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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어느 순간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뭔가 이상한 기분에 잠에서 깨어나고도 한참을 내가 왜 깨어났지? 하면서 비몽사몽 의아해 하고 있던 노아는 문득 무언가 제 얼굴 부근을 스치고 있음을 느지막이 깨달았다.
확실히 피부에 닿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가 아주 간질거리도록 솜털 정도만 스치는 정도라 노아도 긴가 민가 했다. 이게 뭐지… 지금 내가 가위에 눌리고 있는 건가? 머리카락? 그도 아니면 벌레? 거의 깨어날락 말락 하는 애매모호한 상태였기 때문에 노아는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는 데 한참 걸렸다. 정신은 조금 깨어났으나 노아의 몸은 아직도 깊은 숙면을 유지하는 상태였다.
다시 잠들려던 노아를 깨운 건 이상하고도 간지러운 감각이었다. 누군가가 빤히 바라보는 것도 같고, 꼭 아슬아슬하지만 닿지는 않게 얼굴 윤곽을 따라 덧그리는 것도 같은… 더 자고 싶은 마음에 무시하려고 애를 썼지만 갑자기 제 몸이 한번 크게 들썩이는 바람에 결국 노아는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끙끙거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자신을 빤히 내려다 보고 있는 이안의 모습이었다. 노아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움직였다. 아까부터 몸이 흔들거리고 있는 건 알았지만 이제서야 이유를 알겠다. 조금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안이 제 다리 사이에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안 쪽 깊은 곳까지 찔러 올리는 바람에 노아가 아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거나 말거나 대체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이안이 곧 제 좋을 대로 욕구를 풀어 놓고는 물러났다. 덕분에 확실히 잠이 깬 노아가 졸린 눈을 비비면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바라보니 10시를 훌쩍 넘어 11시에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보통 8시 쯤에 회사로 출근하던데, 오늘은 웬일로 아직까지 집에 남아 있나… 아직 잠 기운이 남아 있어 노아가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는 동안 언제 노아를 범했냐는 듯 도로 말끔한 옷차림을 한 이안이 침대 위에 옷을 던져 올려 두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직여 바라보자 이안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12시에 식당으로 내려와.”
“…네?”
노아가 되묻건 말건 불친절하게도 다짜고짜 12시에 식당으로 오라는 말만 던져둔 채 이안이 부부침실을 나갔다. 노아는 벙찐 채로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 하여간… 조금 더 설명하면 입에 가시라도 돋냐고. 툴툴거리면서 노아가 제 몸을 살펴 보았다. 어젯밤 이안에게 시달리다가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려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탓에 몸이 얼룩덜룩했다. 요즘엔 왜 그러는지 몰라도 이안이 하도 씹어대는 바람에 잇자국이 남아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몸이 찐득거리는 것 같아 찝찝한 마음으로 욕실에 들어선 노아는 전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좀 놀랬다. 어제 심하게 씹어댄다 싶긴 했지만 이건 무슨 개 껌 수준으로 물어 뜯어 놓았네. 하긴, 자신은 아픈 거라면 뭐든 좋았으니 상관은 없지만… 누가 알파 아니랄까 봐 이렇게 해 놓은 걸 보니 꼭 짐승들이 영역표시 해놓은 것 같다 생각하며 노아가 목에 채워진 목줄을 만지작거렸다.
검은색 가죽으로 제작된 목줄은 안쪽이 매끄러운 재질로 잘 다듬어져 있어 쓸리거나 거슬리진 않았지만 조금 갑갑하긴 했다. 당연히 남 앞에서 하고 다닐 물건은 아니었다. 식당으로 내려 오라고 해놓고선 이안이 목줄은 풀어주지 않은 걸 보니 노아가 자고 있는 사이 아침에 손님들이 다 간 모양이었다.
