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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와? 식사 시간은 끝났어.”
눈을 비비며 노아가 다가오자 이안이 쳐다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말했다.
“네? 하지만…”
홀에 내려왔다가 이 저택에 온 뒤로 처음으로 이안의 핍박(?)에 진짜 억울해 노아가 입을 방긋거렸다. 오늘은 보통 밤에나 괴롭히던 이안이 지난 밤 저녁 플레이에 조금 지쳐 쿨쿨 늦잠을 자던 노아를 아침부터 다짜고짜 엎어 놓고 박아댔던 터라, 노아는 이안이 제 욕구를 채우고 나간 뒤에도 잠이 덜 깨 비몽사몽 헤매면서도 그래도 일단 깼으니 아침을 먹겠다고 내려왔던 것이다.
원래는 아침을 잘 먹지 않는 편이었지만 요 근래 들어 워낙 배출(!)하는 것도 많고, 전에는 많아 봤자 일주일에 겨우 두 번, 많아 봤자 세 번이나 했던 걸 매일 같이 하자니 기력이 좀 딸려서 이젠 삼시세끼 배가 고팠다. 오늘도 아침에 그렇게 했으면 밥은 먹여줘야 할 거 아니야… 노아가 매우 아쉬운 눈으로 빈 접시들을 바라봤다. 이안은 벌써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신 상태였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먹어 치울 수가 있지? 내가… 내가 늦게 내려 왔으면 얼마나 늦게 내려왔다고…
노아가 시무룩하니 식탁 위를 바라봤다. 내 음식… 여기 요리사가 얼마나 맛있게 요리 하는데… 저기 남은 크루아상이라도 좀 집어 먹으면 안 돼나, 미련이 남은 노아가 머뭇거리자 이안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식사 시간 끝났다니까. 말 못 알아 들어?”
혼자 식사 좀 하려니 밥 맛 떨어지게… 이안이 오늘따라 굉장히 재수 없고 매우 싸가지 없이 지껄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버버하고 있던 노아가 좀 부아가 치밀어서 서재로 향하는 이안의 뒤에 대고 뻐큐를 날렸다. 그렇다고 치사하게 밥을 굶기냐?
“…뭐야?”
“네?”
기가 막히게도 타이밍을 맞추어 이안이 뒤돌아서는 순간 노아는 간신히 가운데 손가락을 접을 수 있었다. 이안이 어정쩡하게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는 노아를 미심쩍은 눈으로 노려봤다. 어쩜 저렇게 눈치가 귀신 같을까… 식은땀을 흘리며 노아가 방으로 향할 때도 등 뒤에 이안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노아는 좀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을 굶었더니 그만 너무 욱했어…
방에 돌아온 노아가 어디 먹을 것 없을까 기웃거리는데 똑똑 누군가 정중하게 노크하며 들어왔다. 노아는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와 줄 하이든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이든은커녕 아침식사도 없는 그냥 고용인이었다. 고용인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노아님, 오늘 오후 2시까지 회사로 와 손님을 저택까지 모시라는 이안님의 전언입니다.”
갑자기 손님이라니… 노아가 조금 의아해 하면서 눈을 굴렸다. 아무리 나중에 이혼할 거라고는 해도 결혼은 결혼이니 이안의 손님을 맞이해야 하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런데 오늘 하이든은 어디 갔나요?”
보통 이안이 전언을 보낼 때는 항상 하이든을 통해서 보냈고, 식사 때마다 옆에서 시중을 드는데 이번엔 없는 데다가 오늘 따라 이안이 노아를 막 대하는 걸 보니 저택에 지금 하이든이 없는 모양이었다. 고용인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매우 송구스럽다는 태도로 대답했다.
“현재 집사장님께서는 휴가를 보내시느라 저택에 계시지 않습니다. 대신 미리엄이 저택 관리를 도맡아 하는데, 필요하시다면 미리엄을 호출할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잠시 노아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낸 고용인이 곧 포커페이스를 되찾아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시라는 말을 하며 물러났다. 왜 하이든이 나한테 말도 없이 휴가를 떠났을까… 생각해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왜긴 왜겠나, 이안이 일부러 자신 모르게 하이든을 보내 버렸겠지. 더 괴롭혀주는 건 좋지만, 그럼 설마 앞으로도 식사를 못하는 건가? 설마 사람을 굶길까 싶었지만 오늘 이안이 하는 걸 보니 노아는 오늘 회사를 갔다 오는 길에 먹을 것이나 많이 사다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아침에 이안이 굶겼던 탓인지 점심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몹시 풍성하게 나왔다. 이안이 노아를 구박할지라도 고용인들은 좀 측은하게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노아로써는 나쁠 것이 없었기에 디저트까지 배부르게 먹고는 느긋하게 리무진을 타고 회사까지 향했다.
