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밤이 늦었기에 알렉스와 벤자민은 오늘은 노아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안 밀러와 결혼 하는 일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며 말하고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당연하지만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인 다른 날에도 두 사람이 노아를 설득하는 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단 결혼 날짜가 잡히자 노아는 전에 없이 바빠졌다. 사흘에 한 번은 이안 밀러를 만나 서로속내를 감추고 하하 호호 하면서 식사나 데이트 비스무리한 걸 해야 하는 건 기본이었다. 뿐만 아니라 프로스트 가의 친척들이나 지인들을 직접 만나 결혼 소식도 전해야 했는데 워낙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비단 사람들을 만나는 일뿐 만이 아니었다. 속전속결로 정해진 결혼날짜가 3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던 지라 평소 노아가 다니던 미용 샵의 온 미용사와 코디네이터와 테라피스트 등은 이틀에 한 번씩 달라 붙어 노아를 갈고 닦는 일에 전념했다. 미용 샵의 오너가 직접 직원들을 거느리고 와 온 몸에 향기가 나는 영양제와 크림을 듬뿍 퍼 붓다시피 했는데, 덕분에 최근 들어서 노아의 몸에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은은한 향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그나마 결혼식을 조용하게 치르고 싶다는 이안과 노아의 의견이 일치해 식 규모가 작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마 이안은 안 그래도 억지로 하는 결혼식 거창하게 치르기 싫었을 것이고 노아야 결혼식이 거창해지면 이보다 더 바쁘고 귀찮아지니 내린 결정이었다. 테너가 좀… 불만을 가지긴 했지만 당사자들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결혼식에 큰 의견 반영을 할 수 있을만한 다른 유일한 존재인 이안 밀러의 부모는 10년도 훨씬 전에 사망한 상태였으니까.
이렇듯 좀 바쁘기는 했어도 노아에게 있어서 모든 게 만족스러웠지만 딱 하나, 불만스러운 점이 존재 했다. 바로 결혼 준비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누리던 소소한(?) 즐거움이 날아가 버렸다는 건데...
“가브리엘 선생님이 안 오신다고요?”
“그렇습니다. 결혼 준비 스케줄 때문에 평소 일정들은 어쩔 수 없이 취소해야 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고용인이 새로운 스케줄을 알려 주었는데 평소 듣던 모든 개인 교습들과 취미 생활이 취소된 탓에 노아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안 그래도 자신의 인생 상 유례 없이 바빠져서 조금씩 스트레스(와 욕구불만이) 쌓여 가던 찰나인데 그걸 풀어줄 가브리엘이 오지 않는다니… 약간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혹시 결혼식을 올리고 난 뒤 도련님께서 거처를 옮기신 다음에도 계속 프랑스어 교습을 들으실 생각이시라면 미리 연락해 두겠습니다.”
“음… 아니에요, 제가 따로 선생님에게 연락할게요.”
“예, 도련님.”
결혼하고 나서도 가브리엘이 찾아와 개인 교습을 해준다는 이야기는 조금 솔깃하긴 했지만 일단 결혼하고 난 뒤에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모르니 보류하기로 했다. 노아는 조금도 자신의 행복할(?) 결혼생활을 망칠 건덕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만약 생각만큼 이안이 자신을 잘 괴롭혀주지 않으면 그 때 연락해도 늦지 않겠지.
“그나저나… 내가 이걸 어떻게 구했는데 쓸 일이 없어지다니…”
방으로 돌아온 노아가 서랍 안에서 진압봉을 꺼내 들며 몹시 아쉬운 얼굴을 했다. 가브리엘의 숙제를 하기 위해 진압봉을 구하려고 경비들이 사용하는 물품을 두는 창고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쉬웠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창고 안에 있는 진압봉은 노아가 원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3단으로 되어 안테나처럼 뽑혀 나오는 종류의 것만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노아는 결혼 준비로 바쁜 와중에서도 밤에 짬을 내 인터넷으로 고르고 골라 겨우 하나 주문해 받을 수 있었다. 혹시 들킬지도 모를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저택으로는 잘 택배를 시키지 않기 때문에 노아는 일부러 정문에 나가 기사에게 직접 받아오기까지 해야 했다.
조사를 해보니 진압봉마다 종류와 강도와 세기가 달라서 어떤 건 잘못 맞으면 병원에 갈 정도로 크게 다칠 수 있다 길래 한참을 검색까지 했다. 아무리 찾아도 적당한 굵기와 길이와… 그리고 여러 대를 맞아도 괜찮도록 적절히 단단하면서도 일부러 안이 텅 빈 구조로 만들어진 게 없어서 주문제작까지 했는데! 이렇게 개인 교습이 취소 될 줄은 몰랐지. 그렇다고 진압봉을 혼수로 들고 가는 것도 이상하잖아. 누가 보면 자신이 이안을 때리고 싶어 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 반대를 원하는 거긴 하지만. 여하간 노아가 고심했다.
