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오늘 점심은 어떠셨습니까?”
“음?”
회사 일을 마치고 저택으로 귀가한 이안은 자신의 옷 시중을 들던 하이든의 말을 듣고서야 오늘 낮의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안이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꽤 괜찮더군.”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오늘 점심 일을 아무것도 모를 터인 하이든이 흐뭇하게 웃었다. 하이든은 테너가 강제로 결혼시키려고 한 일 때문에 단순히 이안이 노아를 굉장히 싫어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뿐, 그가 노아를 밤마다 찾아가 괴롭히거나 오늘 회사에서 불러내어 몹시 수치스럽게 만드는 등의 일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나이도 제법 되는 사람에게 딱히 알려서 뭐 좋을 일이 있겠는가? 게다가 아무리 이안이라도 자신을 키우다시피 한 하이든에게 자신이 밤마다 노아를 이러저러하고 있다고 말하기엔 아주 조금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이안은 하이든이 건넨 편한 옷으로 갈아 입으면서 아주 조금 이 결혼이 만족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노아 프로스트는 꽤 괴롭히는 재미가 있었으며, 제법 박는 맛도 있었다. 힘든 일은 하나도 모르고 자라난 도련님인 것치고 꽤 오래 버티고 있긴 하다만… 앞으로 갈수록 버티는 게 힘들어질 것이다. 노아 프로스트를 괴롭히는 게 즐겁다고 테너에 대한 원한을 잊어 버린 것은 아니니까. 조금 머리를 굴리다가 이안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하이든,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쉰 게 언제였지? 이젠 나도 결혼 했으니 휴가 좀 보내다 오지 그래.”
“예? 안될 말씀입니다, 노아님이 이제 막 밀러가에 들어오셨는데 제가 보필해야지요.”
예상대로 하이든은 완고했다. 하지만 이제 막 노아를 괴롭히는 데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이안은 지금처럼 도둑마냥 밤마다 몰래 찾아가 깔짝거리는 것 말고 이혼하기 전에 더 수위를 올려 제대로 한 판 벌여 보고 싶었다. 그리고 하이든이 저택에 머무르는 이상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안이 쯧쯧 혀를 찼다.
“집사란 사람이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휴가는 핑계고, 하이든이 없는 동안 나름 신혼을 좀 즐겨 보려고 그러지.”
혹시 몰라, 하이든이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는 노아 프로스트가 부부침실에 들어와 있을지. 이안의 말에 하이든은 솔깃한 얼굴을 했다. 그는 이안이 노아를 거의 창고나 다름 없는 구석 방에 보내라고 했을 때부터 말도 안 된다며 매우 완강하게 반대를 했었다. 지금도 결혼 했으니 미운 감정은 좀 버려두고 마음을 열어 보는 건 어떻겠냐고 매일 설득하려 드는 하이든이니 제법 혹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 저택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 하이든뿐만은 아니잖아. 잠깐 정도라면 미리엄도 얼마든지 저택을 관리할 수 있어.”
하이든은 매우 갈등하다가 이안의 끈질긴 설득에 마침내 항복했다. 갑작스러운 결혼 때문에 요즘 무리한 것도 있었으니까. 그것도 당장 가는 게 아니라 며칠 동안은 인수인계를 끝내놓고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이안은 그러마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보내 놓은 다음에는 최소한 한 달은 푹 쉬고 오라고 해야지. 하이든이 돌아왔을 때 노아는 아예 이 저택에서 나간 상태일 것이다.
“저녁 식사가 준비 되어 있습니다, 주인님. 드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지.”
그러고 보니 결혼 이후로는 저택에서 저녁을 드는 게 오랜만이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이안이었기에 하이든은 특별히 엄격한 면접을 거쳐 이안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요리사를 고용했다. 그 때문에 이안은 저택의 요리를 꽤 마음에 들어 했고, 매 끼니마다 요리사는 매번 혼신의 힘을 다해 그의 입맛에 꼭 맞는 요리를 식탁에 올렸다. 하긴 한 끼마다 어마어마한 가격을 지불하고 있으니 그럴 수 밖에.
다니엘 녀석도 툴툴거리고 징징거리면서도 몇 년 동안이나 비서로 일하고 있지 않나. 그 밖에도 생각해 보면 돈이 있어서 회사를 다시 세울 수 있었고, 부모님의 유산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으며 친척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안은 돈이라면 모든 걸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아니다. 그러나 이안은 사람이 돈 때문에 얼마나 악독해질 수 있는지, 혹은 얼마나 비참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친척들이 원래는 자신에게 속해야 할 부모님 유산을 거의 모조리 빼앗아가는 바람에 세상 모든 것에 환멸과 증오를 느끼며 겨우 살아가던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잠시 옛날 일을 떠올리면서 1층 홀로 내려온 이안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오늘도 요리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요리한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테이블 위 어딘가 멍하니 시선을 두고는 넋을 놓고 있던 노아가 이안을 보자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만의 오붓한 시간을 만들어주자고 생각했는지 하이든이나 다른 고용인은 자리에 없었다. 이안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점심에 먹은 걸로는 부족했나?”
노아가 막 인사하려는 찰나 이안이 조롱하면서 식탁에 앉았다. 그 조롱에 귀 끝이 붉게 물든 노아가 입만 조금 방긋거리다가 별 말을 하지 못하고 다시 앉았다. 이안은 조금 신기하게 생각했다. 점심 때는 물론이고 요즘 그렇게 당한 걸 생각하면 자신과는 식사도 하지 않으려고 할 줄 알았는데… 보기와는 다르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가? 그건 또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눈을 내리깔고 식기만 바라보는 노아는 알파에게 완벽히 순종하는 오메가 그 자체나 다름 없는 모습이었다. 이안은 노아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기 보다는 그 유명한 알파 우월주의자인 테너에게서 알파가 뭘 하던지 따르라는 교육을 받은 탓에 자신이 뭘 하던 참으며 따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잠시 뿐이었다.
