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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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가 생일인 줄은 몰랐네.”

 언제나처럼 똑같은 내용이 이어지는 테너와의 통화가 끝난 뒤 노아가 중얼거렸다. 결혼을 했지만 이안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고, 좋아하는 게 아니면 관심을 갖지 않는지라 바로 사흘 뒤가 이안의 생일인데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모르고 지나갔으면 조금 곤란할 뻔 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명색이 결혼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생일 겸 파티를 열 테니 이안과 함께 오라고 했지만 이안이 과연 노아와 함께 저택에 가준다는 건 영 가망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이혼하고 싶어서 노아를 이렇게 괴롭히는 이안이 본인의 생일을 기념하는 가족 모임에 가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까 몹시 기대하고 계시던 것 같은 아버지에게는 조금 죄송하지만 그냥 노아가 따로 아버지를 만나 찾아 뵈어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생일이라니 뭐라도 사줘야 하긴 하겠지? 하지만 선물을 하려고 해도 노아는 이안이 뭘 좋아하는 지에 대해서는 도통 아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뭐 물어볼 사람이 있길 하나… 하이든이 있으면 좀 나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하이든, 휴가가 굉장히 기네… 이 참에 아예 푹 쉬고 오는 모양이다.

 막 점심을 먹은 뒤라서 배도 적당히 부르고 한참 즐긴 뒤라서 완전히 노곤하기까지 했던 노아가 이안의 생일에 대한 생각은 일단 미뤄두고 낮잠을 청했다. 한잠 푹 자고, 일어나서는 노닥거리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식사 때라 기대 만발하며 식당에 갔더니 오늘도 마찬가지로 척 봐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한 가득 차려져 있었다. 노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기다리고 있자 잠시 뒤 이안이 어슬렁거리며 식당으로 내려왔다.

 아침이나 점심은 같이 안 먹어도 이안과 저녁 식사는 제법 많이 했는데, 그 중에서 단 한번도 살가운 대화가 오간 적은 없었다. 음… 대화라기 보다는 종종 일방적인 음담패설이 오갔지. 그래서 오늘도 마찬가지로 둘 다 말 없이 요리사의 혼신의 힘이 들어간 음식을 먹는데, 샐러드를 씹던 노아는 낮잠을 자느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던 문제가 문득 떠올랐다. 이안의 생일 기념 모임 파티… 어차피 거절당할 건 알았지만 노아가 그래도 일단 예의상 말은 꺼냈다.

 “저, 이안. 할 말이 있는데요…”

 노아와 마찬가지로 말 없이 식사를 하던 이안이 눈썹을 조금 치켜 올리며 힐끔 바라봤다. 아무런 대꾸도 없었지만 이안이 다정하게 대꾸를 해주는 게 오히려 기겁할 일이라 노아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혹시 생일 날 시간 괜찮아요?”

 생일이라는 단어에 그제서야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노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노아가 자신의 생일을 꺼낸 것 자체가 굉장히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생일은 왜?”

 “사흘 뒤가 이안 생일이잖아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그 날 생일 기념 파티 겸 저택에 오는 건 어떻겠냐고 물으셔서… 시간이 괜찮다면 같이 갔으면 해서요.”

 노아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안의 대답은 노아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뭐 하러 그래야 하는데?”

 일부러 풀 죽은 척 표정을 지으면서도 노아는 다시 이안에게 재차 요청하진 않았다. 다시 몹시도 싱싱하면서도 아삭아삭 달콤새콤한 소스가 어우러진 샐러드를 먹는데 열중하는데, 어째선지 시큰둥하게 다시 식사를 하던 이안이 뭔가 떠올랐는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면서 의미심장하게 노아를 바라봤다. 노아가 뭔가 해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주 쳐다봤다.

 “뭐, 네가 잘 행동하면 초대에 응할 수도 있지.”

 “잘… 행동하면요?”

 이건 또 의외인데. 노아는 이안이 절대 프로스트의 가족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처음 본 날 전화 통화로 그토록 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던 이안이 아닌가. 그러니 제 생일 날에, 그것도 테너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노아의 생각과는 반대로 이안이 우아하게 식기를 놀리며 제안했다.

