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무슨 일입니까?”
케인이 묻자 사내가 쳐다보았다. 사납게 찌푸린 얼굴로 사정을 설명했다.
“이 도둑놈이 내 돈을 훔쳤소. 손님하고 얘기를 하는 사이에 내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똑 떼서 달아나려고 했다니까?”
“아니에요! 주머니는 땅에 있었어요! 주웠을 뿐이에요!”
“거짓말하지 마라! 허리띠에 매 둔 주머니가 왜 바닥에 있어!”
“정말이에요!”
“혼쭐이 나야 바른 말을 하지!”
사내가 도둑의 따귀를 때릴 듯 손을 치켜들었다. 도둑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렸다. 케인은 사내가 도둑을 때리기 전에 제안했다.
“나에게 맡기면 치안청으로 데려가죠. 어떻습니까?”
“뭐, 그쪽이 뭐라도 되오?”
사내의 눈이 케인을 위아래로 훑었다. 멀끔한 차림새이긴 하나 새파랗게 젊다. 미덥지 않을 만했다.
케인은 당황한 기색 없이 태연히 말했다.
“마법사입니다. 관청에서 오는 길이죠.”
말만으로는 믿지 않을 걸 알기에 작게 불꽃을 만들었다.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졌다.
마법사는 그 수가 적고 대부분 높은 지위에 있다. 당연히 돈도 많이 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법사를 선망했다. 지위나 재산은 인격과 하등 관계없는데도 으레 존경심을 품었다.
물론 떳떳지 않은 일로 돈을 벌어 본 케인은 마법사들의 실상을 잘 알지만 보통 사람들은 모른다. 마법사가 사기를 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케인은 겁에 질린 도둑에게 고갯짓했다.
“훔친 돈을 돌려줘라.”
“훔친 게 아닌데…….”
“훔쳤든 주웠든 네 것이 아니잖아.”
어차피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긴 어렵다. 도둑은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여태 도둑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던 사내가 주머니를 홱 빼앗았다.
“악…….”
사내가 떠밀자 도둑이 다시 앞으로 고꾸라졌다. 웅덩이로 넘어진 통에 흙탕물을 뒤집어썼으나 항의는 하지 못했다.
“두 번 다시 나타날 생각 마라!”
도둑에게 큰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은 사내가 케인을 향해서는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바쁘실 텐데 일 보시죠.”
케인은 짐짓 친절히 말하고 도둑을 일으켰다.
“따라와라.”
도둑은 대꾸하지 않았다. 흙탕물로 꼬질꼬질해진 얼굴에 불안과 불만이 그득했다. 그러나 달아날 궁리는 하지 않고 케인을 따라왔다. 마법사를 피해 도망가기는 어려울 거라 판단한 모양이다.
‘완전히 멍청이는 아니군.’
사람들은 도둑을 연행하는 케인을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 오래 지체했다가 괜한 의심을 살지 모르니 케인은 걸음을 서둘렀다.
큰길로 나왔을 때에야 케인은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이름이 뭐지?”
“……카렌.”
“거짓말.”
카렌이라는 이름은 케인도 기억했다. 늘 주눅 들어 있던 여자애였다. 케인은 내심 그 애를 두더지 같다고 생각했다.
도둑은 카렌이 아니라 카렌과 함께 다니던 다른 여자애다. 망아지처럼 활발하고 목소리가 컸다.
“이름이 뭐냐니까.”
도둑은 대답하지 않았다. 케인이 돌아보자 흠칫 놀란다. 오늘 처음 만난 관청 마법사가 어떻게 거짓말을 간파했는지 몰라 당황했을까.
케인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치안청으로 가는 거 아니야.”
“그, 그럼 뭔데요…….”
아직 도둑은 케인을 알아보지 못한 눈치다. 케인은 도둑을 가만히 쳐다봤다. 긴장해서 쭈뼛대던 도둑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었다. 이제야 케인의 얼굴을 제대로 봤는지.
“내가 누군지 알겠어?”
“……케인?”
“그래.”
“진짜 케인이야?”
“이름이 뭐냐고.”
“나, 나 헤더. 헤더야!”
∞ ∞ ∞
헤더가 너무 지저분한 꼴이었기에 일단 가까운 여관에 들렀다. 박박 씻고 나온 헤더는 그나마 마주 앉아 대화를 할 만한 꼴이 되었다.
비쩍 마른 몸뚱이를 보아하니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듯해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예전에 리타가 하던 식으로 주문했더니 헤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관청에서 돈을 많이 받아?”
“내가 관청에서 돈을 왜 받아.”
“관청 마법사라며.”
“내가?”
“아니, 아까, 관청에서 오는…….”
헤더는 케인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입을 벌렸다. 케인은 관청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지 관청 소속이라고 한 적은 없다.
“관청 마법사를 사칭한 거야?”
“사칭은 아니지. 자기들이 오해했을 뿐이잖아.”
“사기꾼…….”
“도둑질하다 붙잡힌 주제에.”
헤더는 붙잡혔을 때처럼 억울하다 주장하지 않았다. 멋쩍게 웃을 뿐이다.
“훔치려거든 제대로 훔쳤어야지.”
“정신없어 보이길래 모를 줄 알았지. 뒤통수에 눈이 달렸나. 대체 어떻게 알았지?”
반성의 기미는 전혀 없다. 훔치지 못한 아쉬움이 넘쳤다. 케인은 구태여 그 점을 들어 헤더를 타박하지 않았다. 헤더를 계도하려고 데려온 게 아니다.
얼마 후 음식이 나왔다. 점심시간이 지난 터라 손님이 별로 없었다. 차례로 나오는 음식을 보며 헤더는 입을 헤 벌렸다.
