었지.”

새틴도 작게 웃었다. 케인은 마왕을 소환한 전적이 있다. 그 시절의 케인은 세상 사람들이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얘길 들을 땐 기겁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습다.

‘죽이긴 누굴 죽인단 말이지. 마지막까지 아무도 죽이지 않았는데.’

케인이 원수처럼 여기던 흑마법사도 결국 새틴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만.

“그래서 나는 케인이 엉뚱한 짓을 할까 봐 걱정이었어. 치안청에 협박 편지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 케인이 한 짓이 아닐까 의심했다니까.”

“그으랬어?”

정말로 케인이 한 짓이라는 사실은 결단코 비밀로 해야지.

다행히 로저스는 새틴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채지 못했다. 어둑해서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덕일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 아니다. 좋아 보이는 거 같아.”

로저스의 말은 괜스레 새틴을 뿌듯하게 했다.

처음엔 퉁명스레 굴던 케인은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점차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별다른 트집도 잡지 않고 온순하게 대화에 참여했다. 케인으로서는 굉장한 친절이었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그 이유를 새틴은 알 듯 모를 듯 했다.

불안과 기대는 비슷하다.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것은 성공하고 싶기 때문이고, 성공하길 바라면서도 확신하지 않는 건 실패할 가능성을 잊어버리지 못해서다.

마음을 어떤 말로 표현하는지는 중요하다. 로저스는 케인의 강박적인 불안을 서투른 연애 기술로 바꿔치기했다.

행여 밤사이 새틴이 사라졌을까 봐 문 앞을 서성이던 케인은 이제 자다가도 새틴이 보고 싶어 기웃거리는 케인이 되었다. 훨씬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사실 너희가 그런 사이가 된 게 놀랍긴 한데.”

로저스는 멋쩍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까 네가 살아 있던 거만큼 놀랍지는 않더라고.”

“그야 그렇지.”

“정말 다행이야.”

“나야말로 네가 잘 지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헤어졌을 때 로저스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너무 어린 나이였다. 사실 지금도 어리다. 열여덟이면 아직 키도 다 안 자란 나이 아닌가.

어린 나이에 홀로서기가 쉬웠을 리 없다. 여태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나쁜 일을 당하지 않고, 이렇게 건강히 일을 하며 지내는 모습을 보니 한시름 놓였다.

어쩌면 다른 아이들 중엔 좋지 못한 상황에 처한 아이도 있을지 모르지만, 로저스라도 잘 지내고 있다 하니 새틴으로서는 그저 안도했다.

큰길에 다다를 무렵 로저스가 말했다.

“살다 보면 이렇게 좋은 일도 있는 법이구나.”

겨우 열여덟 먹은 소년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틴은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북문으로 가는 역마차는 오래 지나지 않아 왔다. 운이 좋았다. 마차에 오르기 전 로저스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새틴은 따라서 손을 흔들다 불쑥 말했다.

“다음에 봐.”

멀어지는 마차를 잠깐 보다가 돌아섰다.

친구와 만났다 헤어지는 기분은 다소 묘했다.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하루의 일과가 끝났다는 후련함도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기다리고 있을 케인에게 다녀왔다고 인사하고, 보고 싶었다고 한마디 하면.

상상만으로도 민망해서 새틴은 공연히 얼굴을 문질렀다. 그래도 입가의 미소는 가시지 않았다.

대문을 지나고 텃밭을 지나 현관에 이르렀다. 파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케인이 곧바로 식당에서 나왔다.

“나 왔어. 정리는 다 했어?”

“응.”

아직 물기가 남은 손을 옷자락에 대강 문질러 닦은 케인은 덥석 새틴을 안아 올렸다. 새틴이 생각한 말을 할 새를 주지 않았다.

새틴은 당황해서 외쳤다.

“뭐야, 갑자기?”

“보고 싶었어.”

“잠깐 나갔다 왔는데 무슨…….”

하려던 말을 케인이 해 버리니 괜히 타박하는 소리가 나왔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색을 짐작할 수 있었다. 뺨과 이마가 화끈거렸다.

케인은 새틴을 안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 새틴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케인의 목을 끌어안다가 문득 깨달았다.

“너 키 컸어?”

“모르겠는데.”

“좀 큰 거 같아.”

스무 살이면 아직 성장기가 끝나기 전이다. 남자는 스물서너 살까지도 큰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안 크는 사람은 뭘 해도 안 크지만.

“좀 귀엽다.”

새틴이 웃으며 말하니 케인이 멈칫했다.

“……뭐가?”

“네가 아직 크는 중이라는 게 귀여워.”

왜인지 케인의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다. 새틴은 케인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살짝 물렸다.

그사이 2층에 도착했다. 케인은 제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계속 귀여워해.”

“어, 어?”

“계속 귀여워하라고.”

귀엽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나?

새틴의 추측은 틀렸다. 새틴과 눈이 마주친 케인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이 올라갔다. 어딘지 오싹한 데가 있는 미소였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케인이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할 수 있으면 말이야.”

