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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에서 발 끝까지 마치 맞춤 옷이라도 되듯 세련된 명품 옷으로 감싸고, 약간 젖은 머리는 화사한 금발이며 눈웃음을 치는 눈동자는 몹시도 새파랬다. 자신이 오메가라는 걸 전혀 숨기지 않고 알파와 함께 걷는 남자, 노아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다 한 번씩은 받았다. 알파에게서는 끈적한 눈빛을, 오메가에게서는 질시 어린 눈초리를.
지하철에 도착 해 노아는 알렉스의 뺨에 살짝 키스하며 작별 인사했다. 알렉스는 아쉬움이 그득 담긴 손길로 시원하게 드러난 흰 목덜미며 어깨를 지분거리면서 노아를 놓아주질 않았다.
“나 늦어, 진짜로 가봐야 해.”
“언제 또 만날 수 있어?”
“클럽에 올 때 되면 꼭 연락할게.”
보통은 오메가와 알파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은 알파였지만 노아에게 있어서는 달랐다. 알렉스는 노아가 거느리는 (정말로 거느린다는 표현이 맞았다) 많은 파트너 중 한 명일 뿐이었고, 돈도 많고 외모도 예쁘장한 오메가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달라 붙는 알파들은 하늘의 별처럼 수도 없이 많았다. 알렉스가 노아가 가장 자주 찾는 파트너인 건 그저 그가 노아의 취향을 아주 잘 맞춰주기 때문이었다.
“꼭 연락해야 해.”
마지막까지 아쉬움 그득 남긴 알렉스에게서 커다란 백 팩을 받아 든 뒤 손을 흔들어주고 노아는 지하철 화장실로 들어섰다. 반짝 반짝하게 바닥을 닦고 있는 안드로이드 청소 로봇을 지나 노아는 화장실 칸 중 하나 안으로 들어선 뒤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먼저 노아는 매우 세련되며 최신 유행을 달리는 스타일의 옷은 벗어서 잘 개어 가방 안에 넣고 신발을 캔버스 화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가방에서 그다지 도수는 높지 않은 안경을 끼고 머리를 단정하게 싹싹 빗어 넘긴 뒤 아까 입었던 검은 스키니 진과는 완전 다른 청바지와 폭신해 보이는 스웨터를 입었다.
변신을 마친 뒤 백 팩을 싹 잠그고 다시 화장실을 나와 지하철 캐비닛으로 향한 노아는 백팩을 넣는 대신 안에서 책이 들어 조금 묵직한 가방을 둘러 메고 다시 지하철 역을 나왔다. 아까와는 달리 오메가 특유의 달콤한 냄새를 싹 감춘 사랑스러우며 순진한, 오로지 공부만 했을 것만 같은 도련님의 모습이었다. 지하철 역에서 나와 얼마간 걸어가자 조금 떨어진 곳에 익숙한 차가 보였다. 노아가 미소 지으며 다가가자 얼른 차에서 운전 기사가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테일러.”
“별 말씀을요.”
나이가 좀 지긋한 운전 기사가 자신의 막내 도련님에게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며 저택을 향해 차를 움직였다. 프로스트 가의 저택까지는 고작 길어봤자 20분 정도의 거리일 뿐이지만 테일러는 20분이 아닌 5분 거리라도 기꺼이 노아를 위해 운전할 용의가 있었다. 참, 테일러. 이번에 엠마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면서요? 축하해요. 아이고, 뭘 그런 걸 다 기억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이런저런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차가 저택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화려하니 잘 꾸며진 정원 가운데를 차로 지나, 넓은 앞 뜰에서 내린 노아는 테일러에게 태워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고용인에게 백 팩을 넘겨주었다. 고마워, 리사. 이번에도 노아는 상냥하게 인사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신의 방에 들려 한번 더 깨끗하게 샤워하고 향이 강한 샴푸를 사용 해 혹시 모를 알파 냄새를 완전히 지운 뒤 노아는 좀 더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식사를 하기 위해 중앙 홀로 내려왔다.
“아버지, 오랜만에 뵈어요.”
두 형들과 뭔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노아의 아버지, 테너 프로스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끼는 막내 아들을 보자 얼굴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노아도 활짝 웃으며 다가와 테너에게 다정하게 포옹했다. 테너가 알파인 두 아들과는 거의 하지 않는 방식의 인사였다.