샤워를 마친 뒤 노아는 이안이 두고 간 옷으로 갈아 입었는데 상의가 브이 라인으로 푹 파여 있어 목은 물론이고 이안이 마구 깨물어댄 흔적까지 훤히 드러났다. 남들 앞에서라면 모를까 고용인들 앞에서 더한 꼴도 보여준 적이 있기 때문에 노아는 아무 생각 없이 좀 야시시하기까지 한 옷을 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식당으로 내려와 보니 손님이 다 떠난 게 아니었다. 드미트리와 사샤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노아가 어리둥절해 하면서 테이블에 다가가 이안의 옆에 앉자 사샤가 어젯밤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노아의 옷차림에 놀란 눈으로 뺨을 조금 붉혔다. 드미트리는 기분 나쁘게도 매우 흡족해 하는 얼굴로 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
노아가 살그머니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른 손님들은 모두 보냈으면서 왜 그토록 싫어하던 드미트리만은 따로 남겨 점심을 대접하고 있을까… 스와핑은 안 한다고 했으면서 설마 이제 와서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 점심 정찬을 이안이 스와핑을 허락한다는 의미로 받아 들인 건 노아뿐만이 아니라 드미트리와 사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사샤의 얼굴은 또다시 창백하게 질렸고, 드미트리는 노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연신 거슬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저히 이안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 노아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미트리는 저 혼자 기분이 좋았다.
“오늘 따라 점심이 무척 훌륭하군. 하긴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지 않나.”
노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점심이 훌륭하다는 말을 하면서 왜 날 바라보는데? 내가 먹기 좋은 음식인가? 무슨 비유를 해도 그 따위 밥맛 떨어지는 비유를… 그러나 노아의 반응이야 어떻든 이안은 식사를 시작하며 그렇군요, 하고 말 뿐이었다.
다들 딱히 말이 없었지만 드미트리는 신나서 식사하는 내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주로 자신에 대한 화제였지만 종종 노아나 사샤가 얼마나 매력적인 가에 대해서도 칭찬을 했는데 둘 다 별로 듣기 좋은 칭찬은 아니었다. 노아는 식사를 하며 요리사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말들을 듣는데도 생각보다 입맛이 사라지는 일 없이 음식이 잘도 넘어갔으니까…
마침내 식사가 끝나 차나 후식이 나왔을 때쯤, 드미트리가 잔뜩 몸이 달은 상태라는 건 누가 봐도 훤했다. 사샤는 얼굴에 역겨운 기색을 미처 감추지 못하여 고개를 숙였고, 노아는 좀 냉랭한 얼굴의 이안을 바라보며 눈을 굴렸다. 처음엔 스와핑을 허락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안의 분위기를 보니 드미트리 혼자서만 눈치 없이 헛물 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시작했다.
“그럼 어디 이야기 좀 나눠볼까요.”
“오, 좋네. 먼저 어디가 좋은가? 난 침실도 좋지만, 식당도 괜찮네만…”
드미트리의 말에 사샤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리고 이안이 신나 이것저것 다분히 노골적인 제안을 하고 있는 드미트리의 말을 자르며 태연하게 이어 말했다.
“식당도 좋죠. 그럼 식사도 다 했으니 콜림스카야의 광산 채굴권 이양에 대해 말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안의 말에 기분 좋게 웃고 있던 드미트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뭐라고?”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광산 채굴권 말입니다.”
식사 후 잡담이라도 나누듯 이안의 말투는 느긋했으나 이제 드미트리의 얼굴은 완전히 굳고 말았다. 노아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오,… 이러려고 드미트리와 점심 식사를 같이 한 건가? 갑자기 흥미진진해 지는데…
우아하게 차를 마시면서 이안이 드미트리의 경악스러운 표정을 즐겼다. 애초에 이안이 드미트리를 사업 파트너로 지정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러시아 콜림스카야의 티타늄 광산 채굴권을 드미트리가 소유하고 있었으니까.