 “어차피 내 생일이잖아? 딱 하루,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같이 가주지.”

 이안의 제안에 노아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같이 가준다고…? 굳이 같이 안 가줘도 시키는 대로 다 할 수 있는데! 이안의 생일 파티 참석도 해결하고, 즐거운 하루도 보낼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이안의 생일이 아니라 사실은 내 생일이 아닐까? 갑자기 몹시 즐거워졌지만 노아는 내색하지 않았다. 일부러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이안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뭐, 싫으면 말고. 난 어느 쪽도 크게 다를 바 없으니 상관 없거든.”

 어느 쪽도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이안의 말은, 노아가 어느 쪽을 선택하던지 어차피 똑같이 괴롭힘을 당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똑같이 당할 바에야 차라리 조금 더 힘들면서도 자신이 파티에 참석하는 편이 낫지 않냐는 은근한 압박이기도 했다. 노아도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지만 이왕이면 평소보다 더 격하고 특별한(?) 플레이가 좋지 않겠나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조금 두려운 표정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 할게요. 하루 만이면… 되는 거죠?”

 “뭐, 그래.”

 굉장히 너그러운 사람인 양 이안이 대답했다. 노아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괴롭혀 줄지 생각만 했는데도 벌써부터 몹시 설렜다. 상상력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라 이안이 매번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내심 감탄했는데, ‘시키는 대로 하는’ 이란 조건이 붙자 더욱 기대감이 높아졌다.

 “저, 그러면… 언제부터…?”

 “오늘은 안 되겠고… 아, 그래. 내 생일 전날이 좋겠군.”

 생일 전 날이라… 바로 다음날 파티까지 하려면 좀 피곤할 것 같았지만 별로 상관은 없겠지. 이내 식사를 마치고 이안은 쌩 하니 3층으로 사라졌고, 노아는 너무 좋아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방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에게 간다고 연락 드려야겠다, 하고 핸드폰을 집어 든 노아는 윌리엄에게서 온 메시지를 발견했다. 시간이 되거든 가까운 시일 내에 한번 보자는 내용이었다.

 ***

 “노아.”

 “오랜만이야, 윌.”

 카페에 들어선 노아는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윌리엄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찾아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을 내리깔고 있던 윌리엄이 노아를 발견하고는 일어나 가볍게 포옹을 하며 노아를 맞이했다. 약간 아프도록 노아의 등을 탁탁 두드린 윌리엄이 이내 도로 자리에 앉았다. 노아도 맞은 자리에 앉으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윌리엄은 장남이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테너를 꼭 닮아 그렇게 살가운 성격을 가지진 못했지만, 가끔 이해 못할 정도로 억지에 가까운 쇠고집을 부리는 테너와는 달리 이해심 많고 너그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테너의 고집스러운 면은 벤자민이 물려 받았는데 테너와 벤자민이 동시에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최소한 한 달은 온 집안 사람들이 고생을 했다.

 “그래, 이번 주에 이안 밀러와 함께 모임에 참석한다고?”

 “아, 응. 보니까 시간이 어떻게 맞던데.”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면서 노아가 테이블에 차려지는 달콤한 디저트에 눈을 반짝거렸다. 이곳 카페는 프로스트가 소유한 체인점으로 노아가 단 것에는 사족을 못 쓴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테너가 아예 노아가 다니는 대학교 근처에 노아의 식성에 맞도록 디저트 전용 카페를 세워 준 건데, 사람들의 입 소문을 타다 이렇게 체인점까지 이르게 되었다.

 윌리엄은 묵묵하게 노아가 단 파르페를 행복하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는데 워낙 말 수가 없는 제 첫 째 형이기 때문에 노아는 별 의심 없이 후식만 열심히 먹었다. 노아가 몹시도 단 오페라 케이크(*커피 버터크림, 가나슈를 얇게 여러 번 쌓은 뒤 윤기가 나는 초콜렛인 글라사쥬를 올린 케이크)의 단 맛을 커피를 마셔 중화시키고 있을 때였다. 제 앞에도 놓인 케이크를 조금 베어 먹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을 마신 윌리엄이 뜬금없이 내뱉었다.