새틴은 아마도 내일 늦잠을 자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이제 안 귀여워…….’

방문이 닫혔다.

∞ ∞ ∞

로저스와 만난 후로 새틴의 일상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가끔 시간을 내서 일부러 로저스가 일하는 서점에 갔다. 책을 살 때도 있고 보기만 하다 나올 때도 있었다. 다른 손님이 없으면 함께 뭔가 먹기도 했다.

―용사님께 새 친구가 생긴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로저스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좀 한적한 데에 이르자 마신이 종알거렸다. 로저스와 함께 있을 땐 아무 말이 없더니 이제 와 축하한다는 소리를 해 봤자 웃길 뿐이다.

“또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뇨. 저는 용사님의 사회생활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음침하게 집에만 있으면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음침하게, 그런 적 없어. 매일 나간다고.”

―네, 집에서 500보 정도밖에 나가지 않지만요.

“여긴 멀잖아. 마차도 탔어.”

―그래서 축하드렸지 않습니까. 용사님이 드디어 알을 깨고 나와 진정한 어른이 되어 가는 듯해 아주 뿌듯합니다.

“참 나, 네가 뭘 했다고…….”

사람이 나타나 새틴은 목소리를 낮췄다. 마신도 잽싸게 (없는) 입을 다물었다가 사람이 지나간 후 다시 열었다.

―듣자 하니 새 친구분은 전부터 알던 사이 같습니다.

“맞아.”

―용사님의 배우자분과도 알던 사이 같던데요.

“맞아.”

잠깐 동안 마신은 말이 없었다. 원래도 제가 내킬 때만 지껄여 대기에 새틴은 신경 쓰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곧 케인이 퇴근해 돌아올 시간이다.

요즘 케인은 관청 공무원들을 따라다녔다. 공무원이 된 것은 아니고 관청에서 모험가 연합에 또 의뢰를 했다. 도시 개발을 위해 낙후된 지역을 조사 중인데 기사들을 데리고 다니면 눈에 띈다나.

‘좀 그렇긴 하지.’

예전에 리타를 호위하겠다며 따라왔던 기사들은 변장이 무색할 정도로 티가 났다. 꼿꼿한 자세며 딱딱한 말투를 내내 감추지 못했다.

케인이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친절하진 않을 거다. 아무도 기사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기사가 됐으면 어땠을까.’

다크에이지의 케인은 기사였는데 새틴이 아는 케인은 전혀 기사와 어울리지 않는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 이편이 더 나을 거야.’

이야기가 어땠는지는 이제 중요치 않다. 새틴은 기사가 아닌, 사교적이지 못한, 퉁명스러운 체하면서도 결국은 다정해지는 케인이 좋았다.

‘좀 이상해 보이는 부분들이 있어도, 다 나를 위한 거니까.’

스스로 한 생각이 낯부끄러워서 새틴은 괜스레 헛기침했다.

―왜 헛기침을 하십니까? 용사님의 배우자분이 알면 펄쩍 뛸 생각을 하셨습니까?

“갑자기 뭔 소리야.”

이제껏 지켜본 바에 따르면 마신은 생각을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새틴은 방금 한 생각을 행여 들켰을까 봐 시치미를 뗐다.

―배우자분이 읽던 책에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책?”

―왕의 백스물여덟 번째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왕은 아내를 벌하기 위해 두 사람을 부릅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아내와 친구는 음탕한 행위를 반복하고 왕은 그 행위를 지켜보며…….

“미, 미친, 무슨 소리야.”

새틴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지만 얼굴의 열기는 바로 사그라지지 않았다.

“케인이 아직도 그 책을 보고 있었어? 아니, 너도 본 거야?”

―펼쳐진 페이지를 보는 일 정도야 제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상태에서 저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으나 아주 먼 곳까지 볼 수 있으며, 만약 현신한다면.

“됐으니까 조용히 해.”

그놈의 책, 불태워 버리든지 해야지.

―다행입니다. 저는 용사님이 보다 자극적이고 불건전한 교제에 흥미가 생기신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로저스는 겨우 열여덟 살인데, 열여덟 살짜리랑 그런 불순한 짓을.”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쳐서 새틴은 얼굴을 찌푸렸다. 마신은 그런 새틴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용사님의 배우자분은 스무 살입니다. 열여덟과 스물이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나이는 까마득하여 인간들은 모두 갓난아기로 보일 뿐입니다. 용사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다른지 알려 주지.”

새틴은 주머니에서 성물을 꺼냈다. 단단히 움켜쥐고서 팔을 붕붕 돌렸다. 하나, 둘, 셋……, 열여덟.

“이게 열여덟이고.”

―으윽…….

다시 팔을 붕붕 돌렸다. 하나, 둘, 셋……, 스물.

“이게 스물이야. 알겠어?”

―녜에…….

마신은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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