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려진 그 비밀스러운 광산은 드미트리의 부친이 소유하고 있던 소유의 토지에서 발견된 것으로 드미트리가 가진 거대한 자금의 상당부분이 다 그 광산을 소유한 덕분이었다. 전쟁의 종료와 동시에 티타늄을 이용한 무기 생산이 중단된 후로도 그 채굴권을 이용해 드미트리가 얻는 이득은 상당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왜 이런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작자와 손을 잡았겠는가. 게다가 엄연히 말하자면 손을 잡은 것 조차 아니었다. 드미트리의 일방적인 착각일 뿐이었지. 그래도 명색이 공식 사업 파트너인지라 좋게 대접해 주려고 했는데… 드미트리는 이안이 인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우월주의에 빠진 알파들 사이에서 자신의 오메가를 교환하는 건 흔하지 않지만 그렇게 아주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오메가란 거의 소유물에 가까웠으니까. 뭐 자기들이 그렇게 놀겠다는데 이안도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거절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수작을 부리는 건 자신에 대한 도전이자 제 권리를 침범하는 것이었다. 어제 부로 드미트리에 대한 이안의 인내심은 완전히 끝났다.
“자네가 그 광산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니, 그보다 이양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안이 가식적인 예의를 집어 던진 것처럼 드미트리도 웃는 낯을 치웠다.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으나 이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마치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는 마냥 제멋대로 굴어왔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유리한 위치에 자리 하고 있던 사람은 이안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전 당신이 그 광산 채굴권을 넘겨주길 바랍니다.”
“농담도 심하군! 지금 오메가 한번 빌려주는 값으로 그 채굴권을 내놓으란 건가? 진심이야?”
“이보다 진심일수는 없겠지요, 미스터 솔로브요프.”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 붉히면서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사샤가 반사적으로 움찔 놀랐으나 이안은 몹시도 여유로웠다. 노아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이안이 드미트리의 등을 쳐먹으려고 하는 장면을 몹시 흥미롭게 관전했다. 물론, 너무 재미있어 하는 얼굴로 보일까 봐 표정을 관리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안이 자신의 심기에 거슬리게 굴자 드미트리는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믿기진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그래도 제 딴에 좋은 사람인 척 굴었던 듯, 그가 대번에 안색을 바꾸며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시답잖은 농담은 이쯤에서 그만두지. 며칠 동안 자네 오메가 좀 빌려줘야겠네. 이번 사업 확장은 내 지원 없이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드미트리의 협박에 이안이 피식 웃었는데, 그 비웃음이 얼마나 재수 없고 모욕적으로 보이던지 지켜보던 노아가 은연중에 자신이 드미트리라면 정말 열 받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노아였다면 저 웃음 뒤로 이어질 모욕적인 행위를 기대했을 테지만…
이내 이안은 미스터라는 호칭까지도 떼어버리며 드미트리를 불렀다. 솔로브요프.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만. 드미트리를 부르는 이안의 어조는 승자의 여유로움으로 가득 넘쳤다. 이안의 태도에 뭔가 있나 싶었던 드미트리가 살짝 불안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이 곧 경악으로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율리아의 동영상,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율리아의 동영상? 그게 대체 뭔가 싶어 노아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반면 드미트리는 제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 젊은 애송이에게서 그 이야기가 나온단 말인가?
“…뭐…라고?”
“거기에 당신 얼굴도 아주 잘 나와 있더군요. 그런 큰 일을 저지를 때에는 얼굴을 잘 가렸어야지.”
드미트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자, 자네가… 그걸… 그걸 어떻게… 가지고… 아니, 알고… 드미트리가 몹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건데, 모르긴 몰라도 그 율리아의 동영상이란 게 드미트리에게 굉장히 치명적인 약점이란 건 잘 알겠다. 노아도 내심 드미트리가 짜증났던 차였기 때문에 매우 즐겁게 이안이 드미트리를 깔아 뭉개는 모습을 감상했다. 몹시 당황해 하면서도 드미트리가 일단 잡아 뗐다. 물론 소용 없는 짓이었다.
“허… 거짓말을 해도 작작 해야지! 어디서 뭘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동영상… 난 모르네!”
“아, 모르시겠다. 그 동영상의 목에 단검 문신을 한 남자들이나, 그레이 하운드 따위와 함께 즐겁게 웃고 있는 남자는 모른다 이 말이지요? 이상하군요, 아무리 봐도 당신과 비슷하게 생긴 자였는데 말입니다.”
“그… 그건…”
이안은 드미트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창백하게 질려서는 분노와 불안감에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웃었다. 멍청한 자 같으니라고.
