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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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심한 갈증 때문이었다. 갈증이 나다 못해 목이 아파서 반사적으로 시원한 물 좀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뜨고 나서도 노아는 한참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치 심하게 술을 마시고 난 뒤 다음 날 숙취가 생긴 것 마냥 머리가 지끈거려 노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어떤 의미로 술을 마시긴 했지. 아… 피곤해… 일어나기 싫다.

 갈증도 갈증이지만 요의도 있어 결국 노아가 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키다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도로 침대 위에 뻗었다. 온 몸이, 특히 허리와 다리에 알이 배긴 듯 뻐근하고 아팠던 것이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꼭 아직도 취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심지어 어제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던지 약간 몸이 달아 오른 것도 같았다.

 잠시 앓는 소리를 내다가 노아가 느릿느릿 침대에서 구르다시피 기어 내려왔다. 그런데 이불을 벗어나고 보니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가 아닌가.

 “내가 어제… 벗고 잤나?”

 노아가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어젯밤 리무진에 탄 이후를 떠올렸지만, 이안에게 노팅을 당한 뒤로는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들어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고로 누가 제 옷을 다 벗겨 놓았는지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노아는 잠시 이안이 정신을 잃은 자신을 안아서 제 방까지 데려와 옷까지 벗겨 침대에 눕히는 걸 떠올려 보았다. 음… 상상이 잘 안 가는데. 반대로 이안이 정신을 잃은 자신을 침대에 눕히고 다시 또! 그 짓을 하는 걸 떠올려보니 매우... 상상이 잘 되는 게 아닌가.

 뭐,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온 몸에 힘이 없어 노아가 화장실로 거의 기다시피 향하다가 몸을 움찔했다. 뒤에서 꾸물꾸물 뭔가 흘러나오는 느낌 때문이었는데, 동시에 어제 맡았던 이안의 페르몬이 머리가 띵할 정도로 작렬했다.

 “아우…”

 뒤처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걸 보니 이안이 제 옷을 벗긴 건 틀림 없는 것 같다. 그래, 옷이라도 벗겨 준 게 어디야… 지끈거리는 미간을 짚은 노아가 어쩔 수 없이 비틀거리며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거울 안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다. 어젯밤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뭘 했는지 목이며 가슴팍이 울긋불긋 난리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엔 단순히 깨물기만 한 것도 아니다.

 노팅에 키스마크, 그리고 깨문 자국까지, 요즘 이안은 마치 노아의 몸에 제 흔적을 남기지 못해 안달을 내는 사람인 것 같았다. 원래 알파들은 다 이런 건가, 아니면 이안이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건가 호기심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샤워라도 한 뒤 다시 잠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기에 노아가 일단 뜨끈한 물을 받았다.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노아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제 뒤를 문질러 보았다. 어젯밤 혹사당한 탓에 아직도 뜨끈하다 못해 푹신하게 부어 있는 곳을 열어내니 쓰라린 감각과 함께 이내 울컥 울컥 무언가 흘러나왔는데 그 양이 질겁할 정도였다. 노팅 때면 사정하는 양이 장난이 아니란 건 들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대강 뒤를 비운 노아가 뜨끈한 욕조에 몸을 담갔다. 몸이 살살 풀리는 느낌에 노아의 기분도 노곤노곤해졌다. 그래도 노팅은 제법 노아의 취향에 맞는 구석이 있었다. 적당히 아프면서도 적당히 느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뒤처리가 힘들어서 그렇지… 아니, 어제처럼 그렇게 몰아 붙이지 않으면 뒤처리가 그렇게 힘들 것 같지도 않았다.

