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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소설의 분위기가 위기-137화 (137/139)

137화

새틴의 의견을 들은 로저스는 다소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왜?”

“다들 뭘 하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클로버랜드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위험한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어.”

로저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거리로 돌아간 아이들 중 로저스와 재크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할 거다.

운이 나쁜 아이는 어쩌면 죽었을 가능성도 있고, 죽지 않았더라도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범죄와 연루되었다든지.

새틴이 시무룩한 기색을 보이니 로저스는 안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다가왔다.

“갑자기 왜 그 애들을 찾고 싶어진 거야?”

“그냥. 혹시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 도움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어쨌든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좋잖아. 아닌가?”

기쁜 일은 나누면 두 배, 힘든 일은 나누면 반이라고 한다. 진짠지는 모른다. 감정의 양을 측정할 방법은 없으니까. 이 말에서 중요한 부분은 나눈다는 부분이다.

로저스와 재회한 후 새틴은 일상이 훨씬 즐거워졌다.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로 좋은 일이었다.

“나쁠 건 없지.”

고개를 끄덕인 로저스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 애들도 새 친구를 사귀지 않았을까?”

“그러려나?”

“이제 다들 어리지도 않고…….”

새틴이 생각하기에 열예닐곱 살은 충분히 어린 나이지만 로저스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다시 만나도 그때처럼 지내기 어려울 거야. 네가 아이들한테 잘해 줬던 건 알지만, 아마 그럴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그때는 부족함이 없었잖아. 다들 자기 침대가 있고, 규칙적으로 식사도 하고,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고. 그런데 이제는 아니니까.”

이 역시 일리 있는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등쳐 먹은 사기꾼 얘기가 얼마나 흔한가. 돈만 뜯기면 차라리 다행이다. 실수로라도 범죄에 끌려 들어가면 난처한 꼴이 되리라.

“네가 괜찮게 사는 걸 알고 나쁜 마음을 먹을지도 몰라.”

“사기를 친다든지?”

“죽일 수도 있어.”

극단적인 말이지만 새틴은 설마 하고 흘려듣지 못했다. 새틴이 침묵하니 로저스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충고했다.

“새틴, 이제 그때랑은 달라. 넌 네가 생각보다 물정을 모른다는 걸 깨달아야 돼.”

∞ ∞ ∞

케인은 귀가하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왜?”

“표정이 안 좋은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양 새틴은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아무 일 없던 척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케인은 이미 눈치챘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뭔데.”

“진짜 아무것도 아닌데…….”

다시 물어도 둘러대던 세틴은 식사 중에야 결국 실토했다.

“낮에 로저스한테 갔었거든.”

“응.”

케인은 알고 있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새틴도 아마 케인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하는 얘기일 터다.

“다른 애들을 찾아보고 싶다고 했더니 안 그러는 게 좋겠다더라고.”

“다른 애들?”

“학교에 있던 애들 말이야. 헤더나 카렌이나 로빈. 로빈은 죽었지, 참.”

새틴이 읊는 아이들의 이름을 들으며 케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로저스를 만났을 때 내심 걱정했던 일이다. 혹시 다른 아이들도 찾아서 도와주고 싶다고 하진 않을지.

4년 전 학교에 있던 아이들은 대부분 열두 살이나 열세 살이었다. 지금은 열예닐곱 살이 됐으리라. 새틴에겐 아직도 아이들이다.

“로저스는 내가 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하더라고. 그 애들을 만났다가 괜히 나쁜 일을 당할까 봐.”

“그럴 만하지.”

“네 생각도 그래?”

“솔직히 말하면 그래. 로저스는 정말로 잘 풀린 편이야. 강도를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으니까.”

“그 정도구나…….”

새틴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식사를 하던 손까지 멈췄다. 일부러 케인은 식기에 스푼을 부딪혀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제야 새틴은 식사를 재개했다.

울적해하는 모습을 보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별수 없이 케인은 긍정적인 말도 한마디 했다.

“그래도 배운 게 있으니 그럭저럭 지낼지도 모르지.”

“그렇지?”

“그럼 네가 도와줄 필요도 없고.”

“아, 그것도 그러네.”

“그냥 잘 지내고 있으려니 해. 굳이 사서 걱정할 필요 없잖아.”

로저스처럼 우연히 마주치는 것까지 케인이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서서 다른 아이들을 찾아보겠다고 하면 케인은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새틴이 낯선 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흠이 아니다. 일면식 없는 노인이나 짧은 인연이 있을 뿐인 아이들에게 다정한 그를 이해한다. 케인은 새틴의 그런 성격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래서 생각이 많아진다. 케인은 새틴이 다른 누구에게도 관심 갖지 않길 바라지만, 그런 새틴이 정말 케인이 알던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케인은 식사 후 뒷정리까지 마쳤을 때 결정을 내렸다. 응접실에서 책을 펴는 새틴에게 불쑥 제안했다.

“내가 할게.”

“뭐를?”

이미 지나간 화제라 새틴은 케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케인은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네가 하고 싶은 거, 근데 난 네가 안 했으면 좋겠는 거.”

“어?”

“내가 잘하잖아, 그런 거.”