“노아, 어서 오렴. 생일 축하 한단다.”
“생일 선물은 잘 받아 봤니?”
“도련님, 생일 축하 드려요.”
노아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형들과 형수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형수님에게 임신 축하 한다고 전해줘, 윌. 참 선물 고마워. 그런데 나한테 아직 요트는 이르지 않을까… 무슨 소리니, 너도 요트 하나쯤은 가질 때 되었지. 차 고마워, 베니. 운전은 꼭 테일러에게 맡기렴. 리비, 바이올린 감사해요. 구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별 말씀을요, 도련님.
첫째 형인 윌리엄과 둘째 형인 벤자민, 그리고 둘째 형의 아내인 올리비아에게 생일 선물 인사까지 일일이 마친 뒤에서야 노아는 자신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온통 검은 머리카락과 청회색 눈동자뿐인 프로스트 가문의 남자들 중 노아만이 유일하게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어릴 적,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어머니를 닮아 화사한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심지어 둘째 형인 벤자민과 결혼한 올리비아는 브루넷이라 가족 중 노아의 외모가 유독 튀어 보였다. 노아는 어머니처럼 오메가인데다가 외모까지 쏙 빼다 닮았으니 알파인 아버지와 형들이 막내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로는 몹시 충분하고도 차고 넘쳤다.
자신이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와 두 형이 심각하게 나누던 사업 이야기를 그만 두었지만 노아는 그 행동에 딱히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테너는 알파인 두 형과 오메가인 자신의 교육을 완전히 차별해 왔다. 알파인 두 형에게만 집중적으로 경영 수업을 가르친 것부터가 그랬다. 물론 노아도 어느 정도 관련 용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의 수업을 듣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교양 수준으로, 노아는 대학마저도 비즈니스와는 거의 상관없는 음대를 나왔다. (올리비아는 노아가 다니던 음대의 조교수로, 노아를 데리러 왔던 둘째 벤자민이 우연히 보고는 한 눈에 반해 결혼한 케이스다.)
보통 상류층에서 베타면 모를까 오메가인 자식에게는 사업을 잘 물려주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테너는 그 경우가 유독 심했다. 노아야 자신의 아버지를 몹시 사랑했으므로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테너는 굉장히…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얼마나 그 수준이 심각한고 하니, 노아가 1년 전에 대학교 졸업을 했는데도 그저 결혼하기 전까지는 집 안에만 머무르게 하는 정도였다.
만약 노아가 테너의 지극히 알파스러운 (여기서 알파스럽다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쓰였다)교육 지침에 반발해 자신도 형들처럼 경영 수업을 받겠느니 자신도 아버지 사업을 운영하겠다니 했다면 테너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스러운 막내 아들에게 작은 사업체 하나라도 물려 주었을 터다. 그러나 노아는 지금처럼 아버지에게서 일주일에 한번씩 다 쓰지도 못할 금액의 용돈을 받아 빈둥거리면서 노는 한량 백수 생활이 몹시 마음에 들었기에 고분고분히 테너의 말을 따랐다.
저녁 식사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테너가 노아의 25번째 생일을 축하 하면서 덕담을 나누었고 (참고로 테너가 노아에게 선물한 것은 아주 전망이 좋은 여름 별장 한 채였다.) 중간에 올리비아가 자신의 두 번째 임신 사실까지 알리면서 즐거운 분위기가 아주 고조 되었을 무렵, 테너가 목을 가다듬어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음을 알렸다.
“노아. 너도 이제 벌써 25살이 되었구나. 물론 내가 보기에 넌 아직도 어린 아이 같다만…”
테너가 몹시 관대하고도 너그러운 미소를 보냈고 노아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수줍게 웃었다. 테너는 노아가 알파와 키스는커녕 손도 못 잡아 본 아이처럼 대하곤 했다… 아마 테너가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대학교 동창 모임’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아주 크게 기함을 하겠지. 그리고 잠시간 노아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테너가 느닷없이 거대한 폭탄을 날렸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 주 월요일에 네 약혼자인 이안 밀러와 약속을 잡았단다. 약속이 있다면 취소해 놓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