 한참을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며 몸을 푼 노아가 다시 끙끙거리며 욕조를 나왔다. 허리고 다리고, 팔이며… 근육통이 작렬했기 때문에 아까처럼은 아니었지만 조금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 나왔다. 난 아픈 건 다 좋은데 어째서 근육통은 이리도 싫은 걸까… 아픈 거 차별하나?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꾸물꾸물 편한 옷을 입은 노아가 서랍을 열어 뒤적거려 피임약을 찾아 입에 털어 넣었다. 아득아득 씹어 넘기고는 노아가 꾸물꾸물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원래 남성 오메가는 여자보다 임신 확률이 낮은데, 노팅을 당하게 되는 경우에는 달랐다. 물론 노팅을 한다고 해서 다 임신이 되는 건 아니지만 노아는 절대 모험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클럽을 다닐 때부터 피임약은 주기적으로 먹어왔으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하지. 노아가 다시 가물가물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안 생일 파티, 가야 하는데… 침대에서 영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어제 저녁부터 내도록 굶었는데도 두통 때문인지 거의 식욕도 들지 않았다. 힐끗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였다. 일단… 조금만 더 자자. 그럼 좀 나아지겠지. 노아는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노아가 점심 무렵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몸이 나아지기는커녕 어째 오전보다도 더 나빠진 것 같았다. 두통은 많이 가라 앉았지만 목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여전히 입맛은 없었지만 속이 좀 쓰려서 노아가 느적느적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난방이 잘 되어 있건만 조금 오한이 들어 옷을 걸치고 밖에 나온 노아가 어깨를 떨었다. 어제 좀 많이 무리했나… 하긴 이맘때쯤에 잘 앓기도 했으니 감기에 걸린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노아 님, 괜찮으십니까?”

 식당에 들어서자 평소보다 피로해 보이는 얼굴에 고용인이 조금 놀라 물었다. 노아는 괜찮다고 말해 주었지만 목소리가 까슬하게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고용인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만 더해졌다. 

 노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항상 그렇듯이 몹시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차려져 나왔지만 노아는 남김 없이 먹어 치우던 평소와 달리 몇 입 먹고 식기를 내려 놓고 말았다. 평소처럼 맛있는 건 분명했지만 입맛이 없으니 잘 넘어가질 않았던 탓이었다. 노아가 물만 마시고 있는데 음식들이 치워진 지 얼마 안 되어 후식은 안 나오고… 대신 주방에서 몹시 불안한 얼굴의 요리사가 나왔다.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으셨습니까?”

 하도 평소에 노아가 맛있다고 칭찬하고, 비싼 와인도 사다 주고 남김 없이 다 먹었는데 오늘은 반도 채 먹지 못하고 음식이 돌려져 왔으니 요리사가 놀랐을 법도 했다.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오늘은 몸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런지 입맛이 없네요.”

 “의사를 부르도록 할까요?”

 시중을 들던 고용인이 몹시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지만 노아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냥 돌아가 방에서 푹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제 음식이 맛이 없는 게 아니라 노아가 몸이 좋지 않은 걸 확인한 요리사는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입맛을 돋우도록 매콤새콤한 파스타 요리와 양파 스프를 내놓았다. 확실히 아까보다 잘도 넘어간다. 정말 이 요리사를 어떻게 스카우트 해갈 수는 없을까 생각하며 노아는 깨끗이 음식을 비웠다.

 어쨌든 배가 부르니 좀 힘이 나는가… 싶었지만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 도로묵이었다. 마치 침대에 접착제가 발라져 있는 마냥 노아가 푹 이불에 잠겨 들었다. 반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얕은 잠을 자던 노아는 중간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는 소리에 다시 잠이 깼다. 도로 두통이 도져 노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비몽사몽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노아?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아… 베니.”

 아까는 좀 까칠했다 정도면 지금은 완전히 맛이 간 목소리에 노아가 목을 가다듬었지만 조금도 나아지진 않았다. 자다 일어난 지라 가라앉은 게 더욱 심했다. 자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점점 안 좋아지는 걸 보니 감기 몸살이 와도 단단히 온 모양이다.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노아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좀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어디 아파?

 둘째 형 벤자민의 목소리를 듣자 조금 정신이 돌아오면서 오늘 파티 생각이 다시 났다. 테너에게 가겠다고 해놨고, 이안도 어제 약속한 대로 같이 갈 것 같은데 정작 노아 자신의 몸이 안 되어서 도저히 못 가겠다. 따끈한 침대에 몸을 뉘이고 있으니 조금도 침대 밖으로 나와 걷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베니… 나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못 가겠어.”

 -목소리를 들으니 많이 안 좋은 것 같기는 하다.

 벤자민이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노아가 항상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때에는 꼭 한 번은 크게 앓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벤자민이 무리하지 말고 푹 쉬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노아가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도로 탁자 위에 올려 놓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아예 참석도 취소했겠다 노아는 마음 놓고 깊게 푹 잠에 들었다.