새틴은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이다 의미를 파악했다. 멋쩍게 웃으며 손사래 쳤다.

“너한테 그렇게 해 달라고 한 말이 아니었어.”

“알아.”

로저스의 말처럼 새틴은 의외로 물정을 모른다.

환경은 사람을 바꾼다. 그렇기에 약한 사람이라고 계속 약하지 않고, 선한 사람이라고 계속 선하지도 않다.

“걔네들은 네 생각만큼 순진한 애들이 아니야.”

“그야 나도 알지만…….”

“너보단 내가 차라리 도움이 될 거야.”

새틴은 별다른 이견을 표하지 않았다. 케인의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미안해서인지 쭈뼛거렸다.

케인은 픽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냥 내가 해 주고 싶은 거야.”

새틴의 손에서 책을 빼냈다. 뿌리채소 재배에 관한 책을 옆으로 치워 놓고 몸을 기울이자 새틴이 눈을 감았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배우자란 좋은 노동력이죠! 용사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배우자분을 보니 제 마음이 다 뿌듯합니다!

장화에 넣어 둔 성물이 산통을 깼다.

“오늘따라 조용하다 했지.”

새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났다. 소파에 덩그러니 남겨진 케인은 뿌드득 이를 갈았다.

‘우선 저 새끼부터 어디 가둬야겠어.’

∞ ∞ ∞

점심 무렵 일이 끝났다. 영감의 하수인이 와서 보고하기로 새틴은 집에 있다고 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다 말다 하니 외출할 마음이 들지 않았는지.

케인은 곧장 집으로 가려다 마음을 바꿨다.

모험가 연합이 있는 큰길을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작은 가게들이 이어졌다.

‘대장간이 이쪽 어디 있었는데.’

모험가를 위한 칼이나 갑옷이 아니라 생활용품을 취급하는 곳이 몇 군데 모여 있다. 물건을 사 본 적은 없으나 지나가며 봤다.

케인은 머릿속으로 작은 상자를 그렸다.

무쇠로 만들어진 상자는 겨우 주먹만 한 크기다. 귀중품을 보관하기에 적당한 크기지만 케인은 거기에 보석 따위를 넣을 생각이 없다.

‘그 안에서 떠들어 봤자 바깥엔 안 들리겠지.’

새틴이 케인의 계획을 알았다면 틈새를 막을 고무 패킹도 꼭 주문하라고 조언했을 테다. 혹은 감금은 너무 가혹하다고 핀잔했거나.

일단 상자를 만들어서 효용이 있다면 새틴도 별말 하지 않을 거다. 케인은 새틴을 설득할 자신이 있다.

‘저쪽인가.’

골목 안쪽에서 꽝꽝 무언가를 때려 대는 소리가 났다. 맞게 찾아온 모양이다.

곧 크고 작은 대장간들이 줄지어 이어졌다. 그러나 케인은 기뻐할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선선한 날씨이건만 웃통을 벗은 사내들이 골목을 바삐 오갔다. 넓지도 않은 길에 수레가 몇 대나 서 있었다. 수레에 쌓인 물건들을 보며 케인은 상황을 파악했다.

‘다리 공사 때문인가.’

지난 며칠 공무원을 따라다니며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외곽의 낡은 다리 몇 군데에 공사를 하고 있단 얘기였다. 남의 동네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거기 필요한 자재들을 여기서 조달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언제 왔어도 이 꼴이었겠지. 그리 생각하니 느긋해졌다.

케인은 그나마 한가해 보이는 곳을 찾아 몇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다급한 외침을 들었다.

“도둑, 도둑이야!”

소리는 멀리 퍼지지 못했다. 워낙 주변이 시끄러웠다. 케인도 마침 가까이 있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터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누군가 뛰어나왔다. 남잔지 여잔지는 몰라도 체구가 크지 않았다. 우락부락한 일꾼들 사이를 비집고 달아나려다 금세 고꾸라졌다.

“으앗!”

물이 고인 웅덩이를 밟고 넘어진 터라 주변에 물이 튀었다. 케인은 재빨리 몸을 물렸다. 그러나 바짓단에 튀는 흙탕물은 막지 못했다.

작게 혀를 차고 있으니 다른 이가 뛰어왔다.

“이 도둑놈!”

덩치 큰 사내가 도둑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팔뚝 힘이 얼마나 좋은지 무 뽑듯 대번에 도둑을 일으켜 세웠다. 도둑은 뒷덜미를 붙잡힌 채로 변명했다.

“아, 아니에요!”

“아니면 왜 도망을 쳐!”

“정말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이제 보니 도둑의 목소리가 여리다. 깡마른데다 머리가 짧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는데 여자였다. 케인은 몇 걸음 떨어진 데서 도둑과 사내의 실랑이를 지켜봤다.

“떨어져 있어서, 그래서 주인이 없는 건 줄 알았어요. 훔친 게 아니라, 정말.”

변명하는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었다. 문득 케인은 그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름이 뭐였지?’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새틴과 제법 잘 지내던 아이다.

케인은 어젯밤 새틴과 한 약속을 떠올렸다.

‘이렇게 금방 찾게 될 줄이야.’

소설도 아닌데 공교로운 우연이다.

일단 케인은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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