 “그래, 이안 밀러와 이혼은 언제 할 거니?”

 지나치게 갑작스러운 말에 노아가 작게 기침을 했다. 볼썽 사납게 뭔가를 뿜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그러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윌리엄의 말은 충격이 컸다. 노아는 입 안에 든 걸 삼키고 나서도 한참 뒤에서야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이… 이혼이라니?”

 “말 그대로야. 어차피 요즘엔 이혼이 그렇게 큰 흠도 아니고…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결혼한 거니 아버지도 이해해 주시겠지.”

 어… 뭐지? 왜 갑자기 윌리엄이 이런 말을 하는 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노아가 당황했다. 혹시 이전에 내가 저택에서 이런저런 거 할 때 걸린 적이 있었나? 가족들에게는 이안과 잘 지내는 것처럼 항상 말을 해왔는데… 윌리엄이 어디서 뭔가 들은 거라도 있는 걸까? 노아가 조금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기… 이혼이라니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네가 이안 밀러와 그렇게 잘 지내는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야.”

 노아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안과 자신의 사이가 그렇게 다정한 사이가 아닌 건 맞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티 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안도 일단 남들 앞에서는 나름 노아를 챙기는 척 해주지 않았나. 나름 제 형의 눈치를 보며 노아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윌리엄이 작게 혀를 찼다.

 “표정에 다 보인다, 노아.”

 “내 표정이 뭘…”

 "일단, 결혼 생활을 잘 지내고 있는 사람은 이혼 이야기에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단다."

 음... 그건 그렇네. 노아가 생각해도 아까 자신의 반응은 지나치게 무덤덤했다. 연기를 하는 중이라서 그런가 들켰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으니까. 윌리엄이 원래 기가 막힐 정도로 주변 상황 돌아가는 걸 잘 파악하기는 한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상당히 신빙성 있는 소문을 들은 것도 있지만, 아까부터 네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더 확실하구나.”

 "지금? 왜??"

 뭔가 있나 싶어 노아가 미간을 찡그렸으나 지금 윌리엄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평소보다 윌리엄의 알파 페르몬이 진하긴 하지만 그렇게 무례한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노아가 궁금해서 빤히 바라봤지만 윌리엄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쨌든 이혼할 생각이면 이안 밀러와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진 말거라. 최대한 감정적으로 엮이지 말도록 해. 내 말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응..."

 윌리엄의 엄한 시선에 찔리는 게 많았던 노아가 우물쭈물했다. 뒤늦게 생각하면 당시에 자신은 엄한 떡에 눈이 멀어(?) 결혼이란 걸 지나치게 쉽게 여긴 경향이 있긴 하다. 노아가 고분고분하게 수긍하자 표정이 풀린 윌리엄이 화제를 돌렸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윌리엄은 갑자기 일이 생겨 먼저 자리를 떴고, 노아는 조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일단 윌리엄에게는 그러마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노아는 이안에 대해서라면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은 없지만 노아는 이안의 행동이 연애나 자신을 좋아하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클럽에 다니면서 다정하게 사귀는 커플들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윌리엄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뭔가 조금 심란한 마음으로 카페를 나선 노아가 거리를 걷다가 문득 고급 양장점에 시선이 가 멎었다. 이안이 되게 재수없고 나쁜 건 맞는데, 자신도 엄연히 이안을 이용하는 거나 마찬가지고… 또… 생일이라고 하니까.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노아가 양장점에 들어섰다. 

 종업원의 공손한 인사를 들으며 노아는 세련된 커프스 링크(*셔츠나 블라우스의 소매를 여미는 장식용 버튼) 하나를 골랐다. 정장을 입을 일이 많은 이들에게 선물로는 무난했으니까. 물론 이안이 저번처럼 포장을 푸는 둥 마는 둥 하고 싸구려라며 보지도 않을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나름 좋은 것으로 고르기도 했다. 어쨌든 생일 선물이니까, 생일 날 줘야겠지. 

제가 고른 커프스 링크가 포장까지 예쁘게 다 되어 작은 종이 백에 담긴 걸 보며 왠지 조금 만족스러운 마음이 든 노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윌리엄의 충고는 마음 한 켠에 미뤄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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