이안이 식사를 시작하자 따라서 저녁을 먹기 시작하는 노아는 흠 잡을 곳 없는 식사 예절을 보이고 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우아하게 식기를 놀리는 노아의 모습을 보면서 이안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가령 저 맹랑한 파란 눈을 뜨지도 못하게 얼굴에 정액을 흩뿌리고 싶다거나, 막 음식을 삼켜 꼭꼭 씹고 있는 입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도록 제 것을 밀어 넣거나 식탁 위에 벌거벗긴 채 올려 뒤로 와인을 먹여 준다거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 누가 봐도 매우 음험한 시선을 노아도 느끼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안이 톡톡 탁자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생각보다 의외인 걸, 아직도 내 저택에 있을 줄은 몰랐어. 솔직하게 말해봐, 오메가라 나한테 그렇게 박히는 게 좋아서 아직 남아 있는 건가, 응?”
난 너를 저택에서 내쫓아내고 싶어서 이렇게 괴롭히고 있는 거란 걸 돌려 말했는데도 노아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다 의미를 알고도 그러는 건지 묵묵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 깔았다. 금색 눈썹이 조금 떨린다 싶었을 때 눈가에 약간 눈물이 글썽거리는 게 보였다.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나 보군. 이안이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뭐, 어쨌든 아직은 견딜만하다는 거지.’
평소에도 좀 가학적으로 섹스를 하는 편이긴 했지만 바쁘기도 하고 저택에 누군가를 끌어 들이는 건 굉장히 마땅치 않은지라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이쪽으로 재미를 붙이고 말았다. 노아와 이혼을 하고 난 뒤엔 아무래도 [Tear]에 자주 들리게 될 법했다. [Tear]의 샵 마스터에게 평소 여러 이야기들을 들은 터라 이안은 노아를 괴롭힐 방법을 수 십 가지도 더 알고 있었다.
하루에 두 판씩 하면 짧은 시간 내에 여러 번 즐길 수 있겠지. 아침 저녁이라던가, 아니면 밤과 새벽도 괜찮겠군. 노아의 수면 시간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생각이었으나 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노아가 머뭇거리며 입을 연 것은 이안이 한참 노아를 괴롭힐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저,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이안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노아가 흘깃 눈을 들어 이안을 바라보고는 누구나 연민을 가질 법한 퍽 가련하고 애처로운 모습으로 아까 이안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제서야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늦은 대답을 몹시 답답하게 여겼을 이안이었지만 노아가 과연 무슨 대답을 할까 하는 궁금증에 그런 건 좀 밀어두었다.
“뭘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사…람마다… 성적 취향이 다를,… 수도 있잖아요.”
허? 이안은 잠시 기가 찼다. 그러니까 그 동안 내내 자신에게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서도 한다는 말이 성적 취향이 다르다는 대답이라…
“당신과 결혼한 이상… 제가 이해해야 하니까요…”
오, 그렇게 합리화해 보겠다는 거지. 어디 계속 말해 보라는 태도로 이안이 식사 예절 따위는 집어 치우고 삐딱하게 턱을 괴고는 노아를 바라봤다. 식사를 채 반도 하지 않았지만 입맛은 이미 뚝 떨어진 지 오래라 오늘도 요리사가 공들여 만들어낸 음식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이안의 마음 속에서는 다분히 음험하고 난폭하기 짝이 없는 생각들이 스물스물 식욕 대신 차오르고 있었다. 식욕 대신 성욕이라…
이안이 아무런 말도 없자 식탁만 바라보고 있던 노아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안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얼굴 표정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이안은 노아를 한심하게 생각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노아의 외모가 꽤나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대체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지 살면서 한번도 햇빛에 그을려 본적 없는 것 같은 노아의 피부는 제법 손에 착착 잘 감겼는데 특히나 옷을 벗겨 놓고 보면 한번도 남에게 쉬이 보여준 적 없었을 엉덩이나 허벅지 안 쪽이 제일 희고 부드러워 매번 자국을 남기는 맛이 있었다. 또 이안에게 억지로 범해질 때마다 고통과 괴로움에 찡그려지는 미간과 눈물이 그렁거리는 파란 눈은 얼마나 가학 심을 불러 일으키던가. 가끔은 꼭 노아가 일부러 그렇게 행동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이안은 흘깃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지금쯤이면 하이든이 정원을 산책하고 있을 시간이다.
“그래서?”
“그러니까… 저어기, 이안도…”
애써 낸 용기가 푹 꺾어졌는지 노아가 귀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우물거리며 발간 입술을 달싹거거리며 작게 말했다. 조금만, 덜… 아프게 해주시면… 노아가 그렇게 말 하는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방금 막, 잠시 후 노아를 어떻게 괴롭혀줄지에 대한 결정을 내린 참이었다. 오늘은 [Tear]에서 산 물건들을 좀 써야겠군.
“뭐라고? 너무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렸는데.”
“네? 아… 그게…”
노아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우아하게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식탁 위로 던졌다. 그리고는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아에게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이야기는 잘 들었어. 잘 됐네. 내 성적 취향을 이해해준다니 어디 걱정 없이 해 보자고.”
과연 노아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이안은 궁금해졌다. 최소한 하이든이 휴가를 보낸 후까지는 저택에 남아 있어야 할 텐데 말이지. 그가 식탁을 지나 발간 입술을 조금 벌리고 있는 노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긴장해서 마른 침을 삼키는 것이 확연하게 보이는 자신의 오메가의 어깨를 짐짓 상냥하게 툭툭 두드리고는 설명했다.
“난 지금 당장을 말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