누구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던가. 자신의 눈에는 영락 없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길고 검은 딜도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진압봉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노아가 생각했다. 지금도 이렇게 바쁜데 결혼식 전 주인 다음주가 되면 더 바빠질 거야. 시간도 못 내겠지. 그러니까 몰래 빠져서 놀려거든 지금 놀아야겠다.
어차피 클럽에서 사귄 지인들에게도 앞으로 못 나온다고 말을 전해야 한다. 노아가 적당히 빠져도 될 법한 일정을 골라내느라 애를 썼다. 결국 만만한 건 피부 테라피 정도였다. 안 그래도 요즘 노아의 외모는 반짝거리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니 이번 주는 빠져도 별로 상관이 없을 듯 했다. 게다가 운전 기사인 테일러는 항상 노아의 편을 들어주니 저택을 빠져나가기도 쉬울 터였다.
오늘 딱 세 시간만 나갔다 오는 거야. 결심한 노아가 즉시 자신의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 자신을 찾아 다니느라 수고하지 말라고 메모도 또박또박 써서 방 문 앞에 붙여 놓고 난 뒤 노아가 테일러를 찾아갔다. 테일러는 조금 졸랐을 뿐인데도 허허 웃으며 흔쾌히 부탁을 들어 주었다.
“원래 결혼 전에는 친구들이 보고 싶은 법이지요.”
“고마워요, 테일러…”
노아가 눈을 반짝거렸다. 마음씨 좋은 테일러는 기꺼이 시내까지 노아를 데려다 주었다. 1분 1초가 아쉬웠던 노아는 테일러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며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신이 나서 차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는 진압봉과 옷만 들어 있어 가볍기 짝이 없는 크로스 백을 달랑거리며 지하철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에서 나름 변신(?)을 마치고 난 뒤에 향하는 곳은 당연히 클럽이었다.
“알렉스!”
“어, 노아. 어쩐 일이야, 오늘 다 만나 보자고 하고.”
노아의 연락을 받자마자 클럽에 나온 알렉스가 가볍게 포옹해 인사하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클럽에는 몇몇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고, 어디선가는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뭔가 질퍽거리는 소리를 듣자 하니 누군가 대범하게도 클럽 어디선가 관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클럽까지 한 달음에 뛰어 오느라 노아가 숨을 헐떡거리고 있자 뭐가 그렇게 급하기에 뛰어왔냐고 핀잔을 주면서 알렉스가 바에서 물 한 잔을 얻어와 노아에게 내밀었다. 꼴깍 꼴깍 물을 몇 모금 마신 뒤에 노아가 잠시 고민했다. 이걸 어떻게 전해줘야 하나… 알렉스는 노아가 그 노아 프로스트인 걸 몰랐다. 아마 신문이나 뉴스에서나 몇 번 프로스트라는 이름을 들어보긴 했겠지. 노아가 잠시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저기, 알렉스. 나… 앞으로 클럽에 못 오게 될 것 같아.”
예상대로 알렉스는 노아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뭐? 어째서?? 혹시 가족들에게 들키기라도 한 거야?”
알렉스는 노아의 가족이 굉장히 보수적이라 오메가가 이런 클럽에 드나드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거의 사실에 근접한 추측이긴 하다. 정확히 말해서는 가족들이라기 보다는 테너가 그런 것이지만.
“아니야, 들킨 건 아닌데… 나 다음 달 초에 결혼하게 되거든.”
노아가 마신 물잔을 치우던 알렉스가 하마터면 유리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노아는 약간 미안한 마음으로 알렉스의 목울 대가 꿀꺽이는 걸 지켜 보았다.
전부터 알렉스가 자신에게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몇 년이나 알렉스를 알아 왔는데 왜 눈치를 채지 못하겠는가. 다만 노아가 모른 척 계속 알렉스와 같이 지낸 건 단지 알렉스가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향을 잘 맞춰 줘서라기 보다는 그에게 최대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서였다.
알렉스는 가브리엘로 자신의 취향을 깨달은 노아가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클럽에 와 기웃거리고 있을 때 처음으로 노아를 상대해준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노아와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이란 이야기다. 그게 인연이 되어 벌써 5년 가까이 알고 지내 왔다.