지금도 그랬듯이 1년 전에도 드미트리는 러시아가 마치 제 왕국인 마냥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면서 자신이 좋을 대로 오메가들을 건드리고 다녔다.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이건, 자주 가는 가게의 직원이나 뒷골목의 창녀이건 간에 상관없이 드미트리의 마음에만 들면 상관 없었다. 전쟁 이후의 러시아는 철저하게 돈과 권력에 지배당하는 곳이었고 드미트리는 충분한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찰조차 가해자의 편을 드는데다가 안 그래도 러시아에서 오메가란 절대적인 약자이니 그에게 당한 이들은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이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호텔에서 제법 그의 마음에 드는 오메가를 발견했다. 그의 취향에 딱 맞게도 블론드에 파란 눈을 가진 어여쁜 아가씨였다. 당연하지만 드미트리는 알파인 내가 건드려주는 걸 감사히 여기라는 마음으로 그 예쁜 오메가를 취했다. 드미트리는 항상 그렇듯이 오메가의 반항 정도야 평상시 항상 하는 대로 귀여운 앙탈 정도로만 여겼다. 하도 시끄럽게 굴기에 재갈까지 물려두며 며칠을 즐기며 지냈는데 문제는 실컷 즐기고 난 뒤였다.
드미트리는 이미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서야 자신이 건든 그 예쁜 오메가가 그냥 평범한 오메가가 아님을 알았다. 어쩐지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 했더니 러시아에서 거의 왕족이나 다름 없는 힘을 가진 권력자 구세프가 애지중지하는 딸 율리아였다. 게다가 구세프는 잔혹하기로 소문난 러시아 마피아의 수장과 의형제를 맺은 자이기도 했다.
구세프가 자신의 딸을 건든 것을 아는 순간 자신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신세가 되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구세프의 딸을 함부로 죽일 수도 없으니, 드미트리는 아예 율리아의 입을 단단히 막아두기로 했다. 그는 율리아를 집으로 돌려 보내기 전 자신이 돈을 주고 부리는 자들과 자신이 취미 생활에 사용하는 개들을 한데 모았다. 이틀 내내 지속된 끔찍한 촬영이 끝나고 나서야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이게 어찌된 일이냐며 길길이 뛰는 아버지 앞에서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거의 반 미친데다가 실어증에 걸리고 말았으니까.
그 뒤로 제 딸을 해한 자식을 갈갈이 찢어 놓겠다며 구세프가 단단히 이를 갈고 있는 걸 러시아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 짓을 저질러 가며 입막음을 하려고 했으면 그 사건에 대해서는 입 방긋 하지 않고 지낼 것이지, 멍청하게도 드미트리는 몇 달 전 Tear에 와서 자신이 오메가들을 따먹은 일을 무슨 영웅담이라도 말하듯 떠들어댔다. 그건 제 약점을 이안의 손에 쥐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어리석은 짓이었다.
게다가 드미트리는 ‘심부름꾼’들이 역으로 처리되지 않도록 항상 증거 영상을 몰래 찍어 보관하고 있는 건 몰랐던 모양이다. 드미트리의 심부름꾼들에게 제법 비싼 값을 줘야 했지만 앞으로 드미트리에게 뜯어낼 것에 비하면 그다지 비싼 대가도 아니었다.
“채, 채굴권이면 되겠는가...”
순식간에 약자의 입장으로 전락한 드미트리가 몹시 쩔쩔매며 물었다. 이안이 율리아의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드미트리에게 있어 이안이 자신의 목숨 줄을 쥐고 있다는 말과 동일했으니까. 이안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시작은 채굴권으로 하지요.”
“시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채굴권이 얼마나 비싼지 알기는 해!”
채굴권은 드미트리에게 있어서 전 재산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드미트리의 사정이지 이안의 사정은 아니었다. 멍청한 자는 그 주제에 맞게 살아야 하는 법이다. 감히 제 저택에서 수작만 부리려 하지 않았더라면 몇 년 정도는 분수에 맞지 않는 영광을 누리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이안이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미트리에게는 한없이 잔인해 보이기만 하는 미소였다.
“오메가를 한번 대여하는 값이나, 동영상의 값으로는 비싸긴 하지요. 하지만 목숨 값보다 비싸기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