회사 앞에 리무진이 설 때까지 노아는 별 생각이 없었다. 이안의 손님이라기에 그저 사업과 관련된 손님이겠거니 했을 뿐… 보통 알파와 오메가가 결혼했을 때는 성별의 구분 없이 오메가가 안주인의 역할을 맡아 하는 법인데, 손님맞이도 안주인의 의무 중 하나였다. 그럴 때 대게 그 손님이란 건 사업 파트너의 반려자들로, 저택이나 안내해주고 티 타임이나 가지면서 사교 관계를 쌓는 것이다. 물론 아무리 손님 맞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회사까지 보내 맞이하라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리무진에서 내려보니 보이는 건 도도하게 차려 입은 낯익은 여자와 매우 어두운 안색의 다니엘이었다. 노아가 눈을 깜박였다. 어라, 헤더를 또 여기서 보네. 이안의 비서인 다니엘이 손님일리는 없으니 손님이 헤더인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다니엘. 그리고 미스…?”
일단 모르는 척 노아가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노아가 나타나자 다니엘은 저번에 회장실로 안내하던 중 헤더를 만났을 때처럼 몹시 안절부절못하면서 노아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헤더는 노아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노아를 위 아래로 훑어 보았다. 그러더니 피식, 명백히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헤더라고 불러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헤더의 태도에 다니엘은 이제 흡사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노아는 그런 헤더의 모습을 재미있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았어요, 다니엘. 이제 일 보러 가셔도 괜찮아요.”
“예, 알겠습니다…”
다니엘은 오늘 노아가 고용인들에게 수없이 많이 받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시선을 보냈다. 측은함과 걱정이 담긴 시선이었다. 음…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이는 걸까? 하긴 생각해보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지금 노아는 제 배우자의 애인을 저택에 손님으로 모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니엘은 마치 노아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리며 헤더의 뺨을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노아는 조금 민망해졌다. 그런 거 아닌데… 설명할 수도 없고…
“정 내키지 않으시면 제가 다른 리무진을 불러서…”
다니엘이 노아에게 무한한 배려를 베풀고 있는 와중에 헤더가 불쑥 끼어 들었다.
“아니, 난 이 차가 마음에 드는데. 이제 볼일 보러 가지, 다니엘?”
예전부터 몹시 헤더를 매우 싫어하는 것 같은 다니엘이 헤더를 한번 째려보고는 다시 걱정 가득한 시선을 노아에게 보내며 회사 안으로 사라졌다. 리무진 기사가 문을 열어주자 헤더가 도도하게 먼저 들어갔고, 기사가 조금 어이 없는 얼굴을 했다. 노아는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신도 리무진에 탔다.
“안녕, 노아. 그 동안 잘 지냈어?”
리무진 문이 탁 닫히자 마자 아까의 무례한 태도는 어디 갔냐는 얼굴로 헤더가 섹시하게 다리를 꼬며 웃었다. 여전히 구불거리는 더티 블론드, 선명한 붉은색의 입술과 호선을 그리며 웃는 초록색 눈까지 몹시도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헤더가 뾰족한 구두 앞 코를 살짝 까닥거리며 감탄했다.
“세상에, 네가 그 노아 프로스트일 줄은 몰랐는데.”
“음… 나도 네가 이안의 애인일 줄은 몰랐어.”
만약 자신이 이안과 결혼하기 전부터 사귀는 사이었다면 아무래도 헤더의 입장에서 노아의 존재는 썩 좋아 보이지 않을 터였기에, 노아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머뭇거리는 동안 헤더가 까르르 웃었다.
“노아, 너 정말 여전히 귀엽다. 난 이안 애인 같은 게 아니야. 그냥 좀 아는 사이지. 그런데… 괜찮겠어?”
“응? 뭐가?”
헤더는 노아의 안색을 살폈다. 노아와는 알고 지낸 지 한 1년쯤 된 사이다. 클럽에서 알렉스의 소개로 만나 서로 재미있는 시간들을 보냈었는데, 보통 클럽에서 만난 사람을 밖에서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건만… 회사에서 노아를 만났을 때는 헤더도 내심 깜짝 놀랐다. 이안과 결혼한 사람이 노아였을 줄이야. 그러니 지금 노아의 앞에서 몹시 조심스러워 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사람 네 남편이잖아.”
“아… 괜찮아. 어차피 나중에 이혼할 텐데. 그리고 딱히 좋아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노아가 너무나도 해맑게 말한 나머지 헤더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차피 이혼할 거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는데 다니엘은 영, 헤더 자신이 이안과 노아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는 정부 내지는 애첩이라도 되는 양 굴었던 것이다. 그 태도에 혹시나 노아와 척을 지게 되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쓸모 없는 걱정이었다.