사실 노아는 자신과 결혼할 사람을 고를 수 있다면 알렉스와 결혼하고 싶었다. 자신을 좋아해 주면서도 충실하게 괴롭혀 주는 사람이 어디 흔하던가. 하지만 노아는 그냥 노아가 아닌 그 노아 프로스트였다. 알렉스는 노아에게 있어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사실… 클럽이나 쏘다니는 양아치에 가까웠다… 테너는 알렉스 같은 인물이 노아의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결, 결혼한다고?”
“음… 그렇게 되었어. 어쩌면 여기 오는 게 마지막일지도 몰라.”
노아가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이혼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긴 하지만 이혼할 때까지 알렉스에게 자신을 기다리느니 하는 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살면서 하도 많은 사람의 구애와 고백을 받아본 경험 때문에 노아는 이런 때에는 냉정하게 잘라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알렉스는 노아의 말에 시무룩하니 기가 죽었다.
“그렇구나… 그럼 작별 인사하러 온 거야?”
“응, 작별 인사 겸, 결혼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놀아 볼까 하고… 혹시 갑자기 불러서 바쁘거나 내키지 않다거나 하면....”
“아니야! 괜찮아. 난 좋아.”
알렉스가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 알렉스와는 딱 이 정도가 좋아. 이렇게 기분 좋게 헤어지는 게 낫지. 그렇게 생각하며 노아가 룸을 예약할까 묻는 알렉스의 팔을 잡아 끌면서 빙긋이 웃었다. 나, 원하는 설정이 있는데… 오랜만에 지하 어때? 진압봉을 일단 샀으니, 알차게 써줘야지.
***
노아가 자주 가는 클럽과 샵은 각각 그다지 먼 곳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두 곳은 똑같은 건물 안에 자리하고 있다. 소문으로는 마피아와 관련이 있다느니 10명도 넘는 첩을 거느리고 있다느니 하며 소문만 무성한 정체 불명의 사람이 소유주인 이 호텔은 고급스러운 외관과는 다르게 안에 들어가 조금만 둘러보면 노골적으로 성인들을 위해 만들어짐 장소임을 풀풀 풍겨대는 곳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호텔이지만 호텔과는 달리 입구에는 가드가 서서 엄중하게 드나드는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호텔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뉘어졌다. 1년에 1억 가까이 되는 비싼 회원비를 낼 수 있을 만큼 부자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대게 1억 가까이 되는 회원비를 낼 수 있는 부자가) 확실히 신원 보증을 해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법한 사람이거나.
이 호텔은 지하 3층부터 지상 15층까지 운영되고 있었는데 지하 1층에는 클럽이 자리했다. 바로 노아가 알렉스와 자주 만나는 곳 말이다. 그 위로는 마사지 샵 등이 있고 5층에 노아가 그토록 좋아하는 성인용품을 판매하는 샵 [Tear]가 위치했다.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콘돔 마저 몹시 비쌌지만 그만큼 튼튼하고 안전해 비싼 값을 했다.
샵의 위층으로는 죄다 개인적으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룸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 호텔에 오래 들락거린 사람은 위층 말고도 지하 2층과 3층에 룸이 있다는 것을 안다.
현실적인 플레이에 몰입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지하에는 특별한 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특별한 만큼 대여하는 비용이 비쌌지만 노아에게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이안과 결혼하고 나서 다시 이 클럽에 오게 되는 게 언제일지 모르니 (다른 말로 하자면 알렉스와 하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오늘만큼은 특별하게 하고 싶었다. 노아가 문득 생각했다. 앗, 혹시 이런 게 바로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총각 파티란 걸까…?
여하간 현재 노아가 있는 곳은 지하 2층에 위치한 룸 중 하나로, 알렉스가 플레이를 준비 하기 위해 잠시 방을 나가 있는 동안 노아는 뒤에 수갑이 채워진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이전에도 노아가 한번 사용한 적 있는 이 특별 룸의 설정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어두운 조명이 깔린 복도를 지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닥이고 천장이 온통 회색인 룸이 나온다. 그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감옥으로, 마치 경찰서 구치소 마냥 철창으로 이루어진 감옥 여러 개 외에도 족쇄나, 수갑, 채찍 등이 마련 되어 있었다.
노아는 이왕이면 진압봉도 마련한 김에 경찰에 체포된 범죄자의 역할을 꼭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룸은 경찰과 범죄자 플레이에 딱 적합하지 않은가. 이런 건 이 호텔 아니면 할 수 없는 플레이다. 게다가 결혼을 하고 나선 여기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알 수도 없었고.
“어디 보자… 노아 폭스?”
마침내 플레이 준비를 마친 알렉스가 룸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