 중간에 노크 소리가 몇 번 들린 것도 같았지만 몸이 아프자 귀찮았던 노아가 아예 무시했다. 열이 오르는지 오한도 들고 몸도 여기저기 욱신거리고 아프고… 속도 메슥거리는 것 같고… 경험상 이럴 때는 그저 푹 자는 게 최고였다. 몸이 아픈 탓에 자다 깨다를 몇 번쯤 반복했을까. 노아는 어렴풋이 누군가의 서늘한 손길이 제 이마와 뺨에 닿는 걸 느꼈지만 열이 잔뜩 올라 반쯤 잠에 빠진 상태라 꿈결에 착각한 것도 같았다.

 그러다 노아가 다시 깨어난 건 누군가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 것도 들린 거지만, 이상하게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냄새 때문이기도 했다. 노아가 끙… 하고 눈을 뜨자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이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노아가 느리게 눈을 깜박거리는 동안 좀 나이 지긋한 사람이 노아가 깨어난 걸 바로 알아 차렸다.

 “오, 미스터 프로스트.”

 이제 막 마흔 살이나 되었을 법한 나이의 남자가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의 손에 들린 차트와 목에 걸린 청진기로 노아는 그가 의사라는 걸 알아 차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밀러 가의 주치의 조세프 피셔 입니다. 편할 대로 불러 주십시오.”

“…안녕하세요, 닥터.”

 노아가 멍하니 다 갈라져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안은 이제 막 집에 들어왔는지 코트와 장갑도 채 벗지 않은 차림새였는데 흘깃 시계를 본 노아가 조금 놀랐다. 거의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 오늘 이안의 퇴근은 꽤나 늦은 시간에 끝난 모양이다. 그러다 노아는 조세프가 제게 다가오자 움찔했다. 자신을 잠에서 깨운 냄새가… 조세프의 알파 페르몬인 모양인데, 전혀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꺼림칙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 그제서야 노아가 지난 번 윌리엄과 만났을 때 자신이 이안과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말을 이해했다. 아무래도 노팅을 하면 다른 사람의 알파 페르몬에 예민하게 되는 모양인데… 윌리엄이 알파 페르몬을 아무리 진하게 흘려내고 있어도 노아가 불편한 기색 하나 표현하지 않았으니. 보통 남들 앞에서 페르몬을 최대한 감추는 게 불문율인 건 이런 이유 때문인 모양이었다.

 노아가 얌전히 조세프에게 진찰을 받는 동안 이안이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 봤는데 조세프와는 달리 이안의 알파 페르몬이 아주… 친숙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와, 이게 바로 노팅 효과 인가 봐. 노팅 이펙트(effect), 뭔가 괜찮은 단어인데. 어감이 좋은 것 같아. 노아가 열에 들떠 조금 정신 나간 생각을 했다. 

 “뭘 했다고 감기에 걸려?”

 이안이 뻔뻔하게도 말했다. 뭘 얼마나 했냐고… 어젯밤의 자신을 돌아보면 그런 말은 나올 수가 없을 텐데. 아무리 지금 시기에 감기에 잘 걸린다고 해도 감기 몸살이 온건 분명 반은 이안의 책임이 아닌가. 그런데 차분하게 노아를 진찰하던 조세프가 노아의 편을 들었다.

 “첫 노팅 때면 종종 상대방이 페르몬에 과잉 반응하여 발열할 수 있습니다.”

 “……”

 “물론, 이건 과잉 반응이라기 보다는 감기 몸살에 가깝지만 말이죠.”

 입을 꾹 다물던 이안이 시크한 조세프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세프를 대하는 이안의 태도는 하이든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음… 공통점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라. 물론, 조세프는 나이가 지긋한 정도까진 아니지만… 어쩌면 이안의 취향은 연상일지도 몰라. 노아가 다시 조금 정신 나간 생각을 했다.

 “푹 쉬고, 물과 과일을 많이 먹으세요. 감기 몸살에는 약보다도 기력을 보충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세프는 허허 웃으며 노아의 주치의와 비슷한 말을 했고, 그 때문인지 노아는 조세프가 퍽 마음에 들었다. 저택에 대기하고 있을 테니 혹시 증세가 심해지면 언제든지 저를 부르라며 조세프가 노아의 팔에 무언가를 찰싹 붙였다. 수면을 유도하는 패치였다. 오늘 대체 몇 번을 잤다가 깨는 건지 노아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가물한 시야에서 잡힌 건 자신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이안의 모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온 몸이 후끈거리고 목이 말라 다시 눈을 뜬 노아의 눈에 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이안이 보였을 때, 노아는 잠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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