하긴 이따금씩 상류층 인사들은 헤더로써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행동들을 하곤 했다. 헤더는 노아와 척을 질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이제 더 이상 클럽에는 오지 않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너 이제 안 오는 거냐고 찾던데.”
“나도 가고는 싶지만 지금은 좀 가기 그래서.”
아무래도 나름 결혼을 한 몸이니 좀 찔리기도 했고 또 요즘에는 이안 덕에 굳이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지라 노아는 최근에는 클럽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클럽 하니 노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맞아, 헤더. 요즘 호텔에 새로운 VIP등급도 생겼어?”
“아니, 전이랑 똑같은데… 그건 왜?”
“이안이 검은 상자를 가지고 있는 걸 봤는데, 원래 [Tear]에서 나눠주는 상자 중에 검은 색은 없잖아.”
아, 그거… 중얼거린 헤더가 미소 지으며 바싹 노아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빨간 매니큐어가 발린 잘 손질된 손톱이 노아의 턱을 가볍게 간질이는 것처럼 움직였다. 헤더가 훅 귓가에 입김을 부는 통에 노아가 움찔했다.
“알고 있긴 하지만… 가르쳐 주면 뭐 해줄 건데?”
헤더의 손톱이 일부러 따끔하게 노아의 흰 목을 긁어 생채기를 내면서 아래로 내려오더니 노아의 다리 사이를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헤더는 한 쪽 성향만 강력하게 지향하는 노아와는 다르게 고통을 주는 것에도, 고통을 즐기는 것에도 둘 다 능숙했다. 응, 하고 반사적으로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내면서 노아가 반응했다. 이안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게 몹시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한 번만 네 거 빨게 해주면 가르쳐 줄 수 있어.”
헤더가 가르랑거리며 유혹적으로 노아를 구슬려댔다. 하지만 딱히 먹혀 들지는 않았다.
“싫어. 그냥 모르고 말래.”
노아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노아는 예전에 헤더가 한 번만 빨게 해달라고 해달라는 요청에 다른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순순하게 응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헤더의 오랄은 일단 상대방을 묶어두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누구나 처음에는 헤더가 환상적으로 빨아대는 통에 몹시 좋아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쁨은 고통으로 변해서 곧 상대방은 항상 그만하라며 애원하면서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노아는 그런 류의 고통은 절대 즐기지 않았다.
노아가 제안을 거절하자 헤더가 노골적으로 아쉬운 한숨을 쉬면서 노아의 다리 사이에서 노닐던 손을 거두었다.
“알았어, 원래는 알려주면 안 되는 건데, 아무리 네가 좋아서 한 결혼이 아니라곤 해도 어쨌든 미안하니까... 그 검은 상자는 마스터 박스라고 불러.”
“마스터 박스?”
“그러니까, 호텔의 주인만 가질 수 있는 그런 박스라 이거지.”
노아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안이 그 호텔 주인이라고? 지하 3층부터 15층 꼭대기까지 완전 끝내주는 물건들로만 가득 찬 그 호텔의 주인이 이안이라니…! 노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니, 진작 알았으면 테너가 결혼시켜주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 결혼시켜 달라고 했을 텐데…
“그 호텔이 원래는 불법 윤락 업소였는데 그걸 사들여서 리모델링하고 고급 코르티잔(*고급 매춘부)을 스카우트한 거야. 수입도 수입이지만 아무래도 비즈니스 관련으로 얻는 정보도 많은 것 같더라고. 가끔 비밀 회담 장소로도 사용하니까. 여하간 공식적인 마스터는 아니지만 비공식적으로 실 소유주는 이안 밀러지.”
하긴 호텔을 방문하는 고객들은 대부분이 상류층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 호텔에 고용된 사람들이다. 정보를 모으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헤더도 1년 전까지만 해도 최 상층부에서만 머물며 특별한 손님들을 접대하다가 계약 기간이 끝나 아래로 내려온 것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노아는 비즈니스고 뭐고 상관 없이 이안이 그 호텔의 소유자라는 말에 나중에 이혼하겠다던 마음이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다,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그 호텔 연간 이용권을 달라고 하면… 좀 그렇겠지… 사실 나 거기 연간 이용권 지불하기 좀 빠듯한데. 아님, 호텔까지는 아니더라도 [Tear] 신제품 무료 테스터라도... 공상에 빠져 있던 노아가 정신을 차린 건 헤더가 오묘한 뉘앙스로 자신을 불렀을 때였다.
“그런데 노아, 나 미리 사과 좀 할게 있어.”
“무슨 사과?”
노아의 성향을 매우 잘 알고 있는 헤더가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이걸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이어진 헤더의 말에 노아의 귀가 쫑긋했다.
“사실 이안이 여기 보내면서 나한테… 네게 좀 못 되게 굴라고 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