“먹어.”
헤더는 잘 먹겠다는 인사도 없이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쑤셔 넣었다. 케인은 적당히 배를 채울 만큼만 먹었다. 일을 하며 간단히 점심을 먹은 터라 배가 고프지 않았다.
조그만 몸뚱이 어디에 그렇게 들어갈 자리가 있었는지 헤더는 시킨 음식을 거의 다 먹어 치웠다. 배가 불러 더 먹지 못하는 게 원통하단 눈빛으로 남은 음식을 흘끔거렸다.
“이제 그럼 얘기 좀 할까?”
“어?”
“요즘 어떻게 지내?”
안부를 묻는 게 아님을 헤더는 바로 알아들었다.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빨면서 어물쩍 대답했다.
“그냥, 그렇게 살지. 나야 뭐 특출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둑질하고 소매치기하면서?”
헤더는 콧잔등을 찌푸린 채 눈을 피했다.
“다른 애들은? 카렌하고 친하지 않았나?”
“……카렌은 클로버랜드를 떠났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어.”
“왜 같이 안 갔어?”
“카렌이 이상한 애들하고 어울려 다녔어. 위험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분명 나쁜 짓을 하는 애들일 텐데…….”
“도둑질이나 소매치기보다?”
헤더는 그늘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헤더는 최소한의 선은 지키면서 사는 모양이다.
“일을 해서 돈을 벌 생각은 없어?”
비난하는 줄 알았는지 헤더가 볼멘소리를 했다.
“나,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은 게 아니야. 너도 알잖아. 우리 같은, 나 같은 애들을 누가 써 줘.”
틀린 말은 아니다. 로저스는 운이 좋았다. 아마 좀도둑질로 연명하는 아이가 헤더만은 아닐 것이다.
케인은 딱히 헤더를 비난할 생각은 아니었다. 헤더가 어떻게 살든 사실 별 관심도 없다. 그저 누군가의 의지를 대행하고 있을 뿐이다.
“일이 생기면 할 거야?”
“무슨 일?”
“무슨 일이든. 적어도 오늘 같은 불상사는 없겠지.”
케인이 어깨를 으쓱이자 헤더는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일어나.”
케인이 일어나자 헤더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봤다.
“일자리 소개해 줄 테니까.”
“지, 진짜?”
헤더는 화색이 되었다가 금세 눈을 가늘게 떴다. 케인이 행여 사기를 치려는 게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다. 케인도 이해했다. 저 정도 의심도 없이 어떻게 여태 살아남았겠는가.
게다가 학교에서 지내던 시절 헤더는 케인과 그리 친하지도 않았다. 케인의 호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할 법도 했다.
케인은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헤더를 설득했다.
“내가 관청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법사는 맞아. 아까 봤잖아.”
“으응, 그랬지.”
“너 하나 사기 쳐서 돈 버느니 다른 걸로 버는 게 빠르지 않겠어?”
“……그도 그러네.”
“아무튼 싫으면 관둬. 다른 사람 찾아볼 테니까.”
“다른 사람?”
헤더가 엉거주춤 일어나다 고개를 갸웃했다. 케인은 픽 웃었다.
“꼭 너여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 ∞ ∞
케인이 젖은 머리로 귀가했다. 아까부터 비가 내리는 중인데 그 비를 다 맞고 온 모양이다. 어깨도 흠뻑 젖었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우산을 사지 그랬어.”
아무 데서나 우산을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는 말이었다. 요즘은 저녁이면 제법 쌀랑했다. 이런 날씨에 비를 맞았으니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 됐다.
새틴이 수건을 가져다 내밀자 케인은 수건을 받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뭐야.”
“닦아 줘.”
“애도 아니고.”
타박하면서도 새틴은 픽 웃었다.
젖은 금발은 문질러 닦으니 새끼 고양이 털처럼 비죽비죽 곤두섰다. 문짝만큼 커다란 남자에게 쓸 만한 비유는 아니지만 정말 그랬다.
적당히 물기만 닦아 낸 후 케인의 등을 툭 떠밀었다.
“씻고 와. 저녁 먹자.”
“응.”
케인은 축축한 윗옷을 훌훌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새틴은 미끈한 등을 안 본 체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케인이 씻는 동안 새틴은 식사 준비를 마쳤다. 젖은 머리를 닦으며 식당으로 들어온 케인이 접시에 담긴 오믈렛을 보고 물었다.
“이게 뭐야?”
케인이 설마 오믈렛이 뭔지 몰라서 물었을 리는 없다. 알던 것보다 너무 커다래서 하는 말이다. 새틴은 대답 않고 히죽 웃었다.
커다란 오믈렛 안에서 볶음밥을 발견한 케인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특이한 걸 좋아한다니까.”
케첩 대신 토마토소스를 올린 오므라이스를 먹으며 일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케인이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참, 오늘 헤더를 만났어.”
“헤더?”
새틴은 깜짝 놀라 눈을 치떴다. 케인은 대수롭잖은 이야기 하는 양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영감 기억하지? 우리 집 살 때 만난 영감.”
“어, 기억나.”
“그 영감 밑에서 일하고 있던데. 얼마 안 됐대.”
“정말? 신기한 우연이 다 있네.”
집을 구하러 복덕방에 갔을 때가 언젠지 새틴은 날짜를 헤아렸다. 벌써 몇 달 되었다. 마신이 나타나기 전이니.
그사이 헤더가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 모양이다. 그쪽을 지나갈 일이 있었으면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다들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나 보네.”
왠지 안심이 돼서 웃으니 케인도 따라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